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행전] PART 3
저소비녀는 빚을 지고 말았다. 하고 싶은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들을 억압하다 그림자에 전복당한 게 아니다. 저소비녀는 자신의 이름처럼 아끼고 아낀 그것을, 하고 싶은 것에 쏟아부었다. 하고 싶은 것들은 점점이 흩뿌려지다 솜사탕처럼 뭉쳐지더니 마침내 굴러가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구르기 시작한 것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성공도 실패도 그렇다. 소비도 절약도 그렇다. 그리고 구르는 것은 멈출 수가 없다. 경사가 끝나기까지.
굴러떨어진 그것은 비탈면에 들어서야 멈추었다. 가속이 붙은 그것은 마구 불어나 결국 파산을 해야 할 국면에 들어서야 멈추었다. 하고 싶은 것을 했는데 파산이라니. 살고 싶은 삶의 결과가 빚이라니. 저소비녀는 혼비백산했다. 원하던 일, 저소비의 목적이 되었던 일에 사용했음으로 후회가 되지는 않지만, 어느새 불어나 눈덩이 아니 눈사태가 되어 버린 그것에 파묻히고 나니 감당이 되지 않는 것이다. 저소비녀의 이름이 무색해지고 만 것이다.
전신이 파묻혀 눈더미 속에서 눈만 뻐끔거리던 그녀는, 이내 사태를 파악하고는 온몸이 조여오는 긴장감이 압박해 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전후좌우로도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데, 이 눈을 녹여줄 봄은 언제 올지를 알 수가 없었다. 절망이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이 갇힌 몸을 어떻게 구제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러나 저소비녀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쪼그라드는 마음에게 호통을 쳤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눈더미에서 굴렀으니 파묻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그리고 나는 원하는 경사면을 향해 점프했어. 슬라이딩이 즐거웠고 스릴이 넘쳤지. 그리고 파묻힌 거니까, 죽지 않은 것만도 큰 행운이야.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저소비녀는 눈더미 속에서 까만 눈동자를 하늘 높이 치켜뜨고는 ‘이깟 눈더미 따위’ 하며 자신은 아랑곳하지 않겠다 호언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봄이 곧 오리라, 눈이 녹아내리고 다시 따뜻한 햇살 속에서 내달릴 수 있을 거라 장담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날씨는 더 차가워져갔고 온 몸이 동상에라도 걸릴 듯 얼어붙어 버렸다.
‘장난이 아닌걸. 이러다 설인이 되겠어.’
저소비녀의 호언장담이 조금씩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신을 다독이는 다짐과 긍정적 장담은 빠르게 떨어져 내리는 체온만큼 사그라들어가고. 탈출의 방법과 반전의 기운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질 않았다.
‘이러다 밤이 오면 그대로 잠이 들어버릴 거야. 그러면 이대로 죽게 될지도 몰라. 그래도 즐거웠어. 나는 다시 태어나도 같은 선택을 할 거야. 저소비도, 도전도…’
저소비녀의 상황은 더더욱 악화되었지만, 자부심만큼은 놓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것은 그녀의 삶을 지탱해 주는 생명유지장치 같은 것이다. 자부심을 놓으면 생은 처참해질 것이다.
저소비녀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에 새기고, 그것을 하기 위해 절제하고 절약하던 시간들. 그렇게 축적된 에너지를 단숨에 쏟아부으며 내달리던 도전의 순간들. 기억은 그녀의 마음을 덥혀줄 훌륭한 땔감이 되어주었다. 그녀는 소비하지 않은 채 차곡차곡 쌓아둔 마음의 에너지를 조금씩 꺼내어 얼어붙기 시작하는 여기저기에 온기를 흘려보내었다. 그녀는 가슴 떨리고 행복한 기억을 참으로 많이도 쌓아두었다. 덕분에 차갑게 얼어붙고 있는 대지의 서늘함에 대항하여 자신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산비탈 너머에서 무언가 거대한 짐승이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 뭔가가 오고 있다!’
저소비녀는 다가오는 그것의 정체를 느끼고는 본능적인 공포에 젖어 들었다. 이 산 중턱 눈더미 사이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 생물이 자신을 구원해 줄지, 자신을 해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기 때문이다. 온몸이 눈더미 속에서 꽁꽁 얼어붙어 버려 움직일 수가 없으니 애초에 도망은 생각도 할 수 없다. 구원자라면 자신을 구조해 줄 테고, 만일 맹수라면 영락없이 잡아먹혀야 할 것이다.
‘여기서 나의 생이 끝나는 것인가? 아, 뭐 그래도 좋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했으니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저소비녀는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원하는 일을 했으며, 그것을 하기 위해 저소비 생활로 일관했으나 결국은 경험하고 만끽했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그러나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원하는 일을 경험해 본 이들은 더하고 싶고 더하고 싶은 것이다. 욕구는 자라나고 실현된 자아는 경계 없이 확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우주의 원리이고 인간의 본분인 것이다. 꿈꾸는 인간의 본분 말이다. 저소비녀는 가까스로 자신을 설득하고 있으나 경사면을 타고 내려가는 스릴을 맛본 이가 여기서 질주를 멈추고 싶을 리 만무한 것이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싶을 뿐.
저소비녀가 스스로를 설득하는 사이에 그 정체불명의 생물은 어느새 저소비녀의 눈앞에 떡하니 나타나고 말았다. 그것은 네 발로 걷고 있었다. 눈은 부리부리하게 빛나고 기다란 수염은 마치 깃대처럼 양옆으로 뻗어 있었다. 몸을 뒤덮고 있는 하얀 털은 눈에 반사된 태양 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것은 거친 숨을 연거푸 내쉬었다. 산비탈을 넘어오느라 숨이 꽤나 찬 듯 헉헉거리더니, 마침내 그것은 저소비녀에게 자신이 누군지 드러내었다.
‘어흥~~~~’
그 고함이 어찌나 큰지 산과 계곡을 흔들어 버렸다. 그 충격에 다시 눈사태가 나고 말았다.
쿠구구궁~
산은 메아리처럼 그것의 고함에 화답하였고 거대한 눈사태가 쏟아져 내렸다. 산지사방이 다시 눈으로 덮여 버렸다. 온 세상이 하얀 구름 이불을 덮었다. 청명한 하늘에 태양은 반짝이고 싸늘한 공기는 쏟아져 내린 눈을 다져 포근한 이불솜을 만들어 버렸다. 저소비녀는 눈더미 속에 완전히 파묻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얗게 변해버린 세상 속에서 저소비녀의 머릿속도 하얗게 변해갔다. 호언장담도 희미해지고, 경사면을 타고 내리던 아름다운 추억도 아득해졌다. 저 멀리서 손을 흔들던 정류장의 사람들이 멀어져 가고,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행렬을 이루던 동지들의 얼굴들이 하나둘 비눗방울 거품처럼 꺼져 갔다. 그리고 하얀 세상에 혼자 두둥실 날아올랐다가 툭하고 끝도 없는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느낌이 온몸을 감쌌다.
‘아… 그래 이렇게 살았어야 하는 거야. 나는 이것을 원했어. 날아올랐으면 떨어져 내려야지. 그리고 추락하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은 몰랐어. 이렇게 하얗고 아름다운 세상이라면 불타는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보다 더 환상적인걸.’
떨어져 내리는 저소비녀의 눈앞을 수놓은 하얀 세상은 처연하면서도 지독히 아름다웠다. 이 광경을 목격하고 나니 ‘왜 사람들은 추락을 두려워할까?’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누구도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두려워하는 걸 거라고, 어쩌면 사람들이 지옥이라 여기는 추락하는 세상은 감추어진 세상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추락하는 자들에게만 펼쳐지는 파라다이스일 거라고. 신이 그들에게만 허락한 낙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락하는 이들은 날아오른 이들이야. 절벽에서 몸을 내던진 이들이라고. 중력의 법칙에 따라, 날갯짓이 멈추면 추락하는 것이 이치야. 그리고 날아오른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추락의 세상이지. 이토록 하얗고 충만한 세상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거야. 추락은 날아오르는 일만큼 힘들지 않아. 중력에 몸을 내어 맡기면 그만이니까. 그리고 모든 것은 보여지고 주어지지. 심지어 거슬러 오르던 공기는 나를 떠받쳐 주고 감싸안아 주지. 끌어당기는 중력이야말로 구원이야. 생명은 결국 모두 중력 아래로 사라지니까.’
쿵!
추락이 멈추었나 보다. 무언가 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말았다.
‘온몸이 부서졌을까? 뇌가 박살이 났을까? 아,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니 뇌가 박살 나지는 않았나 보다. 다행이다. 흉하게 망가진 몸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저소비녀는 지면과 충돌한 자신의 육체가 아름답기를 바랐다. 지상에서의 마지막을 흉한 모습으로 맞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은 산산이 부서졌을 테니 자신의 힘으로 움직여 볼 수 있는 것은 눈뿐이 아닐까 생각했다. 죽은 게 아니라면 눈은 뜰 수 있지 않을까? 저소비녀는 두려운 마음으로 눈을 떠 볼 용기를 내어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무언가 두툼한 솜털 같은 것이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것은 천사의 날개인가?’
“저기요. 고객님…”
두툼한 솜털 같은 것이 자신을 불렀다.
‘고객님이라니? 천국의 고객을 말하는 건가? 지옥 열차의 승객을 말하는 걸까?’
저소비녀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눈을 떠보았다. 눈이 부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앞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점점 시야가 밝아오자 저소비녀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눈앞에서 자신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은 호랑이가 아닌가!
“저기요. 고객님. 놀라셨죠? 몸은 좀 괜찮으세요? 꼴이 말이 아니시네요.”
“네? 여기가 어디죠? 지옥인가요? 천국인가요?”
“아하, 놀라셨구나. 괜찮습니다. 눈밭이라 크게 다치신 데는 없어 보이시네요.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어요. 급해서 쓸데는 좋지만, 암튼 빚은 인생에 해롭답니다. 자~ 어쨌거나 시간이 없으니까. 먼저, 이것부터 받으시고. 오늘 들려야 할 곳이 많답니다. 아, 제 소속은 이렇구요.”
호랑이는 가슴에 매달고 있던 신분증을 쓱 내밀어 보여주더니 행낭 안에서 서류뭉치를 꺼내어 저소비녀에게 내밀었다. 신분증에는 단정한 양복을 입은 증명사진 아래 추심원 호랑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소비녀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혼란에 빠져 버렸다.
“독촉장입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연체가 오래되셔서. 곧 재산 압류에 들어갈 거라는 최고장도 있구요. 고객님, 좀처럼 연락이 되질 않으셔서 이렇게 직접 찾아뵙게 되었네요. 자, 여기 싸인 해주시면 되구요. 빠른 시일 내에 채무 일체 상환 부탁드립니다. 예정된 기한이 지나면 법적 조치에 들어갈 테니까요.”
호랑이는 행낭에서 휴대용 단말기를 꺼내더니 전자펜을 내밀며 싸인을 해달라고 말했다. 저소비녀는 순간 모든 상황이 깨달지고는 머리가 쭈뼛 써버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나는 여기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데, 빚은 여기가 어디인지 상관없이 자신을 쫓아 온 것이다.
‘대단하다! 빚이여. 지옥까지 쫓아 오는구나. 호랑이까지 고용하다니.’
저소비녀는 꽁꽁 얼어서 잘 펴지지도 않는 손을 겨우 들어 단말기에 억지로 싸인을 했다. 호랑이는 수고하셨다 말하고는 다시 한번 빠른 상환을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쯔쯧,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오셨나 그래. 상황이 딱해 보이기는 한데, 호랑이한테 잡아먹히는 것보단 빚부터 상환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호랑이한테는 잡아먹히면 그만이지만, 이놈의 빚은 저승까지 쫓아오지 않습니까. 사람은 감당할 만한 채무를 져야 한답니다. 우리 같은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지만 사람은 기록을 남기니까요. 기록이 빚뿐이면 얼마나 망신입니까? 욕심은 금물이죠. 호랑이는 배가 차면 사냥감이 눈앞에서 어른거려도 쳐다보지도 않는데,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다 쓰지도 못할 돈이 있어도 욕심을 부리더군요.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저소비녀는 호랑이의 말에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감당할 만한 빚이라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감당할 만한 채무라고요? 감당할 만한 것만 감당하는 존재를 짐승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괜히 짐승과 인간이 다른 게 아니에요. 인간은 모름지기 감당하기 어려운 과업에 도전해 만물의 영장이 된 거예요. 왜 호랑이가 이 땅에서 멸종했는지 잊으셨어요? 사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과업에 도전했기 때문이에요.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건 빚이 아니라 짐승 같은 삶이라구요. 가만히 누워서 최소한의 욕구만 채우는 삶 말예요. 그러다 터전을 다 잃어버렸잖아요. 당신들 호랑이들은 본능대로 생존에만 연연하다 인간들에게 얼마나 많은 터전을 잠식당했나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천하를 호령하던 그 옛날의 호랑이는 어디 갔습니까? 총소리가 무서워 내빼다 이 모양이 된 거 아닙니까! 기껏해야 동물원 우리 안에서 사육사가 던져 주는 고깃덩이만을 기다리며 사는 삶이 당신들의 이상이라면서요? 호랑이가 광댑니까? 팬더예요? 언제부터 호랑이가 재롱을 떨어서 먹고 살았나요? 도전하는 인간은 신과 다름이 없어요. 신도 외로움을 떨치려 인간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인간이 자신의 창조 세상을 이토록 흔들며 도전할 거라는 걸 몰랐을까요? 신도 자신에게, 자신이 만든 우주에게 빚을 진 겁니다. 스스로에게 도전을 한 거예요. 내기를 건 거라구요. 그리고 그 도전과 내기가 우주를 여기까지 확장시키고 진화시킨 거예요. 뭘 알기나 해요!!”
호랑이는 저소비녀의 포효할 듯한 기세에 기가 죽어버렸는지 네 발을 모으고 가만히 앉아 눈만 뻐끔거렸다. 저소비녀는 분에 차 씩씩거렸다. 둘은 서로 말이 없었다. 저소비녀는 쏟아내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분한 기운에 말문이 막혀버렸고, 호랑이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호랑이는 한없이 순해진 눈으로 저소비녀의 불같이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다 갑자기 단말기를 꺼내어 어딘가에 메시지를 보냈다.
“왜? 뭐! 경찰에 신고라도 할려구?”
단말기를 타닥거리는 호랑이의 손동작을 본 저소비녀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호랑이의 손에서 단말기를 빼앗아 멀리 던져 버렸다. 단말기는 뺑글뺑글 회전하며 청명한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듯하더니 누군가의 손에 탁 붙들렸다. 그러자 갑자기 지진이 난 듯 대지가 흔들리며 무언가가 몰려오는 소리가 나더니, 거대한 호랑이 군단이 언덕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털을 휘날리는 백호 군단은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군단의 선두에는 하얀 수염을 휘날리는 산신령이 타고 있었고 그의 손에는 저소비녀가 던져 버린 단말기가 들려 있었다. 산신령이 하얀 지팡이를 높이 들자 백호 군단은 빠르게 쏟아져 내려와 저소비녀를 둘러쌌다. 모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소비녀는 살짝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싸인해주고 돌려보낼 걸. 경을 치게 생겼다 생각이 들었지만, 추심원 호랑이의 말에는 동의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했다.
‘어차피 죽었다 생각했는데 뭐. 됐어!’
저소비녀는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라며 고개를 더 빳빳이 치켜들었다. 그러자 산신령이 호랑이 등에서 내려 느린 걸음으로 저소비녀에게 다가왔다. 한동안 저소비녀의 눈을 빤히 쳐다보던 산신령은 저소비녀의 아랑곳하지 않는 기색을 느끼고는 빙긋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고객님, 빚이 얼만가요?”
“네?”
산신령은 저소비녀에게 물었다. 빚이 얼마냐고. 저소비녀는 자신의 빚이 얼마인지 모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패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지 못했요. 저는 계산하지 않고 달렸으니까요. 계산을 하면… 달릴 수가 없답니다. 그건 미련해 보여도 용기를 갉아 먹지 않는 저만의 방법이에요.”
“그렇군요. 멋진 방법입니다. 하지만 고객님, 훌륭한 레이서는 과속하지 않으면서도 승리를 얻어낼 줄 안답니다. 계기판을 본다고 약해질 용기로는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를 알 수 없죠. 기어를 바꿔야 할 순간은 더더욱. 미숙했다는 것은 인정하셔야 해요. 하지만 요즘은 저속 주행이 더 문제라, 그게 안전한 삶이 아닌데 말이죠.”
저소비녀는 산신령의 말에 머쓱해졌다. 실은 저소비녀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귀에 못이 박혀라 듣던, 말이 씨가 된다는 말에 묶여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호언장담을 해온 것이다. 말이 씨가 되니까. 그리고 실패를 생각하지 않았다. 말이 씨가 되니까.
“말이 씨가 되지만 열매를 맺게 하는 건 지혜죠. 도전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성취에는 지혜가 필요해요. 고객님은 용기는 충분해 보이는데 지혜가 부족하신 듯하니 이름을 지혜로 바꿔 보시는 건 어떨까요? 도움이 될 겁니다.”
산신령은 저소비녀에게 이름을 바꿔 보라고 권유했다. 저소비는 그녀의 정체성이 아니다. 그것은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이고 방식일뿐이다. 그녀의 목표는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때에, 하고 싶은 만큼, 하고 싶은 이들과 하는 것’이지 무작정 절약하고 아끼는 삶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했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계속 해 나가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다. 그게 되겠냐, 그렇게 살아서 되겠냐는 주위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들에서 자신을 지키려면 그녀는 용기로 자신을 무장해야 했다. 호언장담으로 그들을, 시선을, 피해 나가야 했다. 그러나 지혜가 부족한 용기는 거칠었다. 빚은 그 거친 용기의 부산물이다.
“추심원, 고객님의 채무가 정확하게 얼마지?”
산신령은 추심원 호랑이에게 저소비녀의 채무 현황을 물었다. 추심원 호랑이는 단말기를 몇 번 두드리더니 저소비녀의 채무 내역을 프린트했다. 산신령은 인쇄된 채무 내역을 받아 들고는 위에서 아래까지 쭈욱 훑어 내렸다.
“뭐야? 얼마 안 되네? 이 정도 사고면 여기에 0이 두어 개는 더 붙어야 할 텐데. 대단히 절약하셨군요. 네, 좋습니다. 탕감해 드리죠. 전체는 안되고, 계속 드라이브를 이어가시는 조건으로 도전 비용만큼은 탕감해 드릴 테니 가시던 길을 계속 가시면 됩니다.”
산신령은 저소비녀에게 빚을 탕감해 주겠다고 말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결과였다. 빚이 얼마인지도 몰랐으니. 저소비녀는 절약하고 모았다 그리고 때가 이르자 달린 것이다. 대지를 걷고 달리다 벼랑에 이르자 점프를 한 것이다.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중력을 따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추락의 끝에 탕감이 있었다.
“추심원, 지우개를 주게.”
“코스모스와 잠보 중에 어떤 걸로 드릴까요?”
“그야 코스모스지. 도전자의 채무는 우주가 갚는다네.”
산신령은 추심원에게서 코스모스 지우개를 받아 들고는 저소비녀의 채무 내역를 쓱쓱 지워나갔다. 그리고 추심원 호랑이는 행랑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불쑥 저소비녀에게 내밀었다. 빗이었다.
“자 고르셔요. 채무 상환자에게만 주는 기념품이랍니다. 참빗과 도끼빗 둘 중에 고르시면 됩니다.”
추심원 호랑이는 참빗과 도끼빗을 저소비녀에게 내밀었다. 저소비녀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도끼빗을 선택했다.
“아하, 산신령의 금도끼 은도끼군요. 알겠어요. 지혜가 무엇을 가져다줄지.”
저소비녀는 추심원에게서 빼앗듯이 건네받은 도끼빗으로 머리 위로 수북히 쌓인 눈더미를 슥슥 쓸어 내렸다. 저소비녀의 젖은 머리카락이 저물어가는 황금 노을빛을 받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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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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