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멋진 하루

[MOVIE 100] Jun 21. 2022 l M.멀린

 

나의 옛 이름과 이별하던 해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병운은 현실 속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인물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인물들은 대체로 모두들에게서 대차게 까이는 인물이니까.

반면에 그의 옛 연인 희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이다. 현실에는 그런 옛 연인이 널렸다. 자기 힘든 삶을 투사해대는. 심지어 연락도 끊긴 지 오래인 옛 연인에게까지 찾아가 빌려 간 돈 350만원을 요구해대는. 아마도 그녀 역시 병운을 대차게 차버렸을 거다. “돈 갚아” 하며.

영화는 하루 동안 병운과 같은 캐릭터에 대한 편견을 대차게 까내려간다. 옛 연인의 돈을 갚으려고 굳이 찾아보지 않았을 관계들을 하나하나 훑어 내려가는 병운. 뒤를 따르는 게 어이없지만, 희수는 350만 원이 아쉬우니 그의 관계들에 동행한다. 그리고 ‘그럼 그렇지. 네까짓 게.’ 하려던 마음을 계속 들킨다. 아니 타이밍을 찾고 찾는데 매번 병운이 이루어 놓은 관계의 탄탄한 탄력에 뒤로 물러나지게 된다. 아니, 이게 아닌데.

돈이 필요했을까? 희수가 병운을 찾은 건 꼭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리라. 풀리지 않고 꽉 막혀 버린 인생, 누구한테 잔뜩 덮어씌우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아 만만한 상대를 찾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병운, 아마도 그의 방식이었다면 희수에게도 다르지 않았으리니. 희수가 알지 못하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오히려 확인하고픈 마음이, 무의식이 있지 않았을까? ‘병운아, 너는 나처럼 살고 있지 않지? 나 같은 속물이 아니잖아.’

누구라도 그렇게 살아주기를,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해도 세상 어느 구석에는 그렇게 사는 이가 한 명이라도 존재해주기를. 우리는 벼랑 끝에서, 막다른 골목에 이르면 더욱 간절해진다. 타협하는 방식으로 그곳까지 이르러 타협으로는 아무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되면, 이제 의지할 것은 진짜뿐이니까.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러면 돌아갈 곳이 생겨날 것 같으니까.

딱 하루 동안, 집도 없이 여행 가방을 들고 떠돌고 있는 병운에게 희수는 의지한다. ‘너의 삶을 보여줘. 너의 관계들. 언제나 진짜였던 너의 관계들. 그러면 나도 다시 하루를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병운은 그렇게 살아왔고 살고 있다. 350만 원. 모른 척 도망쳐도 그만인 350만 원. 차라리 자신의 숙소 비용으로 쓰는 게 더 나을 그 돈을 희수의 사정을 외면하지 않으려 양보한다. 마음을 다한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돈 빌리는 게 어때서? 없으면 있는 사람한테 좀 빌리는 거고 생기면 갚고, 내가 있으면 남도 좀 도와주고 그게 바로 사람 사는 맛이지.”

“그래 그렇게 사세요.”

‘너 그딴 식으로 살지 마.’ 할 자신은 없다. 그런 세계는 누구나 열망하니까. 그러나 빌리는 사람은 많은데 생기면 갚는 사람은 없고, 내가 있다고 남도 좀 도와주는 일이 도통 삶에 일어나지 않으니. 우리는 각자도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희수처럼 자꾸 코너로 몰린다. 사람은 그렇게 살도록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으니까.

누군가에게, 아주 오랜만에 만난 누군가에게 멋진 하루를 선사할 수 있을까. 나의 삶을 읽고 들으면 ‘난 너처럼 살진 못하겠다.’ 소리를 듣더라도 ‘아, 이런 삶이 존재하는구나. 나는 그렇게 못 살아도, 누군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세상은 살만 하겠구나.’ 그런 소리를 나도 듣고 싶어졌다. 그래서 옛 이름과 이별하며 멋진 하루들을 쌓아가야겠다 마음을 가졌었다.

모든 삶이 그럴 만하지만 모든 삶이 멋지지는 않다. 그리고 언제든 하루 동안 이만큼이나 꺼내 보일 자산을 가진 삶은 더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자꾸 고립되고 단절된다. 그래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누군가는 언제나 있다. 덕분에 그들은 오늘 머리 누일 곳도 없게 되는 일이 허다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마음과 뜻에 정성을 다하다 보니 만나게 되는 하루일 뿐이고 그러면 그것은 멋진 하루인 것이다.

내게도 돈 갚으라고 찾아온 옛 연인에게 보여줄 멋진 관계들이 있는가. 나는 그런 자산을 충분히 쌓아왔는가. 그건 멋진 하루들이 쌓여 만들어 내는 만리장성이겠지. 너와 쌓지 못한 만리장성을 누구들과는 계속 쌓아가고 있다면 대차게 까인 건 누구일까?

나는 감히 이 <멋진 하루>가 전도연과 하정우의 최고작이라고 손꼽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 전도연의 미소는 그녀의 연기 중 최고라고. 편견을 대차게 까내려간 병운의 힘이라고. 네게도 그런 미소를 선물하고 싶다고.

물론 빌린 돈 350만 원과 함께.

 

 

 

P.S.
이건 나의 해방일지.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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