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도 바꿀 수 있어
+ 게스트하우스 ‘春子’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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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페 디엠
회사원 : 궁금한 게 있는데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이거 분위기가 영 제가 끼어들 게 아니어서 참고 있었는데 궁금해 죽겠습니다.
주인장 : 아이고 그럼요, 무슨 질문이든 하십시오. 너무 저희 이야기에만 집중하고 있었군요.
참다못한 회사원이 질문 좀 해도 되겠냐고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이미 주인장과 나나상, 멀린 간에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스팀시티]에 관한 이야기들, 총수를 선출하게 된 계기들, 미니스트릿과 그 이후의 일들까지.. 나나상과 주인장은 드라마를 보며 궁금했던 많은 것들을 멀린에게 물었고, 멀린은 이에 성의껏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또한 멀린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했던 부분들에 관한 두 사람의 생각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멀린은 언젠가 그간의 일을 꼭 기록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스팀시티 영웅전]에 관한 기록을 말입니다. 소설이든, 드라마든.. (지금 그대가 읽고 있는 이것 말입니다)
회사원 : 그러니까 두 분의 인연이 25세기에 다시 연결된다는 말씀이잖습니까? 지금은 21세기구요. 그러면 그 25세기의 공동체는 지금의 일을 교훈 삼아 해체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요? 기록으로 남기고 전달하면 25세기의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주인장 : 그럴 수도 있겠네요. 반대로 생각하면 25세기의 우주에서, 21세기의 현재에 메시지를 보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25세기의 우주에서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말이지요. 뭐 터미네이터에서 처럼 말이죠. 너무 영화 같은 이야기인가?
멀린 : 모두 가능한 이야기입니다만, 중첩된 시공간의 개념으로 보자면 두 공동체의 역사는 모두 현재라는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와 나나상은 각각 하나이지만, 21세기의 시공간에도 존재하고 25세기의 시공간에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동시에 말입니다. 음.. 좀 쉬운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배우가 21세기 현대 배경의 드라마와 25세기 미래 배경의 드라마를 동시에 찍고 있다고 해 봅시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동시에 방영되는 거예요. 그런데 작가는 한 명이고 이 작가는 두 드라마를 비슷한 스토리로 전개해 놓았어요. 그러면 두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비슷한 스토리가 21세기의 드라마와 25세기의 드라마에 동시에 벌어지는 거죠. 뭐 그렇다고 혼돈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드라마이니까요.
회사원 : 아.. 그렇다면 두 분이 한 공동체에 계셨던 25세기의 일은 현재 그러니까 21세기의 일과 연동된다는 말씀이기도 하겠군요?
멀린 : 네 맞습니다. 그런 식으로 과거-현재-미래가 각각의 시공간으로 동기화되어 있다는 것이 마법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나의 선택이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도 바꿀 수 있는 것이지요.
나나상 : 네? 마법사님, 과거도 바꿀 수 있다는 얘기는 무슨 얘기죠?
멀린 : 아.. 그러니까, 모든 시공간이 연동된 채 각각의 존재로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데, 현재의 나의 인식과 선택이 그 각각의 시공간에 영향을 주게 되니까, 미래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회사원 : 오호~ 과거에도 영향을 준다?
멀린 : 네 그러니까, 과거란 어차피 기억이고, 기억은 의식에 의해 편집되거나 취사 선택되어지는 것이니, 현재의 인식상태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재정렬 시키거나 심지어 새로 창조하기도 하지요.
주인장 : 아, 맞아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지요. 우리 나나상도 자주 과거를 편집하고는 한답니다. 리모컨을 냉장고에 넣어두고서는 자신은 그런 기억이 전혀 없다고 한다거나, 가스레인지 불을 잠그고 나한테 확인까지 했으면서, 불을 안 잠그고 온 것 같다며 집으로 도로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나나상 : 네? 아니 제가 언제 그랬다고 그러셔요. 저는 그런 일 없거든요!
주인장 : 이것 보세요. 지금도 기억을 왜곡하고 있잖습니까. 하하하
멀린 : 좀 더 과격한 예를 들자면, 실은 우리의 기억이라는 게 아침에 잠에서 깰 때에 새로 주입되거나 다시 생성된다고도 볼 수 있죠. 마치 꿈에서 깨면 분명히 기억나던 꿈도 안개처럼 희미해져서, 몇 시간 뒤에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또 밤에 꿈을 꾸면 우리는 마치 언제나 장수였던 것처럼, 언제나 공주였던 것처럼, 그 꿈속 자신의 기억을 그대로 생성해 냅니다. 그 꿈속 인물이 자신임을 의심치 않죠. 그리고 그 꿈속 인물은 이미 그 생과 그 캐릭터의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죠.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현재, 역시 어젯밤, 그리고 오늘 밤 꿈속 나의 입장에서는, 또 다른 꿈속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새로 생성된 기억을 마치 실제 경험처럼 인식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구요.
회사원 : 하지만, 이건 생생한 현실이잖아요. 꿈은 꿈일 뿐이고?
멀린 : 죽음에 이르고 나면 결국 모든 생은 꿈이 됩니다. 無로 돌아가거나, 의식이 영원히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세와 환생, 윤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우리의 생은 하나의 꿈에 불과합니다. 죽음 이후에는 다른 존재로 살아가게 될 테니까요. 그건 뭐 믿음의 문제이긴 합니다만..
주인장 : 믿음도 결국 현실에서의 인식을 기반으로 할 수밖에 없지요.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믿음의 방향과 내용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春子’를 만나고 난 뒤로, ‘春子’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진짜 현실은 무엇인가? 자꾸 생각해 보게 된답니다. 결국은 생생하게 깨어 있는 이 순간만이 유일한 나의 현실이 아닌가 결론에 이르게 되더군요.
회사원 : ‘카르페 디엠’ 순간을 잡아라! 이 말이 그런 뜻이겠군요.
주인장 : 네. 나이가 들수록 더 실감한답니다. 시간이란 게 어찌나 빠른지 말이죠. 순간을 잡기는커녕 지나가는 걸 바라보고 있기에도 현기증이 난답니다.
회사원 : 그런데, 그러면 마법사님과 나나상 두 분은 25세기에 다시 만나게 되는 게 아닌가요?
멀린 : 만나겠지요. 이미 만나고 있구요. 그러나 서로의 선택이 달라지면 영원히 만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우주는 넓고 삶의 진화라는 것이 1도만 틀어져도 그 간격이 한없이 벌어지니 말이죠. 하지만, 사람의 지향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어서, 이렇게 자꾸 만나는 인연들은 매번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함께 있는 우리 모두 그렇지 않을까요?
회사원 : 맞습니다. 기차에서 만난 것도 우연이라고만 볼 수는 없죠. 아, 이런 인연들이 연결되어 있었는데, 여기까지 제가 마법사님을 모시게 된 것도 우리의 인연 때문 아니겠습니까?
주인장 : 네 물론입니다. 우리 모두 다 ‘春子’로 맺어진 귀한 인연들입니다.
‘春子’로 맺어진 귀한 인연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팀시티]의 등장을 기뻐하고 기대하던 <위즈덤 러너>들과 [스팀시티]를 선택한 총수님들, 그리고 [스팀시티]를 기다리는 미래의 시민들. 멀린은 인연을 생각하니 이생에서 이제 시작한 인연들과 충분히 상호작용하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수많은 생에서 함께 했을 인연들이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커다란 감정을 공유하며 한때를 같이 할 순 없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스팀시티]가 일으킬 혁명적 미래를 생각하면 더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귀환
멀린 : 아무래도 저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나나상 : 아니 어제 오셨는데 벌써 가신다구요?
나나상은 생의 인연을 겨우 만났는데 벌써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움과 서운함이 강렬하게 밀려왔습니다.
주인장 : 좀 더 쉬시다 가시지요. 이제 겨우 하룻밤을 보내셨는데 벌써 가신다면 저도 그렇고 저희 아내가 많이 서운할 겁니다.
멀린 : 죄송합니다만, 오늘 대화를 나누면서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직관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게다가 25세기의 일을 생각하자면 저는 더 나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에는 분명히 반전이 있을 테니까요. 제가 비록 직관을 따라 ‘이번 생은 여기까지’라고 하고 떠나왔지만, 총수님들은 현명한 분들이시니 분명히 ‘Everything’하고 계실 겁니다. 떠나온 뒤로는 [스팀시티]에 접속할 수 없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요. 오늘 나나상과의 만남을 통해 25세기의 미래가 [스팀시티]의 총수님들에게 달려 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강제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두 분이 선택하기만 한다면, 25세기의 공동체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겁니다. 그러느라고 제가 ‘春子’와 나나상을 만나게 된 것일 겁니다. 물론 두 분도 그렇구요. 그러니 저는 어서 돌아가서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겠습니다. 여기서 더 지체해서는 안 될 것 같군요.
주인장 : 그러시다면 더 붙잡을 수가 없군요. 여쭤보고 싶은 것도 많고 더 많은 얘기들을 듣고 싶지만, 다음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두 세기의 공동체들을 생각하면.. 저희가 양보를 해야겠죠. 그렇죠? 여보, 괜찮겠어요?
나나상 : 네.. 제가 뭘 결정할 수 있겠어요. 다만, 그러시다면 마법사님께 꼭 부탁드리고 싶어요. 이 일이, 이 두 공동체의 역사가 여기서 끝나지 않도록.. 꼭 좀 총수님들을 잘 설득해 주셔요.
멀린 : 네. 물론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노력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뭘 더 설득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두 총수님이 이미 현명한 선택을 하셨을 겁니다. 그러니까 다음 우주가 열린 것이고 제가 나나상을 다시 만나게 된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 염려 마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나나상 : 아.. 그래도 이렇게는 너무 아쉽습니다..
나나상은 못내 아쉬운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멀린도 막중한 책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이번 생은 여기까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을 때는 차라리 홀가분하기도 하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마법사들과의 마스터 회의와 ‘春子’와의 만남, 그리고 나나상과의 재회의 과정을 돌이켜보며 인연과 만남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던 것입니다. 결과와 업적은 시간이 지나면 바래질 뿐입니다. 성취감은 사람에게 기쁨을 주고 그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은 사람을 만족케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록으로 남을 뿐, 그 감정은 사그러들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의 인연은 언제나 새롭고 또한 좀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세기를 초월하고 생을 초월하여 계속되는 인연은 내가 원한다고 다시 만나지지도, 원하지 않는다고 끊어지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업(業)을 쌓는다는 것, 공덕을 쌓는다는 것, 면류관을 얻는다는 것은 모두,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겁니다. 의존도 착취도 아닌, 이용도 기만도 아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관계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일은, 나의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름답게 장식하는 매우 소중한 업(業)입니다. 그것만이 인간의 생에 반복되고 그것만이 영원한 가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만날 테니까요. 우리는 또 만났으니까요.
멀린은 나나상과의 인연을 생각하며, 남겨 놓고 온 인연들에 대해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완결된 것이 아닌 제안으로 멈춰진 인연입니다. 선택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으니 일시 중단된 인연인 것입니다. 직관이 명하여 제시한 제안에 두 총수님들이 어떠한 선택을 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아직 끝난 것도 영원히 중단된 것도 아닌 제안의 시간들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멀린은 그것을 매듭지어야 한다는 직관을 강하게 얻었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든지, 종료되든지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의 여부는 직관이 말해 줄 것입니다. 그것에 따라 21세기의 [스팀시티]뿐만 아니라, 25세기의 공동체 역시 다음의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멀린은 이제 그것을 확인하여야 합니다. 선택되었다면 이어나가야 할 것이고, 선택되지 않았다면 마법사를 기다리는 또 다른 인연들과 같은 도전을 이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우주의 진화는 뒤로 돌아가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결심을 굳힌 멀린에게 나나상이 주저하며 말을 꺼내었습니다.
나나상 : 실은 제가 말씀드리지 못한 것이 있는데요. 그러니까.. 드라마의 예고편 말이에요. 정규방송은 마법사님이 ‘이번 생은 여기까지’라고 하시고 떠나시는 데까지 방영되었는데, 그다음 예고편을 제가 보았거든요. 그런데 이걸 말씀을 드려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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