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결국 세상에는 로봇만 남게 될 거야

[MOVIE 100] Mar 15. 2022 l M.멀린

“아빠가 새엄마랑 아기랑 할머니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할머니랑 아빠랑 새엄마랑 밥 먹고 있었고 나는 옆 방에서 아기를 보고 있었어요. 근데 아기를 안아보고 싶어서 내가 아기를 안았는데 아기는 내가 무서운 사람인지 알았나 봐요. 자꾸 우는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랑 새엄마랑 아빠랑 달려왔어요. 그런데 아기 몸에서 피가 나고 있었거든요. 옷핀이 찔렀었어요. 그런데 엄마랑 할머니랑 아빠는 내가 아기를 찔렀대요. 나 때문에 아기가 죽을 뻔 했었대요.”

_ 영화 <여행자> 中

“데이빗, 들어. 이제.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엄마는.. 엄마는 널 여기 놔둬야 해.”

“게임인가요?”

“아니야.”

“언제 돌아오실 건가요?”

“돌아오지 않아, 데이빗 이제 여기 혼자 살아야 해.”

“혼자요? 고장 나서 죄송해요. 엄마 머리 잘라서 죄송해요. 엄마와 마틴이 다쳐서 죄송해요. 엄마, 피노키오가 진짜 사람이 됐듯이 나도 사람이 되면 집에 갈 수 있어요?”

“그건 그냥 동화란다.”

“동화도 현실을 반영하잖아요.”

“동화는 가짜야, 너도 가짜야!”

“엄마, 왜 절 버리시나요? 왜 저를 버려야 하시나요? 진짜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기회를 주시면 진짜처럼 할게요.”

_ 영화 ‘AI’ 中

인간은 왜 연약하게 태어날까? 어느 동물들처럼 태어나자마자 걷고 뛰고 하지 못할까? 엄마 젖을 먹어야 하고 바로 뛰고 걷지도 못하고. 왜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를 멈추고 도구적 진화의 길로 들어선 걸까? 모노리스 때문에? 날지 못하는 불쌍한 인간.

부모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아이. 우리는 모두 의존으로부터 인생을 시작한다. 태어나자마자 갈 길 가지 못하고 꽤나 오랜 기간을 의존된 상태로 인생을 배워간다. 그건 점점 더 길어지고 있다. 이제는 늘어날 대로 늘어나 삼십 년을 살아도 여전히 의존돼 있다. 그런 구조를 자꾸 길게 늘여가는 이유는 뭘까? 그건 진화에 도움이 되는 걸까?

배워야 할 게 많아지고 익혀야 할게 많아지니, 사상 최고의 스펙이라는 새로운 세대는 사상 최악의 취업장벽에 막혀 한 발도 나서지 못하고 있다. 사회 속으로.

세상에 제일 큰 사랑이 부모의 사랑이라고 하는 말은 틀렸다. 부모에게 아이는 아이에게 부모만큼 절대적이지 않다. 또 낳을 수 있으니까. 다른 자식들이 있으니까. 그것은 생의 첫번째 장애물이다. 경쟁자 형제.

이 서로 다른 두 아이. 성별도 다르고 태생도 다른 사람 아이와 로봇 아이에게도 모두 경쟁자가 있었다. 새엄마의 아기와 엄마의 진짜 아이. 그리고 둘에 의해 둘 다 버려지게 된다. 새엄마의 아기는, 그저 안아보고 싶었는데 불운하게도 옷핀에 찔러 피를 흘리고 있었고. 엄마의 진짜 아이, 어쩌면 형제라고 불렀어야 할 그 아이는, 로봇 아이를 불운의 길로 이끌었다.

“엄마 머리칼을 잘라와 너와 나눠 가지고 싶어. 그걸 지니고 있으면 엄마가 널 더 사랑하게 될 거야. 영화에 나온 공주 봤지? 왕자의 머리칼을 목걸이 안에 지니게 되니까. 왕자가 공주를 사랑했잖아.”

영악한 사람 아이 때문에 엄마의 사랑을 얻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한 로봇 아이는 엄마의 머리칼을 자르다 의심을 사게 되고, 위험하게 여겨진 로봇 아이를 사람 엄마는 버리기로 한다.

“엄마, 왜 절 버리시나요? 왜 저를 버려야 하시나요? 진짜가 아니라서 죄송해요. 기회를 주시면 진짜처럼 할게요.”

자식의 사랑이 부모의 사랑보다 더 크다. 그건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는 영원히 하나뿐이니까. 그것은 매우 불리한 출발점이다. 의존되고 종속되는 출발점. 그러나 인류는 그걸 연대로 내리사랑으로 가족과 사회라는 공동체로 발전시켜 왔다. 그것에서 모든 관계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연대와 사랑이라는 관계가 인류 생존의 기본이고 기초이고 본질이다. 이었다.

그것이 끊어진 아이들은 흉내를 내서라도 생존해야 한다. 입양된 가정에서 다른 부모, 나를 낳아준 부모가 아닐지라도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하고, 입양된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 로봇 아이는 피노키오처럼 파란 요정을 만나 진짜 사람이 되어야 했다. 되고 싶었다.

진짜 사람, 그건 뭘까?

영화는 2,000년 뒤 인류가 멸종되고 로봇만이 살아남은 미래로 로봇 아이를 데려간다. 그들은 인류보다 더 연민하고 더 연대적이다. 이 화석 같은 로봇 아이의 소원을 기꺼이 들어준다. 엄마의 머리칼 유전자로 로봇 아이에게 엄마를 복원시켜 준 것이다. 하루밖에 살지 못하는 엄마. 그러나 아이에게는 2천 년 동안 빌어 온 소원이 꿈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꿈을 꾸게 된다. 잠을 자게 된다. 드디어.

“잘 자렴, 아가야”
“저는 잘 수 없어요. 그냥 침묵할 뿐이에요.”

로봇은 잠을 잘 수 없다. 꿈도 꿀 수 없다. 그들은 다만 인간들이 잠들어 있는 동안 침묵할 뿐이다. 그러나 진화한 로봇은 잠도 자고 꿈도 꾼다. 아니 영화 속 로봇 아이는 로봇 최초로 꿈꾸고 그것을 이루어 낸 ‘참 인간’이다.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이라 여겨졌다. 꿈꾸고 꿈을 이루어 내는 일. 그것을 해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라고, 그래야 인간이 아니냐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아니 너무 거창하다. 진짜 사람이 되어 엄마의 사랑을 받는 일. 그것 때문에 너도 그러고 있으니까.

연대하는 인간, 사랑하는 인간, 상호작용하는 인간이 아니면, 아닐 거면. 우리는 다시 생물학적 진화를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새들처럼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치타처럼 빨리 달리 수 있을까? 사자처럼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될까? 우리가 손에서 저 괴물 같은 도구들을 모두 던져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면, 몸에 털이 다시 숭숭 나고 근육은 강해지고 팔은 날개가 되어줄까? 그러면 인류는 행복할까?

어떤 삶의 방식, 생존의 방식이든 모두 자연의 섭리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이 삶의 방식은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다. 존재와 존재가 상호작용하는 일, 사랑하는 일. 그것을 멈추면 퇴화되고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절벽에서 날자고 뛰어내릴 인간들이 아니니까.

 

“당신은 모르실꺼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세월이 흘러가면은 그때서 뉘우칠거야.”

 

사람 아이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분노하고 갈등하다 마침내 운명을 받아들인다. 버려진 아이의 운명. 그리고 마침내 입양될 부모의 낯선 언어를 익히기 시작한다. ‘굿모닝, 파더’ 비로소 여행을 시작하는 것이다. 진짜 사람이 되는 여행, 아빠를 만나러 가는 여행. 이 여행은 로봇 아이의 여행처럼 2,000년이 걸릴까? 누가 아이의 꿈을 이루어 줄까?

 

‘아빠가 날 다시 찾으러 올 거예요.’

 

로봇 아이는 2,000년을 빌어 마침내 꿈을 이루었다. 그리고 사람 아이에게 꿈은 이루어진다고 너도 파란 요정을 찾아보라고 귓속말을 해주고 있다. 그런 여행을 하는 중이라면, 너도 그런 여행을 하는 중이라면, 나도 너를 위해 기도할게. 네 꿈이 이루어지도록.

다행히 사람 아이에게도, 로봇 아이에게도 친구들이 있었다. 여행에 동행해주는 친구들, 그리고 여행을 떠나도록 용기를 북돋워 주는 친구들. 손 잡아 주는 친구들. 우리는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다. 엄마는 아빠는 너를 버렸어도 너의 친구들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런 친구를 가지고 있니? 그게 사람이란다. 그런 친구가 되어 주고 있니? 너는 아직 사람이 아니구나.

그래서 2,000년 뒤의 세상에 로봇만 남게 되어도. 사람은 모두 사라지고 로봇만 남게 되더라도 그 사랑과 연대를 잃지 않는다면. 아니 그것이 만물의 영장에 오르게 한 동력임이 이미 증명되었으니. 그걸 인간은 못하고 로봇이 한다면, 마법사는 기꺼이 그들의 마법사가 되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우리들의 여행에 동참할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
손 잡지 않는 자.
꿈꾸지 않는 자.
여행을 떠나지 않는 자.
그 모든 이들을 우리는
고아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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