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r 15. 2025 l M.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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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치는 클리셰와 신파에 폭삭 속아버릴까 봐 중간에 멈춰버렸어요. 어쩌다 내 최애 작가님과 감독님이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 버렸을까. 두 사람의 조합이 나온다 하여 기대한 마음이 얼마나 부풀었는데.

배신을 당한 듯한 기분까지 들었어요. 그놈의 ‘핵가족주의’ 이데올로기로 덕지덕지 발라진 듯해 말이죠. 이맘때즘엔 넷플복권 땡길 타이밍이라, 필모에 돌 한번 던져야겠다 마음 먹으셨나보다 생각하기도 했어요. 돈도 중요하잖아요.

에미, 애비 죽인 것도 모자라 애새끼까지 죽여버린 설정에는 욕이 다 나오더라구요. 그냥 멈춰버렸어요. 나는요. 이 마법사는요. 아무리 재미없는 시리즈라도 일단 보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본다구요. 그런데 이건 더는 못 보겠더라구요. 그대들의 전작들에 미안해서 말이죠. 내 인생 드라마들에 먹칠을 하는 것 같아 말이죠.

다들 찬사를 쏟아내더군요. 뭐든 그랬어요. 마법사의 취향은 다들과 어찌나 다른지. 이번에도 그런 게지. 쯧쯧 하고 있었어요. 아프지 않았더라면, 오랜만에 앓아눕지 않았더라면, 이번 드라마는 여기까지였겠죠. 그런데 4월에 눈 내리던 날, 사이토카인 폭풍이 불었는지 역행하는 바람이 몸으로 처들어와 온몸을 밟아대던 날, 밤새도록 치열한 근육통과 싸우고는 기진맥진한 채로 치워놨던 그대들의 작품을 다시 보기 시작했어요. 온 몸을 폭싹 솎았으니까.

‘졌다.’

정주행을 끝내며, 그리고 주행 내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아파서 우는 건지, 아련해서 우는 건지. 몸이 아픈 건지, 마음이 아린 건지. 그 신파를 끝까지 밀어붙여서 항생제처럼 들이부은 그대들의 합작에 두 손, 두 발을 들어버렸어요. 이렇게 쓰면 어떻게 버틴답니까, 이렇게 찍어 놓으면 어떻게 외면해요. 저런 건 우리 집에도, 너네 집에도 있는 이야긴데. 허구헌 날 보고 들어 새로울 게 없는 인생의 클리셰들인데. 라면으로 12첩 반상을 만들어버린 그대들의 솜씨에 씁쓸한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요.

어쩌겠어요. 인생이 신파고, 인생이 클리셰인데. 반복하는 재미로 보는 게 드라마고 본 얘기 또 보고 싶은 게 팬이라. 그래도, 이번에도, 당신들의 이야기는 역시 달랐다고. 너무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라 달랐다고. 별세상 얘기 아니고, 지독하게 기구하지도, 아름답기만 한 신데렐라 이야기도 아닌. 내 친구네, 내 이웃의, 내 가족의 이야기라. 알면서도, 폭삭 속을 줄 알면서도 보지 않을 수 없었다고. 게다가 엄마의 다음 생은 정말,

인생의 폭풍이 클리셰처럼 반복되면, 나부끼다 꺾이고 꺾인 채로 휩쓸리다가 어디 활짝 개인 개천가 바위에 걸쳐져 따뜻한 봄 햇살을 맞으며 서서히 말라가는 거죠. 그게 뻔해도 그 기분이 좋아서 또 태어나고 태어나는 거니까. 이번에는 사람으로 다음에는 바위로. 그렇게 마법사도 900번의 생 동안 수많은 인연들과 아버지로, 아들로, 어머니로, 딸로, 가족으로, 친구로, 연인으로, 원수로 수많은 신파를 쌓고 쌓아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그 인연의 반복을 기쁨으로 여기며 이번 생에는 또 어떤 역할을 맡으려나, 어떤 관계로 만나지려나 기대하며 너를 마주하지 않았겠어요. 서로의 속을 폭싹 솎아버릴 만큼 지지고 볶으며 드라마를 써 내려왔으니, 그 인생의 드라마가 신파가 아닐 수 없고 클리셰 범벅이 아닐 수 없는 거라고. 네네 알아요, 알아. 억겁의 세월에 뭘 하면 클리셰가 아니고, 귀인과 악연이 교차하고 기쁨과 슬픔의 카르마가 작용 반작용 하며 배역을 바꿔 대는 우주에서 누구인들 신파 없이 사는 인생이 있겠어요. 그러니 우리는 귀인과 이번 생을 누리고 악연과 다음 생을 기약하되, 다만 매번의 생을 클로징하며 서로 “폭싹 속았수다” 인사할 수 있으면 되는 거겠죠.

그러니 나는 오로지 당신께. 이번 생에는 낯선 그대와 지나가는 마법사로 잠시 조우하였지만 낯설지 않은 그대의 드라마를 또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이번 드라마는 여기까지 일 줄 알고 슬펐는데 더할 나위 없었다고. 이번에도 그랬다고. 그대 없었으면 없었을 드라마라고. 다시 만날 드라마까지, 마법사도 매번의 생에 그랬듯이 만날 그대의 드라마처럼 살겠다고 꾸벅 인사를 올립니다. 그러니 그대는 하고 싶은 거 막 다 하십시오. 그리고 혹 어느 생에 만날 기회가 있다면, 나도 귤 한 개마씸 줍서. 수고했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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