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정경 (作別 情景)

[마법행전 제5서] 리부트. 태양의 시대

 

 

 

 

 

“이제 가야겠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묻습니다. 이제 가야 할 때라고. 하지만 ‘가야겠어요’라고 말하지 않는 건, 마음이 일어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작별을 받아들였지만, 마음을 일으키기엔 그간의 시간과 기억들이 너무 무겁습니다. 그 무거운 마음이 ‘가야겠죠?’라고 묻습니다. 당신도 무겁냐고 묻습니다.

 

“그래요. 갈 시간이네요.”

 

다른 한 사람은 한 사람에게 갈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어요. 저 멀리서 반짝이며 작별을 실어 나를 기차가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이렇듯 시간은 마음과 상관없이 두 사람을 갈라놓습니다. 인연의 끈이 아무리 강력한들 작별의 시간은 단호하게 제때에 도착합니다. 그것 역시 인연이 정해 놓은 시간이지만 말이죠. 점점 커지며 다가오는 작별 기차의 불빛은 멀어져야 할 두 사람의 사이를 메꿔 줍니다. 작별은 별들의 인사니까요.

 

“즐거웠어요.”

 

한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즐거웠다고 말합니다. 즐겁기만 했을 리 없습니다. 즐겁기만 한 인연에는 망설임이 없습니다. 망설임은 못다한 마음이 내뿜는 한숨입니다. 못다한 마음은 작별하는 마음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므로 무겁기만 합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기차를 올라타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작별의 시간이니까요. 모든 별은 결국 빛을 다하고 마는 것이니까요.

 

“저도 즐거웠어요.”

 

다른 한 사람이 나도 즐거웠다고, 나의 시간도 당신의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다를 리가 없습니다. 한 사람과 한사람이 공유한 시간이 다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무겁고 아쉬움이 남는 마음은 같기만 했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작별이 찾아옵니다. 같은 시간 그러나 다른 마음. 그 차이가 작별을 준비합니다. 공유되는 시간의 크기와 길이가 크고 길수록 견뎌내야 할 다른 마음의 그것도 힘들고 무겁기만 합니다. 그리고 무거워진 마음은 두 사람 사이의 중력장을 내리누르고, 내려앉은 관계의 중력장 속으로 멈춰 서 있던 작별의 기차가 미끄러져 들어오는 것입니다. 무거운 마음 그대로라면 폭발하고 말 것 같으니까요.

 

“……”

 

침묵이 흐르고 플랫폼에 기차가 들어서며 ‘붕~’하고 경적을 울립니다. 어느덧 익숙해진 침묵입니다. 공백을 용서치 않고 채워대던 대화는 어느새 침묵으로 바뀌었습니다. 무거워진 마음이 입에 추를 달았기 때문입니다. 무거워진 마음을 덜어내지 못하고 참고 견뎌낸 탓에 천근만근이 목구멍을 메웠습니다. 그게 뭐라고, 왜 덜어내지 못하고 입을 닫게 되었을까요? 아니, 그럴 리 없습니다. 잔소리가 될 만큼 말하고 말했지만, 매번 튕겨져 나오는 말들을 주워 담을 수도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토해내지 못하고 쌓은 말들이 마음을 무겁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침묵이 정경이 된 것입니다. 두 사람 사이를 메꾼 침묵이 작별의 순간에도 익숙하게 흐르는 것입니다.

 

“스르륵”

 

기차의 문이 열렸습니다. 떠나기로 한 사람이 기차에 올라탑니다. 그리고 돌아섭니다. 마지막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시 내려서 와락 끌어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차에 올라탄 이는 마음이 가벼운 이입니다. 무거운 마음을 벗고 기차에 올라탔으니, 미련이 없는 것입니다. 무거운 마음 그대로는 작별 기차에 오를 수 없습니다. 무거운 마음으로는, 무거운 마음으로는. 그러니 돌아설 수 있는 겁니다. 떠나보내는 마음은 여전히 무거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기차에 올라타 가지 말라고, 덥석 손을 잡아끌 수 없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떠나겠다고, 떠나야 할 때라고 일어서 버린 마음은 무거웠던 내 마음마저 가져가 버렸습니다. 일어서 버린 마음이 모든 걸 가져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구멍이 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가벼워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인사를, 마지막 눈빛을, 마지막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가벼워진 마음으로. 한없이 가벼워져 허탈해진 마음으로.

 

“잘… 지내요.”
“네… 당신도요.”

 

웃으며, 가벼워진 마음으로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눕니다. 잘 지내기를, 이제 정말 그대 잘 지내기를. 나와 함께 무거웠던 시간을, 어렵던 시간을 지내왔으니, 이제는 정말 좋은 일만 있기를. 가벼워진 마음이 서로의 진심을 마주합니다. 무거워진 마음이 내었던 상처들을 모두 훌훌 털고, 새롭게, 새롭게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나도 그래야 할 테니까요.

 

“스르륵”

 

다시 기차 문이 닫힙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장막이 쳐졌습니다. 무거운 마음의 대가로 가림막 없는 마음을 만질 수 있었는데, 작별의 대가로 장막이 쳐졌습니다. 이제 유리창 너머로만 서로의 모습을 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지금뿐입니다. 기차가 떠나면, 이제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은, 다시 만날 기약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작별이니까요.

 

“열차 출발합니다.”

 

차장의 마지막 안내 방송이 나오고 기차가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무거웠던 마음이 기차가 내뿜는 연기와 함께 하늘로 날아오르자, 두 사람 사이를 잇고 있는 관계의 중력장이 다시 가벼워진 것입니다. 가벼워진 중력장의 탄력을 받아 작별 열차가 다음 인연들 사이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인연이 한 사람들을 맞이할까요? 작별 열차는 어떻게 만남의 열차로 변신하는 걸까요? 비워진 마음으로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가 조금씩 밀려들자, 마음이 서로에게 복을 빌고 싶어집니다. 분신 같았던 시간에게, 기억에게, 그대에게.

 

‘안녕히, 잘 있어요. 정말 미안했어요.’
‘안녕히, 잘 가요. 행복해야 해요.’

 

멀어지는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자, 진심이 터져 나옵니다. 진작에 할 수 있던 말, 언제나 할 수 있었던 말, 그러나 마음 깊이 가라앉아 있던 진짜 내 말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와 두 줄로 가로 놓인 레일 위를 수놓습니다. 별들이 부서져 내립니다. 그리고,

 

“털썩”

 

한 사람은 의자 위에, 다른 한 사람은 텅 빈 플랫폼 위에 털썩하고 주저앉습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까요. 다 타버린 마음이, 무겁게 짓누르던 마음이 모두 날아가 버렸으니까요.

 

우리의 만남은
이제 끝나지만
그대는 영원히
나의 가슴에 남아
이대로 헤어지지만
우리 사랑을
잊지 말기로 해

 

잊지 말기로 해요. 우리 잊지 말기로 해요. 미련 없는 마음으로, 무거웠지만 행복했던 마음을 시간을 기억을 잊지 말기로 해요. 우리의 만남은 이제 끝나지만 잊지 말기로 해요.끝이에요. 끝이 났어요.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으니까요. 나누었던 시간에게, 기억에게, 그대에게 끝을 고하지만, 이것은 이별이 아닌 작별이니, 작별의 기차가 돌고 돌아, 인연의 관계망들을 돌고 돌다 결국 우리에게 닿을 테니. 그때까지 잊지 말자고. 시간을, 기억을, 그대를 잊지 말자고. 마지막 당부를, 부탁을 해요. 멀어지는 기차를 붙들고, 가벼워진 마음이 흔들던 손을 내밀어 자꾸 작아져 가는 기차를, 마음을, 기억을 붙들고, 마지막 말을 해요.

 

우리 사랑을
우리 사랑을
잊지 말기로 해.

 

 

멀리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마법사는, 불시에 도착하는 마법의 열차를 기다리던 마법사는, 멀어져 가는 기차 불빛 뒤로, 주저앉은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의 수많은 기억과 도래할 미래와 사라져 버린 가능성들을 동시에 보고는 눈물을,

 

“주르륵”

 

흘립니다.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써 내려온 수많은 역사와 기록된 미래에, 두 사람이 견뎌내야 할 시간과 기억이 모두 가슴 아프고 아련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마법사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닮아 있으니, 누구도 예외가 아닌 지금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붙잡지도 헤어지지도 못하는 인연들 사이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시에 도착하는 작별 열차를 마주하는 모든 인연들이, 속으로 사랑했다고 말하며 잘 가라 손을 흔드는 동작 사이로 수많은 우주들이 창조되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세상은 슬픔으로 빚은 작별 이야기로구나’ 깨닫습니다.

 

영원히 불타는 태양이 없고, 영원히 빛나는 별이 없듯, 영원히 계속되는 만남이 없으므로, 우리는 다른 태양으로, 다른 별로, 다른 만남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라고. 그래서 매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거라고. 하지만 다시 태어날지언정 우리의 영혼은, 사랑은, 기억은, 변하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 언제나 별은 그 자리에서 빛나는 거라고. 먼동이 터 오는 플랫폼에서, 이제 주저앉은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도 모두 떠나버린 플랫폼에서, 마법사는 다시 새롭게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합니다. 할 말 못 할 말 모두 묻어두느라 무거워진 숲의 시대가 가고,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춰주는 태양의 시대에, 숨겨놓았던 마음들이 모두 드러나, 세상의 여기저기서 작별하는 인연들이 플랫폼을 가득 메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오늘의 태양을 맞이하며, 새롭게 이어질 기다렸던 인연을 생각하며.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플랫폼에 들어선 기차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립니다. 저 문 뒤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누가 반갑다며, 오래 기다렸다며 상기된 얼굴로 마법사에게 인사를 건넬지. 그 인연에게 건넬 말을 조용히 읊조려 봅니다. 한 사람과 다른 한사람이 아주 먼 훗날, 돌고 돌아 결국 이 플랫폼에서 서로 나눌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어요.
우리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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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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