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고편과 축복기도

+ 게스트하우스 ‘春子’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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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편

 

나나상 : 실은 제가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드라마의 예고편 말이에요. 정규방송은 마법사님이 ‘이번 생은 여기까지’ 하고 떠나시는 데까지 방영되었는데, 그다음 예고편을 제가 보았거든요. 그런데 이걸 말씀을 드려야 할지..

멀린 : 괜찮습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회사원 : 아니, 그런데 예고편이라면 미래에 관한 이야기일 텐데.. 이거 천기누설이 되지는 않을까요? 뭐 마법사님이시니까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그래도 엄청 궁금하긴 합니다.

멀린 : 어차피 아직 선택되지 않은 경우의 미래이니까요. 게다가 여기 선택할 당사자는 없으니 참고로 해도 좋을 듯합니다. 저도 나름 감을 가지고는 있습니다만..

나나상 : 그렇다면 구체적인 상황은 배제하고 말씀드려보지요.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마법사님이 알고 계시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요. 일단은 총수님은 두 분만이 아닌 것 같아요. 예고편에는 다른 총수님들이 더 계신 듯 보였어요. 그리고 한 총수님에게는 많은 땅이 준비되어 있어요. 예고편에서는 발로 밟는 땅에 [스팀시티]가 서게 될 거라는 자막이 지나가더군요. 아마도 열심히 지구를 걸으셔야 할 듯해요.

멀린 : 네 누군지 알겠네요.

나나상 : 그리고 다른 총수님에게는.. 이거야말로 천기누설일 듯한데, 엄청난 금이 기다리고 있어요. 음.. 좀 상상하기 힘든 수준으로 말이죠. 적어도 세 갈래의 길에서 엄청난 금과 기회를 담은 미래가 대기하고 있는데..

회사원 : 우왁! 이거 대박이네요.

나나상 : 그런데 마법사님이 잘 아시겠지만.. 기회는 대가를 필요로 하지 않겠어요. 그 총수님이 기회와 맞바꿀 대가를 준비하시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아요. 그게 뭔지는 안 나왔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하는 일, 자신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할 거 같고, 그 기회와 바꿀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쉬워 보이지 않는군요. 왜 그런 화면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어린 학생이 게임을 하면서 금이 가득 든 창고를 무심하게 지나가더군요. 앗, 구체적인 표현은 안 한다고 했는데..

멀린 : 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기회는 제가 열어드릴 수 있고 알려드릴 수 있지만, 기회와 바꿀 무엇은 본인이 준비해야 하지요. 그것이 열정이든, 절실함이든, 관계든, 재능이든 말이죠. 때로 어떤 이들은 기회를 만나면 도망치기도 하니까요.

회사원 : 아니 기회를 만났는데 왜 도망을 치지요? 잡아야죠!

멀린 : 그러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그리고는 운명을 원망하죠. 그냥 지나친 기회들은 애써 외면한 채.. 기회는 완성품이 아닌데 사람들은 대가를 지불하기를 주저해요. 기회가 왜 기회겠어요.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회인 거죠. 성공확률 100%라면 그건 기회가 아니라 성취죠. 이미 끝난 게임인 거예요. 그러나 기회는 실패와 성공의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어요. 실패에 마음의 추를 기울이면 도망치고 싶어진답니다.

나나상 : 마법사님, 그러나 총수님에게 온 기회는 [스팀시티]를 위한 기회예요. [스팀시티]의 우주에 진입하지 않았더라면 만나지 못할 기회이지요. 총수님이 그걸 아시고 대응하셔야 할 거예요.

멀린 : 네 그렇겠죠. 그렇기 때문에 총수님으로 추대되신 걸 거고요. 하지만, 그것이 [스팀시티] 때문에 주어진 기회라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다만 교환의 대가를 준비하지 못한 주자가 교체될 뿐이지요. 도망갔을 테니까요.

나나상 : 그렇군요.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회사원 : 오.. 이거 듣다 보니 좀 살벌한 느낌도 드네요.

멀린 : 하지만 그만큼 영광과 보상도 크지요. 우주는 저울질에 서툴지 않으니까요. 우주를 신뢰할 수 있어야 해요. 현상은 눈속임인 경우가 많지만, 물리법칙은 자신을 거스를 수 없답니다. 나나상, 더 해주실 얘기는 없나요?

나나상 : 아, 그리고..

나나상은 [스팀시티 영웅전]의 예고편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예고편이란 흥미를 끌기 위해 과장되거나 악마적인 편집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나나상의 말대로면 적어도 이대로 [스팀시티]가 가라앉은 채 끝나 버리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멀린은 선택되지 않은 미래의 디테일보다, 대기하고 있는 미래들의 전체적인 경향성이 그리 나쁜 것 같지 않아 안도가 되었습니다. 돌아가야 한다는 직관이 온 거로 봐서는 분명 어떠한 선택들이 이미 이루어져 있을 테지요. ‘Everything이 아니면 Nothing’이라던 [스팀시티]의 제안에 말이죠.

멀린 :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어쨌든 [스팀시티]가 종료되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네요. 말씀해 주신 예고편에 대해서 잘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나상 : 마법사님.. 몸 상하시면 안 됩니다. 이 일은 아마도 쉽게 무산되거나 사라질 일이 아닌 듯해요. 우리의 25세기의 공동체를 위해서라도 무리하지 마시고 순리를 따르셨으면 하네요.

주인장 : 아, 마법사님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보내드립시다.

나나상 : 아니요. 괜한 염려가 아니라 마법사님이 걱정돼서 그러죠. 저 목에 상처를 보니 수술을 하신 적도 있는 것 같은데 맞지요?

멀린 : 아.. 그게 저.. 암 때문에 갑상선을 제거했는데, 지금은 다 회복하고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디 가면 우스갯소리로 내 멋대로 살다가 목 따본 사람 있냐고 하고 다니긴 합니다만 하하하

나나상 : 마법사님! 그게 웃으실 일이에요. 에구 속상해라.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러고 몸도 안 돌보고 돌아다니시니 병이 나지. 제가 드라마 보면서 저러다 스트레스 때문에 큰일 치루시지 했다구요. 그런데 이미 치루셨네 치루셨어.

멀린 : 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순리를 따르면 무리할 일이 없는데 매번 마음이 앞서다 보니..

멀린은 나나상의 애정어린 핀잔에 가슴이 따뜻해져 왔습니다. 그의 몸에 온 무리를 알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알만한 이들은 당사자였을 테니까요. 젊은 마법사는 언제나 열정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미래를 보고, 이상을 본 이가, 그 미래로 사람들을 인도하려거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눈앞에 성취가 있고 눈앞에 바라던 꿈이 있는데 그 한 걸음, 그 한 발짝을 뗄 용기가 없어, 뒤로 돌아가고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이들을 가만 놔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달려가 들쳐업고서라도 결승선에 들어서야 했고,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라도 꿈을 붙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에게도 영광스럽지 않은 비참한 승리였습니다. 성취를 거머쥔들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힘으로 이룬 일이 아니니, 당사자도 만족스럽지 않고, 들쳐업고 결승선에 던져 넣은 마법사는 마법사대로, 보상도 없이 지쳐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세 번 네 번 반복하다 탈진해 버린 겁니다.

그 이후로 마법사는 철저하게 상대의 선택을 따랐습니다. 천만금을 주어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입니다. 믿음이 없고 용기가 없어 포기해도 그뿐입니다. 매번 아쉽고 안타까워도 대신 할 수 없는 것이 선택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여행을 떠난 모든 이의 주권입니다. 3차원 세계의 억압을 즐기는 모든 익스트림 라이프 생활자들의 권리입니다. 멀린은 그것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게다가 공짜가 없는 우주는 매번의 시행착오마다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멀린은 경험을 위해 가진 것들과 교환했고 마침내 우주는 몸까지 요구했습니다. 그것까지 내어주고서야, 목을 따고 장기를 꺼내주고 나서야 시행착오는 멈추었습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불에 대봐야 불 무서운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게도..

그리고 시작된 [스팀시티], 그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으려 멀린은 무던히도 경계하고 조심했습니다. 덕분에 많은 오해와 선입견들을 양산했지만, 마법사의 삶이란 게 그렇지 않겠습니까. 괜히 베일에 싸이며, 괜히 신비 속에 감추어지는 게 아닐 겁니다.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고서는 대가로 교환할 것들이 남아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순리를 따르는 일. 계시된 미래가 스스로 드러나질 때까지 기다리고 상호작용하는 일. 그것이 마법입니다. 보았다고 덥석 쥘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견물생심이라고, 보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미래를 보았으니 그 미래로 가고 싶은 마음을 어찌 다스릴까요? 마법사의 성숙, 마법사의 지혜는 그것입니다. 순리로 드러나질 때까지 인위를 다스리는 것.

 

축복기도

 

멀린 :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네 조심해야죠.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일 테니까요.

주인장 : 마법사님. 이 늙은이가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사람들을 보지 마시고 계시된 미래를 신뢰하십시오.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루어지지 않을 일은 무슨 짓을 해도 이루어지지 않더군요. 마음 쓰는 일에 지치시면 안 됩니다. 마음이 전부이니까요. 너무 쏟아붓지 마셔요. 드라마는 끝나도 삶은 계속되니까요.

멀린 : 네 명심하겠습니다. 두 분의 존재가 제게 큰 위로가 되네요. 이런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그렇겠습니다만, 언제나 동료가 그립고 끌어주는 선배가 아쉽습니다. 벌판에 혼자 버려진 듯 하고 매번 링 위에 단독으로 오르는 듯 외롭습니다. 그래서 더 커뮤니티에 대한 로망이 생겨났는지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요즘같이 전통질서가 붕괴하는 사회에서는 어른의 존재를 찾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저는 완전한 개인의 시대가 올 거라고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수록 인간과 인간 사이의 연대의 끈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한 개인은 성숙한 연대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려면 사회에 종속된 개인을 자유롭게 풀어내어 주는 역할을 할 어른들이 필요한데, 요즘은 좀처럼 그러한 어른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시절이 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주인장 : 우리 나이 든 사람들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채 사회가 너무 빨리 발전해 버린 탓이겠지요. 어쨌든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고, 고속성장의 시절을 누리며 풍요로웠던 만큼, 성숙에는 게을렀던 탓일 겁니다. 그런데 그 피해는 오히려 젊은 세대들이 짊어지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멀린 : 외람된 말씀이지만, 축복기도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주인장 : 네? 제가요??

멀린 : 예. 시공간을 초월한 ‘春子’의 주인장으로서, 또한 이렇게 젊은 마법사를 따뜻하게 대접해 주신 어르신으로서, 다시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법사를 축복해 주십시오. 제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주인장 : 어허, 이것 참..

주인장은 멀린의 간곡한 요청에 망설여졌습니다. 축복기도라니.. 목회자도 종교인도 아닌데, 마법사에게 축복기도를 한다는 것이 꽤나 당황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시공간을 초월한 게스트하우스 ‘春子’가 아니겠습니까. 이 젊은 마법사와의 인연이 매 시공간에서 어떠했을지 모르니, 주인장은 그의 왕이었을 수도, 그의 스승이었을 수도, 그의 영웅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쨌거나 거친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는 젊은 마법사가 원하고 요청하는 일이니,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무례한 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인장 : 음.. 그렇다면. 주제넘은 일인지 모르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막상 마법사님의 제안을 받고 보니 어쩌면 이렇게 다가온 우주의 제안들을 거짓 겸손과 주제넘은 망설임으로 외면하고 회피해 온 것이 우리 세대의 과오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임의 자리를 회피하지 않고, 또 그 자리에서 공정하고 정의롭게 자신의 책무를 다하는 일을 애써 외면함으로, 미성숙한 욕심이 자신을 펼치게 방관했고, 손익을 따지느라 망설인 선택들이 성급한 결핍에게 양보 되어, 세상을 어지럽게 하도록 방치했던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듭니다. 그렇다면 제가 마법사님을 축복함으로써 세대와 세대 간의 연대의 끈이 다시 이어지고 회복과 교류가 다시 시작되는 작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여기는 모든 시공간이 중첩되어 있는 시공간의 게스트하우스 ‘春子’이니까요. 여기로부터 시작되고 여기서부터 퍼져나갈 테지요.

주인장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준비되지 않은 말들을 이어갔습니다. 멀린과 회사원 그리고 나나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인장의 말에 공감했고 ‘春子’의 로비에는 비상한 기운들이 들어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장의 낯빛에 강력한 카리스마가 감돌기 시작하더니 눈빛이 강력해지며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습니다. 주인장의 높아지는 목소리를 따라 ‘春子’의 로비 천장도 함께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인장 : 우리는 우주의 진화에 저항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우리는 발전하는 시대상과 조응하지 않고 변화하는 사회상에 뒷덜미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새로 태어나는 힘은 스스로 강력해져야 합니다. 아비를 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왕자처럼 뒷덜미를 쥔 우리를 처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새로 태어나는 이들을 몰살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어디선가 살아남아 우리의 정면으로 진격해 옵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정신으로 무장하여 아버지의 세대, 어머니의 세상을 박살 내고, 새로 태어나는 젊은 영혼들의 우주를 온 세상에 펼쳐 보입니다. 우리를 처형하는 새로운 힘은 바로 우리 자신의 어린 영혼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떨쳐내지 못했던 억압과 공포를 우리의 자녀들을 통해 극복하고 해체하려 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오래됨은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새로움으로 극복되고 재탄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젊은 마법사에게 명하는 것은 여기 낡은 어른의 아이로 자신을 숨겨 드는 모든 비겁함을 그들의 공포안에 가두고, 오랜 억압과 모든 협박에도 자신을 숨겨둘 수 없는 미쳐버린 정신들에게 빗장을 열어, 세상이 두려워하는 전복과 혁명을 완수토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한 치의 두려움도 없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록된 미래의 기억을 따라 용맹정진하는 전사들의 뒤에 설 것입니다. 검도 방패도 없이 전장에 나서는 전사들이 있지 않듯이, 지혜와 용기로 무장하지 않은 젊음은 마법사의 보호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여기 마법사의 직관의 언어로 표현되는 전사들의 미래기억이, 그들에게 낯설고 이해되지 않는 언어가 아닌, 기다리고 고대하던 꿈의 언어로 번역되어 들릴 터이니, 들을 귀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때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시고, 용기 있는 자들로 하여금 망설이거나 머뭇거림으로써 자신의 때를 허비하지 않는 용맹함을 내리소서. 나는 세상의 모든 시공간이 대기하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春子’의 대제사장으로서, 이 젊은 마법사를 다시 세상에 내어 보내며 이미 기록된 언어로 선포하는 바입니다.

이 순간, 그는 ‘春子’의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시공간이 대기하고 있는 ‘春子’의 주인장으로서, 역사의 모든 순간에 대기하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알리는 위대한 선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만큼 한없이 높아진 로비의 천정에서는 엄청난 빛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고, 로비는 거대한 평원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장이 입고 있던 겉옷이 벗겨지더니 거대한 두루마기로 펼쳐져 내렸습니다. ‘春子’의 대제사장은 세상에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신비롭고 웅장한 목소리로 그것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자비로운 주여, 우리는 사랑과 혁명의 길을 순례하기 위해 여기 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의 존재가 악함이 될 수도 있나이다. 당신의 무한한 자비 속에서, 우리의 앎을 우리 자신에 반하여 사용치 않도록 저희를 도우소서.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는 이들을 굽어보소서. 자신들은 선하나 삶이 불공평하게 대우한다고 여기고 부당한 일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은 결코 ‘선한 싸움’을 이끌어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에게 잔인하며, 자신의 행위에서 악한 것만을 발견하며, 세상의 부당함에 책임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도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그분은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놓고 계신다’는 당신의 말씀을 알지 못합니다.

남에게 명령하는 자와, 사방이 닫혀 있고 갈 곳 없는 일요일을 맞바꿔 오랜 시간 일만 하며 자신을 희생하는 이들도 굽어 살피소서. 또한 당신의 과업을 신성하게 하며, 당신의 끝 간 데 없는 열정 너머로 가려다가 큰 빚을 지고,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마는 이들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그들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당신의 말씀을 알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세상을 정복했으나 자신 안의 ‘선한 싸움’을 이끌어본 적이 없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또한 ‘선한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세상을 이기지 못했기에 삶의 갈림길에 머무르는 이들도 생각하소서. 그들은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는 당신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펜과 붓과 악기와 도구를 들기를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은 이미 누군가가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놀라운 예술의 세계로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나이다. 그러나 하찮은 것들 안에 영감을 쏟아넣기 위해, 펜과 붓과 악기와 도구를 손에 들고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더 낫다고 믿는 이들을 더욱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들은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라는 당신의 말씀을 모르는 이들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 자신들이 거쳐온 수많은 왕국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 이미 수없이 경험한 죽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언젠가 세상이 끝나는 날이 오리라 생각하고 스스로를 불행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자비를 베푸소서. 그러나 수없이 죽음을 경험했음에도 자신이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믿는 사람들을 더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신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당신의 말씀을 모릅니다.

스스로를 끊어지기 쉬운 사랑의 끈으로 옭아매 누군가에게 예속되는 사람, 자신이 다른 이들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 시기심을 느끼고 사랑에 중독되어 스스로를 망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들판에 부는 바람이나 다른 모든 것들처럼 사랑 또한 변한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기를 두려워하며, 자신도 알지 못하는 더 높은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을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더 큰 자비를 베푸소서. 그들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당신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우주를 한마디로 설명하려고 하거나, 신은 신비한 물약 정도로, 인간은 충족되어야 하는 원초적 욕망만을 지닌 존재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을 측은히 여기소서. 그들은 천체의 음악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맹신하는 자들, 실험실에서 수은을 금으로 변화시키려 하거나 타로카드의 비밀이나 피라미드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책들에 둘러싸여 지내는 이들을 더욱더 불쌍히 여기소서. 그들은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당신의 말씀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보지 못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리무진을 타고 거리를 지나갈 때 멀리 보이는 어렴풋한 풍경 정도로만 여기는 사람, 에어컨이 돌아가는 펜트하우스 사무실에 자신을 가둬놓고 고독한 권력으로 조용히 고통받는 이들을 불쌍히 굽어보소서. 하지만, 언제나 손을 벌린 채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오직 사랑으로만 악을 이기려고 하는 사람들도 측은히 여기소서. 그들은 ‘검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가지고 가거라’는 당신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는 당신이 약속한 검을 찾아 감히 손에 쥐고자 하는 자들이며, 신앙심 깊은 지상의 죄인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조차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입니다. 우리는 종종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벌거벗은 자들이며 사실은 누군가를 구하면서도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사의 한 손과 악마의 한 손으로 동시에 검을 쥐고 있는 우리를 잊지 마시고 당신의 자비로 감싸주소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며, 세상에 머무를 것이며, 우리에겐 당신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너희를 보낼 때 돈주머니나 식량자루나 신발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했는데 부족한 것이라도 있었느냐?’는 당신의 말씀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1)

[Teaser]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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