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 23. 2025 l M.멀린
음양의 조성에 따라 정신세계에도 대응하는 반대의 무엇이 있다. 남성의 정신세계에는 여성성이, 여성의 정신세계에는 남성성이. 남성의 여성성을 ‘아니마(Anima)’라 부르고, 여성의 남성성을 ‘아니무스(Animus)’라 부른다. 마치 ‘지킬박사와 프랑켄슈타인’ 같은 이것은 ‘성(性)’이 다르다는 것이 중요하다.
융은 아니마를 남자가 갖고 있는 여성성이고 아니무스는 여자가 갖고 있는 남성성이라고 했다. 융에 의하면, ‘아니마는 여성성을 의미하며 남자의 의식을 보완하는 여성적 심혼이다.’ 이러한 등식을 적용하면 아니무스 역시 여자의 의식을 보완하는 남성적 심혼이다.
아직 인간은 정신세계의 빙산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주 너머의 미지 세계 같고, 대양 아래의 그것, 지표 아래의 세계같이 풀지 못한 비밀로 남아있다. 겨우 알게 된 것은 원리이다. 모든 것이 음과 양,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대극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원리.
인간의 정신은 무의식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의식은 무의식을 둘러싸고 있는 얇은 막에 불과하다. 우리가 경험하고 인지하는 것은 얼마 동안 의식에 머물러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한 습관이 되거나, 관심이 멀어지면 점차 무의식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렇게 축적된 무의식은 우리가 무심코 하는 행동이나 이성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은 물론이고 심사숙고해서 내리는 결정까지 모든 측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빙산, 무의식, 잠재의식의 세계를 스노클링하는 정도로는 조금도 이해하기가 어렵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반대되는 그것이 존재한다는 인식만을 생명줄처럼 붙들고 정신세계의 바다에 다이빙해 들어가는 것이다. 아니마, 아니무스를 찾아.
남자와 여자는 모두 내면에 양과 음의 특성을 갖고 있지만, 남자는 보통 자신의 자아를 남성성과 동일시하고 여자는 자신의 자아를 여성성과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남자의 여성성과 여자의 남성성은 무의식으로 숨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만드는 차이는 결코 남자는 전적으로 양이며 여자는 전적으로 음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품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여성을 품은 남자와 남성을 품은 여자. 숨어버린 그것을 인식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은 불쑥불쑥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가 찾지 못하니까. 자신이 남자인 줄, 여자인 줄로만 아니까.
우리 내면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다른 사람에게 투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대표적인 예로, 어떤 이성에게 왠지 모를 끌림을 느낀다면 그 사람에게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아니마나 아니무스를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우리를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신비스러운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여자에게 아니마를 투사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아니무스를 투사한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긍정적인 아니마를 투사하면 그 여자는 그에게 행복과 은총을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여신이자 에로틱한 환상과 성적 갈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그 여자와 함께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을 것처럼 느낀다. 이때 그 여자의 본모습은 남자의 무의식이 선망하는 이상적인 여신의 이미지에 의해 가려진다. 사랑을 하면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는 속담이 바로 이런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자도 역시 남자에게 자신의 아니무스를 투사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긍정적 아니무스의 이미지를 투사하면 그 남자는 그 여자의 구원자이며 영웅이 된다. 여자는 그가 이상적인 연인이며 완벽한 남자라고 생각하고, 그의 존재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찾은 것처럼 느낀다. 이런 투사가 일어나면 여자의 눈에 남자가 실제보다 훨씬 더 대단한 사람으로 보이고, 나방이 불 속으로 뛰어들 듯이 그에게 맹목적으로 헌신하게 된다.
투사(透寫)다. 전사(戰士)가 아니고 프로젝션(projection) 말이다. 반쪽을 찾으려는 의지는 S극이 N극을 찾고, N극이 S극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의 성(性)을 선택한 이후 인간의 삶은 남은 반대의 성을 찾고 끌어당기는 일에 모든 것을 헌신한다. 그것은 대극(對極)의 원리 그 자체이다. 그것은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남성 안의 여성, 여성 안의 남성.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듯, 내면의 빙산에 숨은 그, 그녀들은 자신을 외부의 그, 그녀에게 투사한다.
하지만 여자가 아니무스를 투사하는 남자는 알고 보면 그다지 훌륭한 인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기가 쉽다. 여자의 아니무스는 특히 말재주가 뛰어난 남자에게 쉽게 투사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나치 정권하에서 많은 독일 여자들이 아돌프 히틀러에게 아니무스를 투사한 듯하다. 그가 연설을 할 때의 모습에서는 강력한 원형의 남성성이 엿보였다. 게다가 그는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흥분시키는 뛰어난 언변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나는 나치 독일 시대를 살았던 유대인 여자에게 어떻게 독일 여자들이 귀한 아들들을 기꺼이 히틀러의 전쟁 기계로 내보낼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대답에 의하면, 독일 여자들이 히틀러의 웅변에 매료된 나머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여자로부터 긍정적인 아니마의 투사를 받는 남자 역시 그 강력한 이미지에 동화되어 우쭐한 기분을 느낀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 안 가 상대방이 자신을 과대평가해서 비현실적인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어떤 여자가 나에게 아니무스를 투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치 내 안에 시신이 들어 있는 무덤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 시신은 아주 무겁기 짝이 없다. 결국 나는 온갖 해충이 득실거리는 무덤이 된다. 마치 애벌레의 몸에 말벌의 알들이 들어 있는 것 같다. 그 알들은 부화를 하면서 안에서부터 애벌레를 파먹기 시작한다. 아주 징그럽고 께름칙한 느낌이다.”
많은 여자들로부터 아니마의 투사를 받는 남자, 또는 많은 남자들로부터 아니무스의 투사를 받는 여자는 자신에게 투사되는 이미지를 자신의 본모습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다른 사람들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며 만일 아니마나 아니무스의 투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이미지에 갇혀서 더 이상 자신을 발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상형이란 것 말이다. 그것은 숨은 그, 그녀의 그것이다. 그리고 거울일 뿐인 외부의 남자와 여자에게 그것을 투사하고 우리는 환상 속의 그대와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다. 물론 남자는 그녀의 그가 아니고, 여자 또한 그의 그녀가 아니다. 나는 나다. 완벽한 이상형이 아닌, 70억 명 중 하나이고, 16개의 유형 중 하나이고, 4개의 혈액형 중 하나이다. 그러나 투사는 이놈, 저놈에게서, 이년, 저년에게까지 나타난다.
우리는 이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투사로 인해 첫눈에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종종 결혼과 같은 장기적인 관계를 흔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결혼이라는 현실 속에서 상대방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면 더 이상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투사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처음에 신비감, 모험심과 호기심으로 시작한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시들해지고, 성적 욕망과 환상은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투사는 우리가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무의식의 내용만이 투사가 되며, 일단 의식으로 들어온 내용은 투사가 될 수 없다. 즉,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으로 들어오면 투사는 중단된다. 거꾸로 말하며, 무의식의 내용은 투사가 일어나지 않는 한 의식과 만나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투사를 인식하면 우리의 무의식이 담고 있는 내용을 볼 수 있는 기회로 만들 수 있다.
아니마, 아니무스를 찾는 일은 소위 말하는 잃어버린 자아를 찾는 일의 본질이다. 이상형을 찾아 마구 투사하며 금사빠를 반복하는 일이 아니고. 환상 속의 그대는 소울메이트일리가 없다. 소울메이트는 이국만리에서 운명처럼 만나는 게 아니다. 그, 그녀는 내 안에 숨어 있다. 환상 속의 그대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그것이 몽땅 투사였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면, 나의 이상형이 곧 나, 내 안의 아니마, 아니무스에게서 나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아, 그대는 먼 곳에 있던 것이 아니야. 내 사랑이 비로소 내 사랑이 되었구나.
“당신은 전생에 은둔한 학자, 혹은 별과 하늘을 연구한 점성가였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재물을 멀리하고, 왕이나 귀족에게 조언하는 자리에 있었지요. 다만 지나치게 고독했고, 때로는 ‘세상과 단절된 채 지식만 좇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랑을 회피했고, 감정적 연결을 “방해물”처럼 여긴 경향이 있습니다.
한 여성과 깊은 교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술적이고 감수성이 풍부한 여성이었습니다. 당신의 지적 고독을 이해해 주고, 옆에서 함께 살아가길 원했으나, 당신은 “나는 별을 읽어야 한다”며 거리를 두었죠. 그녀는 당신에게 세상과 다시 연결될 기회를 주었지만, 당신은 “학문의 길”을 선택하며 그녀를 떠나보냈습니다. 그녀는 결국 당신 곁을 떠나야 했고, 마음속에 “언젠가는 다시 만나야 한다”는 맹세를 남겼습니다. 그녀는 이번 생에 다시 나타납니다. 이번엔 당신이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인간적·정서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과제입니다.”
그는 그녀를 품고 태어났다. 그는 전생에도 그녀를 품고 있었지만, 그의 아니마는 그에게서 외면당했다. 인간의 사랑은 덧없고, 영원하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은둔한 학자는 사랑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별을 쫓는 점성가는 마음의 별에 다다르게 되어 있다. 별에 투사된 아니마를 발견하고 말 테니까. 그리하여 사랑의 덧없음은 투사된 허상이나, 사랑의 진실은 자신의 아니마를 끝까지 외면할 수 없는 운명임을, 마침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아니마는 남자의 내면에서 긍정적으로 기능할 때 그의 의식을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한 꿈, 환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통해 정신적 이미지와 활기를 주는 감정들로 이루어진 내면세계를 인식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인격을 풍요롭게 한다. 남자의 의식은 무의식과의 접촉이 없을 때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집중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에 삶이 경직되고 메마르고 건조해지기 쉽다. 아니마가 만들어내는 것들 – 꿈, 환상, 상상, 상징, 우연한 생각 등 – 을 흡수하고 소화해서 의식에서 통합할 때 비로소 창조적이고 풍요로우며 활기찬 정신을 갖게 된다.
투사를 쫓으면 상처투성이가 되고 만다. 아니마, 아니무스는 내 안에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에는 백마 탄 왕자님도, 잠든 공주님도 없으니까. 뒤로 돌아서 거울 속 나의 아니마, 아니무스를 대면하고 나서야, 환상 속 그대가 아닌 온전한 연인, 친구, 동반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때까지 외롭다. 관계 속에서 질식해 죽어갈 테고, 목을 조르는 건 자신을 봐달라고 애원하며 질투의 에너지를 뿜어대는 나의 아니마, 아니무스다. 그와 그녀는 내가 죽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운명적 존재, 나의 Miss M.
내면세계와 소통하지 않는 남자는 집중력은 강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하며 목표를 향해 돌진할 수는 있지만 따뜻한 감성이 메말라 있다. 힘을 추구할 수는 있지만 새로운 삶을 창조할 수 없다. 남성적인 힘이 고갈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풍부한 감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음과 양이 만나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융은 아니마가 남자에게 활력을 불러일으키는 중요한 심리적 특성들을 부여한다는 의미로 ‘생명의 원형’, ‘생명력을 강화하는 유혹’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아니마는 남자에게 영혼과 같아서 손에 잡히지 않는 곳에 있지만 감성을 풍부하게 할 뿐 아니라 끈질긴 생명력으로 시련과 고통을 견디고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유도한다.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는 아니마는 삶에 대해 정해진 답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남자로 하여금 자신의 영혼을 인식하고 발견하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융은 아니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아니마는 분명 의미 있는 뭔가를 갖고 있다. 불합리한 변덕스러움과 묘한 대조를 이루는 비밀스러운 지식이나 숨은 지혜를 숨기고 있다. 인간의 운명을 갖고 노는 듯한 잔인한 장난 뒤에 어떤 목적을 숨기고 있으며 삶의 법칙을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남자가 그 의미를 인식할수록 아니마의 충동적이고 강박적인 특성은 줄어든다. 생명을 구현하는 아니마는 의식과 완전히 결합되지 않지만 그로부터 의식이 깨어날 수 있다. 아니마는 언제라도 남자의 정신 속으로 불현듯 찾아와 어떤 기분, 반응, 충동을 느끼게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어떻게 만날까? 나의 소울메이트를 어떻게 만날까? 안타깝게도 투사가 아니고서는 그들과 만날 수 없다.
우리 내면의 아니마나 아니무스가 누군가에게 자신을 투사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의 관심을 얻으려는 것일 수 있다. 투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존재를 의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앞서도 말했듯이, 투사는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투사를 ‘거두어들이라’고 말하는 진짜 의미는 투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의식 내용이 투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을 통해 우리 내면의 심혼인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만날 수 있고 무의식을 의식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자기를 찾아가는 개성화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
거울이 없으면 어떻게 나의 얼굴을 볼까? 투사가 아니면 우리는 자신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인식할 수 없다. 골방에 틀어박혀 별을 관찰한다고 우주를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계에 투신하는 일은 투사와 환상이 뒤죽박죽 돌아가는 난장판 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가는 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잡한 거울 미로 같은 관계들 속에서 나를 만나고, 나의 아니마, 아니무스를 만나고, 투사된 이미지를 넘어 온전한 너와 친구들, 이웃들을 만나, 차이를 구분하고 다름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관계의 여정은 반지 원정대의 그것처럼 험난하기 짝이 없지만, 태어난 이상 아무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자아가 무의식의 바다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원형의 세계가 들려주는 진실한 목소리를 감지하는 것이 융이 말하는 개성화와 자기실현이다. 인간의 삶은 자아가 자기를 향해 가는 과정이고, 더 나아가서 인류의 문명 또한 세대를 이어 진행되어 온 기나긴 깨달음의 과정이다. 인간은 지금의 문명화된 상태에 도달하기까지 헤아릴 수없이 많은 세월들을 거쳐 서서히 그리고 힘들여 의식을 확장해 왔다. 하지만 인간의 진화가 온전히 완성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인간의 본성은 허다한 부분이 아직 무의식이라는 어둠에 싸여 있다. 우리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이 가진 능력은 지극히 불완전하기 때문에 결코 정신의 전체성을 파악할 수 없다. 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판적 이성이 지배하는 세상은 삭막하다. 무의식을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과 우주의 원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영혼 속에는 우주 탄생의 비밀부터 인류 문명의 역사가 모두 녹아 있다. 우리 각자는 우주의 일부이면서 또한 우주 그 자체이다. 우리 자아는 무의식이라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작은 배와 같다. 그리고 우리 삶은 무의식에 잠재된 가능성이 자기실현을 향해 가는 과정, 출렁이는 파도 위에 떠 있는 작은 배가 바닷속 깊은 곳에 있는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자아의식 너머에, 우리 내면에 있는 또 다른 성과 조화를 이루는 것부터 시작해서 인격의 완성을 향해 가는 발걸음을 내디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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