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0년 만이네요. 마법사님. 아니 이젠 FC님이라고 불러야 되나요?”
“정확히 말하면 13년 만이지. 아니 천삼백년 만일 수도 있고. 우리에게 그렇잖아? 시간이.”
“네 그래요. 그 긴 시간 동안 내내 찾았는데 자취를 보이지도 않으시더니. 보험회사가 대단하네요. 이렇게 마법사님을 드러내 보이고 말이에요. 연락하셨을 때 바로 알았어요. 보험설계사가 되신 건가? 하고 말이죠.”
“하하하 그런 거야?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이거 참 재미있네. 다들 내 연락을 받으면 보험을 시작했나 할 거라는 거잖아? 괜찮아, 잘 선택했어. 도망칠 기회를 주는 거니까.”
마법사는 보험설계사를 선택한 직관적 타당성을 발견하고는 스스로를 대견해하다가 갑자기 소년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소년 역시 마법사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마주 안았다. 때가 된 것이다. 소년은 이제 제자리에서 앞뒤를 왔다갔다만 하는 공중그네에서 내려올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달려야지.
“보험을 하나 들어주렴. 내 제안은 이거야. 종신 또는 종료.”
“종신 계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다면 영광인데요. 그럼, 이제 제게서 자취를 감추시는 일도 없는 거죠?”
“아무렴. FC가 되었다니까. 종신토록 고객을 돌보는 일이 나의 새로운 과업이야. 남은 생 동안 말이야.”
“아니죠. 마법사님은 전 생애를 그렇게 살아오셨잖아요.”
“알아주니 고맙네. 그러니, 자 어서 싸인부터 하게.”
마법사는 소년에게 세 가지 상품을 제안했다. 그리고 형편 되는 대로 그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했다. 계약이 이루어지면 이번 생에 단절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주기적으로 중단되었던 두 사람 사이의 역사를 생각하면 종신 계약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정말 제가 싸인만 하면 더 이상 사라지시는 일은 없는 건가요? 정말요? 정말?”
“하하 이 친구 속고만 살았나. 보험 회사가 얼마나 지독한지 아나? 아마 내가 자네 계약을 수행하다 말고 그만두면 지구 끝까지 쫓아 올 걸세. 받은 수당 토해내라고.”
“토해내고 사라지시면요?”
“그럴 일은 없어. 한 달이라도 수당이 멈추면 나는 파산해야 하니까.”
마법사는 파산이라고 말했다. 그는 벌써 이번 생에만 두 번의 파산을 경험했다. 그리고 이제 세 번째 파산을 걸고 이 일을 시작한 것이다.
“파산이라구요?”
“자네는 내가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내 자취를 지운 건 세상이야. 힘에 지나도록 과업을 수행하는 마법사가 감당해야 할 것은 운명들만이 아니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그대로 빚이지. 과업의 대가는 보상이 아니라 빚이더라고. 원하는 일을 선택한 대가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마법사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생각했다. 그건 반만 맞고 반은 틀리다. 마법사는 매번 직관에 의해 연결을 중단당하고 당국에 의해 번호를 차단당한 것이다. 요금 미납과 각종 연체로. 그것은 선한 싸움을 치르는 모든 마법사들이 감당해야 할 자본주의적 의무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연체와 파산의 늪을 매번 헤쳐나온다. 건강과 맞바꾸며.
“저는 살면서 많은 은혜를 입었어요. 여러 생에 걸쳐 언제나 마법사님처럼 불현듯 나타나 저를 돕는 이들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들은 곧 사라져요. 아무리 찾으려 해도, 자취를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사라져 버리니 찾을 수가 없어요.”
“다들 빚에 쫓기고 있겠지. 그러지 않고는 은혜를 베풀 수가 없어. 마법사들은 연금술사가 아니니까. 하지만 그대는 그네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질 않으니 우리는 그저 입맛만 다시고 있지 않겠나? ‘저 친구 돈 좀 꽤나 벌게 생겼는데 저러고 그네에 올라앉아서 내려올 생각을 안 하네’하고 말이야 “
“제가요? 제가 돈 좀 벌게 생겼나요?”
“그건 이미 자네의 이름이 말해주고 있지.”
소년의 이름은 ‘이안(二眼)’이다. 두 개의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진 소년. 마법사는 모든 생에서 그를 만날 때마다 그를 ‘이안’이라고 불렀다. 그는 여러 이름을 가졌지만, 아직 한 번도 ‘이안’이라는 이름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네, 은혜를 갚고 싶나?”
“네. 그러고 싶어요.”
“자넨 참 희한하군. 사람들은 은혜를 갚고 싶어 하지 않아. 은혜를 입고 싶어 하지 은혜를 갚고 싶어 하지 않는단 말이지. 그런데 그거 아나? 은혜를 갚으려면 은혜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 말이야.”
“네? 은혜를 베푸는 것이 은혜를 갚는 거란 말씀인가요?”
“그러니까, 그 말이네. 은혜를 은혜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이미 은혜를 갚고 있는 거란 말일세. 그러니 은혜를 베풀어야지. 이미 갚았으니까 말이야. 은혜는 주고받는 것이니까.”
“어떻게 베풉니까?”
“일단 그네에서 내려와야 하지 않겠나?”
소년은 머뭇거렸다. 그네에서 내려오라니. 그것은 소년이 가장 즐기는 인생의 낙인데, 은혜를 갚으려면, 아니 베풀려면, 그것을 멈추고 내려오란 마법사의 말이 선뜻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타지 않았나. 자네가 그네 타기를 즐긴다는 것은 내 잘 알고 있지만, 달리려면 그네를 내려와야 하지 않겠어? 언제까지 앞뒤로 왔다 갔다 만 하고 있을 셈인가?”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어요. 그러나 그것과 은혜를 갚는 것, 아니 베푸는 것이 어떤 상관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어허, 달려야지. 자네를 도왔다는 그 마법사들이 다 달리고 있는데 자네는 그네에 앉아서 왔다리 갔다리만 하고 있으니 연결이 끊어지는 게 당연한 일 아닌가. 내려와 달리라고, 같이 달려가 보자고. 걷고 달리다 보면 다 만나게 되어 있네. 어디서? 파산 법원에서 말이야. 하하하 마법사들 만나고 싶으면 거기로 오면 돼. 다들 거기서 만나니까.”
마법사는 소년을 초청하고 있었다. 물론 소년은 마법사가 아니니 파산을 할 리가 없다. 소년은 연금술사의 재능을 타고났을 뿐 아니라 동시에 두 세계를 모두 볼 수 있는 눈을 타고 태어났다. 그리고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눈을 질끈 감고 있었던 것이다.
“자네, 연금술사가 되어보지 않겠나?”
“네? 연금술사요?”
“그래 연금술사. 자네는 두 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그동안은 하나의 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보았지. 이제 남은 눈을 뜰 때가 되었네. 나를 다시 만났으니까 말이야. 언제까지 한눈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텐가? 이 멋진 재능을 가지고. 13년 만인, 아니 천삼백 년만인 지금은, 인류 역사에 두 개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조우하려고 하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네. 마크툽, 그렇게 기록되어 있으니까.”
“제가 무얼 할 수 있는데요?”
“문을 열어야지, 두 개의 세계가 만나도록. 더 이상 마법사들이 파산을 담보로 자신의 삶을 소진하지 않도록 마법과 연금술을 연결하는 거야. 자네가 말일세. 자네가 그 열쇠를 가지고 있으니까.”
“제가요? 제가 열쇠를 가지고 있다구요?”
“그렇지. 자네는 직관의 언어를 이해함과 동시에 또 다른 세계의 언어에 통달해 있지 않은가?”
“그게 뭔데요?”
“자네가 잘하는 그거 말이야. ‘엑셀'”
마법사는 소년의 손에 들린 열쇠를 말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고하는 법을 소년이 이미 통달해 있음을 상기시켰다. 일명 ‘엑셀적 사고’. 그것은 직관의 세계,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연금술의 본질이자 자본의 비밀을 푸는 도구이다. 연금술사들은 그 도구를 가지고 숫자로 돈을 만들지만, 사람들의 미래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가능성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 물론 그것은 마법사의 몫이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그것을 자본의 파이프와 연결시킬 수 없다. 그것은 연금술의 세계이므로 접근이 차단되어 있다. 결국 인류의 역사 동안 마중물을 부어대는 건 마법사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쉽게 고갈되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도래하면서 선견자先見者들은 일찌감치 ‘Venture’의 의미를 깨달았지. 그들은 두 개의 눈을 가지고 태어났어. 그래서 가능성과 현실성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거야. 그들이 연결한 파이프 라인이 인류를 우주에도 보내고,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계도 창조하게 만들었지. 다 돈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런데 그거 아나? 인류가 자본을 다루는 수준은 원시인이 불을 다루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걸. 아직 인류는 자본이 뭔지 몰라. 그런데 자네는 알 수 있지. 두 개의 눈을 모두 뜨면 말이야. 그네에서 내려와 세상을 달리며 두 개의 눈으로 바라보라고. 그러면 자본의 신비를 깨닫게 될 거야. 그건 창조의 열쇠이기도 하지.”
마법사는 말을 멈추고는 청약서를 쑤욱 내밀고 빙그레 웃었다. 소년은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일필휘지로 청약서에 싸인을 했다.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종신의 계약이.
“연금술사가 되거든 잊지 말게. 내 빚은 1억이라구. 아, 자네한테 하는 말은 아니고, 다른 평행우주의 자네한테 하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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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신 또는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