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의 우물

[마법행전 제4서] 두루미의 보은 l 교토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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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는 욥의 우물에 서서 울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도달하지 않고서는 풀어지지 않을 일이었단 말인가.’

여정을 서원한 것은 미아였다. 그는 10년 전 자신의 책에 이렇게 적었다.

‘1차로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시애틀-밴쿠버-토론토-뉴욕 이런 순으로 여행을 할 생각입니다. 북미대륙을 횡단하는 셈인데, 2차로 런던-암스테르담(스칸디나비아 3국)-베를린-스페인-그리스-터키 정도까지 돌아볼 계획입니다. 내년 봄쯤 되겠네요.

6개월에서 1년 정도 순차적으로 이어질 본 여행은 일종의 순례 여행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절반쯤 산 청춘도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지구별 여행자가 이 별에서 더 살아 볼 가치가 있는지, 이 별은 내게 무엇을 전해주려는지, 이 별은 내게 무얼 원하는지, 가늠해 보기 위해, 훌쩍, 이 별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 보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나면 남은 삶이 알아지리라 기대합니다. 어디서 무얼 하고, 무얼 남길지.. 그때에는 지난 삶처럼, 타의에 의한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더욱 당당하고 뚜렷하게 ‘나’를 살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나’자신과의 깊은 대화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미아는 여행을 중단해 버렸다. 지극히도 현실적이고 당연한 이유로. 자금과 외로움. 그것이면 되었다. 여행을 중단할 핑계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는 서약을 잊지 않는다. 여정을 스스로 중단한 대가는 가혹했다.

‘3년여 만에 다시 열어본 이 글에서 2차 여행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고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습니다.

‘내년 봄’.. 그 ‘내년 봄’에 고독한 여행에 지친 저는 2차 여행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완연한 ‘내년 봄’의 말미에 ‘괴생명체’의 습격을 받고는 모든 것을 잃은 채로 근 1년여간을(아마도 2차 여행 기간이었을) 집 없이 떠돌았습니다.

5월에 런던, 우주의 표지는 떠나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력한 메시지를 주었건만, 지친 영혼을 추스르지 못한 저는 넋을 놓은 채 방심하다 맨몸으로 집 없이 떠돌았습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헤매다 다음 해 6월, 브렉시트가 결정되던 그 시점에 우연인지, 운명인지 런던을 다녀오고 난 뒤에야 마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근 1년여 만에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었으니 여행 비용 핑계를 댈 수는 없겠군요. 어차피 집 없이 떠돌 거였으면 여행이 낫지요. ‘5월에 런던’ 그건 분명 2차 여행에 대한 우주의 싸인이었을 텐데..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너무 가혹합니다. 직관을 무시한 대가가 정말 혹독했습니다.

혹독한 만큼, 2차 여행이 우주의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은, 가보지 못한 다른 평행우주에서 그 2차 여행은 어떤 결과를 나의 삶에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삶에 가져왔을까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게도 하지만 피해야 할 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고난 끝판왕 ‘욥’의 환란에 비유할 만큼 혹독했던 그 시간들을 돌아보며, 방심하고 잊고 있던 2차 여행에 관한 본문을 발견하고는 아찔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이런, 내뱉었으면 하고 볼 일입니다.’

미아는 우연히 옛글을 다시 발견하고는 충격해 휩싸여 글을 덧붙였다. 그리고 뒤늦게 여정을 이어 나갔다. 런던 다음은 암스테르담 그리고 돌아 돌아 터키까지. 그러나 이번에도 여행의 종착지인 터키에는 가지 못했다. 아니 터키에 발을 들여놓기는 했으나 세관의 검문에 걸려버렸다. 나아가려면 놓고 가야 한다는. 미아의 여행 가방에는 이탈리아에서 산 화장품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팔아 여행경비를 일부라도 보전해 보려는 마음에, 로마 인근의 수도원에서 면세 한도만큼 사 쟁인 화장품들이었다. 이번에도 발목을 잡은 건 자금이었다.

미아는 터키의 한 항구도시에서 망설이고 망설이다, 돌아서 여행을 멈추었다. 물론 화장품을 팔아 여행경비를 보태기는 했으나, 마치지 못한 터키 여정은 그대로 남아 썩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저 여정을 마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여정의 끝은 어디인지 알지도 못했지만. 그게 욥의 우물까지인 줄 알았으면 여정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미아는 후회가 가득한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돌아보았다. 경우의 수는 한 끗 차이 같아 보여도, 한번 빗나간 경로는 시간이 지날수록 간극을 벌려간다. 그리고 만회를 하려면 번지점프를 하는 수밖에 없다. 가야 했던 길로 말이다.

빗나간 경로는 미아에게 상처를 켜켜이 쌓았다. 상실과 붕괴가 이어졌고 보상으로 주어진 줄 알았던 혜택은 오히려 시험으로 돌아왔다.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나갈 때에 발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대마법사의 명은 미아를 혼돈케 했다. 대가를 치르고 받은 보상인 줄 알았으나 명은 그것을 모두 포기하게 했다. 그리고 유숙하려던 공간에서는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야 할 모반이 일어났다.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말은 이미 그 공간을 거쳐 간 여행자로부터 경고되었으나, 미아는 인내의 끝까지 그것을 미뤄두었다. 그러나 절벽 끝에 세워진 그 집에서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투신을 했으니, 미아는 거부할 수 없는 부르심을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미아는 뛰어내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추락하기 전에는 날개를 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리석은 여행자들이 말이다.

언리미티드, 여행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지구 여행자의 본분은 순례이지 정착이 아니니까. 집 없이 떠도는 방랑자가 아닌, 떠난 집을 찾아 나선 여행자에게는 아버지의 집 만이 집이 될 것이었다. 미아는 삶을 정리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다시 떠났다. 터키로. (여정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유숙하던 공간에서는 ‘괴생명체’가 나타났다는 전갈이 왔다.)

목적지를 알 수 없었으나 교토에서 나타난 두루미는 낮의 구름처럼, 밤의 별처럼 미아를 계속 이끌었다. 그리고 마침내 두 개의 믿음이 탄생한 도시 우르파에서, 욥의 우물을 발견한 것이다. 욥이 고통을 부르짖으며 태어난 날을 저주하다 마침내 나음을 입었다는 그 우물을.

‘프로그래밍은 무언가? 그것은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는 법칙. 창조 세계는 모두 인과응보의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류는 그것대로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원인 없이 이루어지는 결과와 발생한 원인에 마땅한 결과가 나오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오류 검증은 그것에 관한 것이다. ‘인과응보’.

그러나 문제는 그 범위이다. 하나의 삶과 한 사람의 생에서, 그것이 완결되지 않는다는. 우리의 삶은 연속되고, 사람과 사람, 창조 세계의 모든 피조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물결처럼. 그리하여 작용, 반작용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고, 그 범위는 지구를 넘어 우주 전체에 걸쳐져 있다. 별의 소멸로 탄생한 생명체들처럼. 그러므로 나의 고난은 나의 원인에 의한 결과만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우주 전체의 작용. 나비효과에 의하면 안드로메다 넘어 어느 별의 아메바가 한 어떤 선택이 나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인 것이다. 물론 너의 선택의 결과도.’

_ [이단적 순례기] 인간 따위가

욥이 처절한 고통을 견뎌내던 동굴에서, 두루미는 미아에게 가문에 얽힌 저주에 대해 들려주었다. 가문의 저주는 누울 자리에 관한 것이었다. 자신의 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약한 자아와 연약한 마음에 관한 것이었다. 대를 잇는 가문에 관한 것이었다. 연속되는 생에 관한 것이었다. 연약한 사람들은 생을 짧게 인식하고 존재를 자신에게만 국한 시킨다. 그러나 우주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니, 나는 나만이 아니고 선조이고 후손이며, 가문이고 나라이다. 선택된 과거의 결과이고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표본이다. 세계는 그러한 수많은 선택들의 총합이고 지금의 나는 먼저 된 이들의 선택이 낳은 결과이다. 그러므로 누구의 책임인가? 누구의 결과인가? 미아는 역사를 상실당한 것이다. 누가 자신을 낳았는지. 결과를 낳은 이들의 어떤 선택으로 인한 저주를 자신의 삶으로 홀로 감당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부모 잃은 미아처럼. 그러나 미아는 다시 미래의 부모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감당해 온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저주였고 욥이 저주하던 태어난 날, 미아의 태어난 날과 연관이 있으며 그 꼭짓점에 미아가 놓여있었다. 안드로메다 넘어 어느 별의 아메바가 한 선택도 영향을 주는데, 유전자를 물려준 가문의 저주는 더더욱 각인되어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미아는 묶였다. 묶인 채 태어났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을 묶인 채 나아가야 했다. 그러나 묶임은 미아를 멈추지 못했다. 미아는 여행자이기 때문이다. 미아는 순례자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미아는, 욥의 우물에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자연의 법칙은 위대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순환하고 그 방향을 거꾸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순환이 일어나고 나면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를 찾기 마련인 것이다. 미아에게 그 순환이 일어난 것이다. 지구를 걷고 또 걸었더니. 미아는 어떤 비술로, 어떤 강력한 마법으로써도 아닌, 오로지 자연의 순환으로 말미암아 저주의 시한이 다 되었음을 두루미로부터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욥처럼 시험을 감당해 낸 미아가 여전히 살아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_ 이사야서 61장 3절

욥의 우물에서, 천사가 나타나 씻고 나음을 얻으라던 그 우물에서, 미아는 서서 울고 있었다. 미아의 슬픔이, 상실과 붕괴의 절망이, 믿음의 조상을 구원했던 번갯불에 맞아 불타오르고, 이내 재가 되어 하늘로 흩어졌다. 욥의 우물에서는 새 우물물이 솟아 나와 미아의 몸과 마음을 적셨다. 흘러내린 미아의 눈물과 솟아 나온 새 우물물이 합쳐져 흘러내리자, 예언자의 도시는 물청소를 한 듯 촉촉이 젖어 들었다. 그리고 새 물을 쏟아내는 우물물 위로 가라앉아 있던 방패가 떠올랐다. 전사의 방패가. 미아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크게 소리쳤다.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방패입니다.
나는 유목민들의 시인입니다.
제국은 우리를 정착시키려 했지만
나는 저항했습니다.
나는 시를 짓고 노래를 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시와 나의 노래는
정착민들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방패를 획득했습니다.
나는 마법사입니다.

기사단의 검과
전사의 방패

나는 검과 방패로
정주민들 사이에서
유목민들을 건져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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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반환점, 그리고 반격점입니다.”

_ [이단적 순례기] 인간 따위가

미아를 얽어맨 가문의 저주는 이것으로 종료되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 선량한 순례자들에게 누울 자리가 주어졌다.

그리고 미아는 방패 위로 펄쩍 뛰어 올랐다. 그러자 동쪽 하늘에서 두루미 10여 마리가 행렬을 이루며 날아와 미아를 등에 태우고는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미아는 어디로 간 것인가? 미아의 여행은 계속될 것인가? 다시 중단될 것인가?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구는 회전하고 순례자는 걸음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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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의 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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