가부장제의 아름다움

by mmerlin

[멀린’s 100] Jun 20. 2023 l M.멀린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림 같고, 헤르몬의 이슬이 시온산에 내림과 같구나. 주님께서 그곳에서 복을 약속하셨으니, 그 복은 곧 영생이로다.

_ 새번역 성서, 시편 133편

나는 가부장제의 아름다움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들이 누리고 있는 이것을 우리는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지만, 유산을 집어던진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부모자식도 없이 개인주의로 점철된 서양 사회인 줄 알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얼마나 ‘가족적’인지. 그리고 얼마나 ‘가족을 중시’하는지 흠칫 놀랄 때가 많다. 그러니까 본전 생각이 나는 거지.

크루즈의 저녁 정찬 자리를 가득 채운 건 주로 가족들이다. 가족 컨셉의 크루즈라고 감안하고 보더라도 그런 모습은 유럽 여행지의 여기저기에 흔한 모습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손자, 손녀 삼삼오오 손잡고 심지어 유모차까지 대동하여 대륙을 탐험하는 가족들을 보면 그건 특정 장소나 상황에 한정된 건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쫙 빼입고 째즈바에 둘러앉은 이들이 친구들이 아니라 가족들이라는 것. 것도 3대 4대가 어울린. 그들은 심지어 ‘우노’를 한다. 원카드를 하고 보드게임을 한다. 것도 매우 진지하게. 세상에, 이 낭만적인 바에서 칵테일을 한잔씩 들고 연인 또는 그날 조우한 낭만의 하룻밤 상대와 밀어를 속삭이는 게 아니라, 떠들썩하게 웃어가며 매일 보는 그 얼굴들을 보고 또 보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멋진 훈남의 팔에 안겨 플로어에서 춤을 추는 그녀가 사랑하는 그랜드마더라니,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대단해 보이기도 하면서 한편 뭘 잃어버린 것 같아 씁쓸해진다는 거. 그 씁쓸함은 튀르키예의 한 가족에게서 부러움과 열패감으로 극치를 맛보아야 했다.

아다나의 하칸 집에 저녁 초대를 받았다. 동행중인 케말과는 10년 동안 안부를 주고받는 친구이다. 그들은 한 아파트의 이웃으로 만났다고 한다. 케말은 4형제를 두었고, 하칸은 3자매를 둔 요즘 기준으로 대가족들이다. 내 친구도 아닌데 현지인의 저녁 초대를 받아 가는 건 부담스러우면서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라, 부담 반 기대 반으로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놀라버렸다. 우리를 맞이하는 도열한 대가족의 첫인상에서부터, ‘아, 이 가족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건 뭐랄까? 그냥 느낌이고 직감이다. 화목한 가족에게서 풍겨나는 안정감과 집안 가득한 행복의 향기 말이다. 냄새,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리고 극진한 대접이 이어졌다.

그걸 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으니까. 7년 만에 다시 만난다는 케말과 하칸의 가족들은 마치 오래 헤어졌던 친지를 상봉하듯 정담과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누구는요?’, ‘누구는 이제 엄청 컸겠네요.’, ‘그래서 누구는 지금 어떻게 지낸대요?’ 아마도 그런 말을 주고 받았겠지. 튀르키예 말을 모르는 마법사는, 반가움으로 잔뜩 흥분해 통 통역을 해주지 않는 케말 덕분에 5시간 동안 튀르키예판 전원일기를 자막도 없이 바라보아야 했다. 그러나 무슨 말이 필요한가! 가족인데.

잘 정돈된 이슬람 중산층 가족의 그것은 매우 안정되고 유복하고 화목해 보였다. 특히 아이들이 계속 어머니를 도와 식사를 내오는 모습, 치우는 모습. 대접하는 손길에서는 소위 ‘가정교육을 잘 받았구나’ 하는 말은 이런 때 하는 거야, 가르쳐 주는 듯했다.

가정교육, 그것은 꼰대들의 세대 통치 방식이라고 빨간 줄을 쭉 그은 게 언제인가? 우리는 그것을 통째로 폐기해 버린 채 가정교육 대신 ‘조기교육’에만 매달려 오지 않았나? ‘네 인생은 네가 알아서 사는 거지’라고 자유를 준 것도 아니다. 너를 위한 거라며 협박하고는 있지만 부모의 위신과, 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도 모른 채 일단 줄지어 달려가고 있는 레일 위를 이탈하지 않으려 안달복달 애만 쓰고 있지 않았냔 말이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서 공부나 해’ 말고 어떤 교육이 대를 이었느냔 말이다.

대를 이어 철물점을 하고 있는 케말의 다른 친구 메흐멕은 풍족해 보이진 않아도 먹고 살 걱정 없이 삶을 안정되게 꾸려 나가는 것 같아 보였다. 그도 꿈이 있었겠지. 그러나 그 꿈이라는 것이 인정욕구와의 연결이 희미해지면 ‘그래, 아버지 일 도우며 살면 되지.’ 하는 안전망이 작동해야 인생이 견고해지는 것이다. 그래야 도전도 해보는 것이지. 실패해도 돌아와 머리 누일 곳이 있어야 맨땅에 헤딩도 해보는 거 아니겠는가. 그걸 국가가 대신 해주겠다고, 세탁소, 철물점, 빵가게, 과일가게, 채소가게 같은 지역 기반 생업들을 통째로 플랫폼 대기업들이 집어먹게 놔두고는 분배는 공산당 배급하듯이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게 복지라고? 돌아갈 곳도 없이 평생 비정규직을 전전케 만든 게 산업혁명이고 복지국가란 말이냐! 왜 세탁소, 철물점을 대대로 이어받지 못하게 몽창 몰아주었냔 말이지. 그게 ‘컴맹이라 미안해요’ 사과로 끝내버릴 수 있는 문제냔 말이다. 그게 노오오오오력, 느으으으응력 어쩌고 개인의 문제로 치환해 버리고 말 문제냐 이 말이다.

‘그게 왜 나라 탓이냐, 대박 욕심에 눈먼 니들이 바꿔 먹은 거지.’ 아들 친구라며 소개를 받고는 짜이 차 한잔을 내어준 이 철물점의 오랜 사장은, 가업을 이어가는 아들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마법사에게 한마디를 하는 것 같았다. 이 찬란한(?) 인류의 유산,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포기가 있었는지 니들이 알기나 하냐고. 한강의 기적, 압축성장 어쩌고 하며 홀라당 바꿔 먹은 주제에 무슨 불평이 그리 많냐고. 자신 역시 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은 전달자인 것을.

분식집에 가면 희한하게도 <전원일기>를 보게 된다. 분식집 사장님들은 모두 <전원일기> 매니아인지, 떡볶이를 쪽쪽 빨아대며 소리도 없는 영상을 보다 보면 느끼게 된다. 우리가 무사태평의 대명사처럼 쓰는 ‘전원일기’는 말 그대로 갈등과 해소의 드라마라는 것. 그게 아니고 어떻게 수십 년의 세월을 이어갔겠나. 드라마란 기승전결이고 갈등이 클라이막스에 이르렀다 해소되는 과정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것인데. 하지만 <전원일기>가 요즘의 드라마와 다른 건 갈등이 막장으로 내달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선가, 누군가, 역할을 바꿔가며 갈등을 유발하다 문제를 해소시킨다. 그 주인공들은 매번 달라지며 결국 한 사람 한 사람이 유의미하고 소중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지루하다며, 유행에 뒤처진다며 내려 버렸다. 유행이라고? 뭐가 유행인데?? 니들 동경하는 유럽식 라이프 스타일이 가족들이 삼삼오오 모여 우노하는 삶인데 도대체 뭐가 유행이라는 거지? 다음 대사까지 줄줄 읇겠는 막장 드라마가 전원일기보다 뭐가 새롭다는 거지? 양잿물은 안 버리고 애만 버린 게 아닌가 이 말이다. 그리고 모두 나 홀로 사니 재미있니? 진짜 우리는 양잿물만 들이키고 애만 버렸다. 유모차가 사라진 세상 말이다. 여긴 마을버스에도 유모차를 태우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누군가는, 슈퍼 히어로가 아니다. 그는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 친척, 친지, 이웃들이다. 우리가 모두 놓아버린 그 관계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쳐 귀찮게 할 것 같아 무음 처리해 버린 그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문제를 해결해 준다. 대안을 제시해 주고, 함께 고민하고 아파해 준다. 그건 분명 대가가 있다. 시도 때도 없는 간섭 말이다. 그런데, 그래서, 니 살림 좀 나아졌는가? 독고다이 나혼자 산다로 니 살림 살이에 혁명이 일어났냐고? 외로운 밤을 홀로 보내는 니 감성이 행복에 어쩔 줄 몰라 비명을 지르고 있냐 이 말이다. 왜 아버지가 생계를 책임지고, 어머니가 가족을 돌보는 게 억압의 상징이 되었는가? 왜 대를 이어가며 가업을 잇는 일이 무능력의 표상이 되었는가? 왜 아이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이 가스라이팅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나? 라고 하칸의 딸들이 마법사에게 묻고 있었다. 누가 봐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튀르키예 말로 말이다.

“다하 이스테르미신?”

더 드릴까요? 하칸의 딸들이 돌아가며 묻는다. 엄마 아빠가 시켜서 마지못해하는 볼멘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 동방예의지국에서 날아온 마법사에게 끊임없이 뭔가 대접할 것이 없을까 묻고 또 묻는 것이다. 그건 말뿐인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끊임없이 내어오는 음식들, 선물들. 먹던 것들, 가진 것들을 말 그대로 ‘나누는’ 것이다. 하칸 가족의 대접 중에 체면 때문에 무리해서 준비된 것은 없어 보였다. 모든 것은 그들의 일상에 속해 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나눔에는 보답이 있어야 한다. 주고받아야 하는 것. 그것이 삶이고 관계인 것이다. 우리는 일상을 나만 혼자, 내 가족만 혼자 누리려다 빈곤해졌다. 쪼그라들었다. 연대가 줄어들자, 초대가 사라졌다. 누가 요즘 집에 ‘초대’를 하는가? 그것 때문에 예전에는 ‘응접실’이 있는 넓은 집이 필요했는데, 손님이 자고 가야 하니 ‘사랑방’이 필요했는데. 초대도 하지 못할 집은 왜 자꾸 비싸지는지. 방 한 칸의 값은 나누고 초대할 때보다 더 작아지고 비싸져만 간다. 그게 계산이 맞는 건가?

동경하던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산다. 유럽 사람들도, 이슬람 사람들도, 아니 아마도 전 세계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 우리만 살지 못하는 그 삶을 그들은 여전히 누리고 있다. 우리들 중 그렇게 사는 이들은 부자들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버린 것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대를 잇는 일. 가족을 중시하는 일. 그들의 욕심을 욕하며 우리는 그들의 새경을 받고자 나 자신과 우리의 소중한 가족, 이웃들을 내다 바쳤다. 농경사회의 주인들을 산업사회의 일꾼으로 꼬셔내기 위해, 그들은 가족을 먹여 살려 주겠다 사탕발림을 했다. 그때의 월급은 가족의 생활비가 기준이었다. 학자금과 각종 경조사 비용은 당연한 임금 포함사항이었고.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슬며시 바꿔버린 계약. 비정규직, 연봉제. 능력껏 벌어가라는 사탕발림에 우리는 모두 재벌이 될 꿈을 꾸었다. 떵떵거리며 금의환향하겠다 출사표를 던지며 그들이 내민 계약서에 싸인을 했다. 그러나 몰랐지. 너의 회사는 그걸 언제든 ‘사표’로 전환시킬 수 있는 저주의 주문을 포함시켰다는 걸. 조기 퇴직, 명예 퇴직, 그리고 너와 나의 가족은 죽거나 흩어지거나.

우리 사회에 IMF는 여전히, 본격 진행 중이다. 누가 그걸 극복했다며 자랑스러워하는가. 금반지는 내어주고 빚만 대를 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가족 해체 비용으로 우리는 이자를 내고 있다. 파산, 파산상태다. 우리는 가족됨의 파산으로 국가를 선진국 대열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니 혁명이 필요할까? 언제나, 문제는 제도가 아닌 것이다.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의 신념이고 정신이고 태도이고 마음이지. 개종을 하고 이민을 간들 달라지겠는가? 마음이 빈곤한데.

가부장제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이들 역시 그 해체하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견디고 있을 뿐. 서로 어깨를 걸고 필사적으로 해체하는 힘으로부터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을 팔아 대박을 취하라는 맘몬의 유혹으로부터 서로의 귀를 막고 쏟아져 내리는 사랑의 주문을 외우고 있는 것이다. 이스테르미신, 이스테르미신.

그날의 만찬은 케말의 축복기도로 막을 내렸다. 케말은 하나의 신이지만 서로 다른 이름을 부르는 신에게 기도했다. 이 가정에게 축복을 내리어 달라고. 하칸, 파트마, 제이넴, 이렘, 에즈린.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며 신에게 축복을 빌었다. 축복이 차고 넘쳐흐르는 이 가정에게 더 많은 축복을 빌다니. 부익부 빈익빈의 원칙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줄에 서 있다.

케말은 한국말과 터키말을 순서대로 말하며 진심 가득한 기도를 마쳤다. 눈을 뜨자 어머니와 아이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성령이 임재한 것이다. 열린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응접실’에 일렁거렸다. 대접은 초대한 이들의 권리이며 축복은 초대받은 이들의 권리인 것이다. 하트마는 눈물을 훔쳐 내리며 마법사에게도 축복의 말을 요청했다. 밥값을 해야지. 마법사는 5시간 만에 입을 떼고는 이 복에 겨운 가족에게 직관의 언어로 축복의 말을 내어주었다. 얼마 만에 이런 화목한 가정을 보는지 모르겠다고. 딸을 더 낳을 걸 후회가 된다고. 그러나 이생에 처음 만났어도,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는 가족이라고. 나의 형제와 자매, 딸들, 가족들을 만나 너무너무 반가웠다고. 다시 만났으니 우리는 가족으로서의 관계를 이어가야 한다고. 기억하고 잊지 않겠다, 계속 생각하고 안부를 묻겠다 말했다. 그리고 약속의 증표로 지니고 있던 열쇠를 어느 생에 마법사의 딸이었을 막내 에즈린에게 내어 주었다. 열쇠를 받아 든 에즈린은 알 수 없는 감격에 벅차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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