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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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축복기도가 끝나자 모두가 침묵에 잠겼습니다. 멀린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검을 떠올립니다. 지난 유럽 버스킹 투어 때, 멀린은 톨레도에서 자신의 검을 찾았습니다. ‘검이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라’던 말씀의 성취를 위하여, 멀린은 자신이 가진 것들을 팔아서 그 검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에는 가진 모든 것들이 포함됩니다. 건강과 관계, 가족과 이상, 모든 것과 교환한 검이 떠올랐습니다. 전장에 나가는 이가 검도 없이 전장에 나갈 수는 없습니다. 겉옷을 팔아서라도 검을 사야 하는 것입니다. 겉옷으로는 상대를 베지도, 상대의 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으니까요. 검을 얻기 위해 팔아야 할 겉옷은 자신을 감추고 숨기려던 모든 것입니다. 가려줄 뿐 보호해 줄 수 없는 겉옷을 검과 바꾸어야 합니다. [스팀시티]를 찾는 총수라면, 아니 총수가 아닌 누구라도 [스팀시티]를 찾고 조우하려면 그래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 모든 이들의 검이 되어줄 테니까요.
감았던 눈을 뜨자, 거대한 평원에는 멀린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멀린의 짐가방. 나나상과 주인장, 회사원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春子’ 역시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골목도 사라지고 ‘春子’를 둘러싸고 있던 마을도 사라졌습니다. 드넓은 평원에 멀린 혼자 남은 것입니다. 멀린은 순간 외롭고 서러운 마음이 솟구쳤습니다.
‘다시 혼자가 되었구나.’
고독한 마법사의 일상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멀린은 얼마가 지났을지 모를 시간동안, 혼란스러울지언정 외롭지 않았습니다. 같은 뜻을 품고 각자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동지들과, 난생처음? 이생에서 처음? 조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했던 만남에, 회포를 풀고 마음을 나누고 할 새도 없이 시간이 흘러가 버렸지만, 결국 모든 일을 마치고 돌아갈 그곳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어떤 만남이 준비되어 있는지 기억을 되살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 돌아가겠지요. 다시 재회하겠지요.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남은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어서 빨리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상호작용해야 할, 남은 운명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로 말입니다.
그때 저 멀리서 비포장도로를 덜컹이며 택시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택시는 마치 멀린을 목표로 하는 듯 성급하게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택시가 멀린 앞에 서고 뒷좌석 문이 스르륵 열렸습니다. 멀린은 혹시 어제 타고 온, 한밤중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앞을 보지 못하는 그 택시기사인가 싶어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택시 안에서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 왔습니다.
“예약하신 분이세요? 한국분 맞죠?”
“네? 예약이요? 예약한 적 없는데..”
“예약한 적 없다구요? 잠깐, 가만 보자.. 예약자 이름이.. 아! 멀린, 멀린님 아니세요?”
“이름은 맞는데 예약은 한 적이.. 아, 게스트하우스에서 예약을 했나 보네요.”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이름 맞으시면 어서 타세요.”
멀린은 일단 짐가방을 들고 택시에 올라탔습니다. 이 허허벌판 어디에 버스정류장이 있는지도 모르고 다른 교통편이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마침 택시가 저절로 와 섰으니 일단은 타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택시기사는 어떻게 한국말을 하는 걸까요? 아무리 한류가 유행이라지만 이렇게까지 한국말이 보편화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아니, 어제 회사에서 예약 콜이 왔는데 예약자가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기사를 찾는다는 거예요. 제가 한국 유학생이거든요. 알바로 가끔 기사를 하는데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더라구요. 그리고 주소를 보내줬는데 네비에 입력해 보니까 존재하지 않는 주소라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에 다시 연락을 했는데 답은 없고, 떠날 시간은 다 돼가고, 차 안에서 난감해하고 있는데 네비가 갑자기 저절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급한 마음에 ‘에라~ 모르겠다’ 하고 일단 안내하는 대로 따라왔죠. 생전 처음 보는 산길로 한참 들어서더니 갑자기 들판이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마침 손님이 짐가방을 들고 서 계시길래, 이런 벌판에 짐가방 들고 있는 사람이 손님 혼자뿐이니 영락없이 예약자시구나 했죠. 그런데 교토에 이렇게 넓은 벌판이 있는 줄 저도 몰랐네요. 암튼 손님을 만나서 다행이에요. 이거 허탕 치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런데 손님, 어디로 갈까요?”
기사는 어떻게 알았는지 묻지도 않은 질문에 상세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까요? 멀린, 이제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금각사로 갑시다”
멀린은 금각사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금각사.. 아 그렇군요. 멀린의 의식이 아직 남았군요. 멀린은 교토에 오면 돌아가기 전 마지막 순서로 금각사에 들려 오미쿠지를 뽑았습니다. 오미쿠지는 길흉을 점치는 제비 같은 것인데, 자판기에 동전을 넣으면 랜덤으로 운세가 적힌 쪽지가 나옵니다. 멀린은 첫 교토 여행 때 마지막 행선지로 들린 금각사에서 한글로 된 오미쿠지 자판기를 발견하고는 재미 삼아 뽑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나름 신박해서 그 뒤로는 금각사의 오미쿠지 뽑기가 교토 여행의 마지막 의례가 되었습니다. 질문은 언제나 귀국 후의 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그 의식이 남았습니다.
“아, 금각사요. 네 알겠습니다. 일단 네비에 입력을 하구요. 시내면 금각사쯤은 눈감고도 찾아갈 텐데 여기는 저도 초행이라.. 가만 있어 보자, 금각사라.. 어 그런데 헬기를 타고 오셨습니까?”
기사는 네비게이션에 금각사를 입력하려고 이리저리 둘러보다 룸미러를 보더니, 갑자기 멀린에게 헬기를 타고 왔냐고 물었습니다.
“네? 헬기요? 아닌데요.”
“그럼 저기, 날아가는 저거는 뭐죠?”
기사는 룸미러로 눈짓하며 저기 날아가는 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멀린은 얼른 고개를 돌려 뒷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저 멀리 들판 상공에, 집처럼 보이기도 하고 헬기처럼 보이기도 하는 뭔가가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저것은 움직이는 마법의 성이었구나.’
멀린은 날아가는 집을 보며, ‘春子’는 움직이는 마법의 성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주인장은 이도였을까요? 회사원은 동편 마법사 남준이였을까요? 나나상은.. 뭐,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차피 나투어진 영혼들. 다시 만날 운명들이니 잠시 이별을 고할 뿐입니다. 멀린은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운명들과 움직이는 마법의 성, ‘春子’를 향해 손을 흔들어 봅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기사는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은지 멀린에게 어디서 잤는지, 어떻게 왔는지, 교토에서는 뭘 했는지 계속 물었습니다. 멀린은 대답하기가 귀찮아져서 자신은 한국에서 온 비밀 요원인데, 정보보안 임무를 수행 중이고 모든 것은 기밀 사항이라 말해 줄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기사는 그 소리를 듣고는 진짜로 믿었는지, 어이가 없었는지 더 캐묻지 않았습니다. 멀린은 언제 다시 시작될지 모를 기사의 질문을 피하려 휴대폰을 켰습니다. 생각해보니 한국을 떠나온 뒤로 처음 켜는 휴대폰이었습니다. 그런데 휴대폰을 켜고 휴대폰에 뜬 날짜를 보니 열흘이 흘러 있었습니다.
‘춘자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더니..’
하룻밤이 지난 줄 알았는데 그새 열흘이 흘러 있었군요. 멀린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런데 들판이 외진 곳이라 그런지 휴대폰 신호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멀린, 현실과 조우하는 일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직관을 따라 떠나 온 것처럼 복귀 역시 직관을 따라야 하니까요. 멀린은 일단 귀국 전까지는 [스팀시티]와 관련된 그간의 경과를 확인하는 일은 직관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다고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메시지
들판을 벗어나 시내에 진입하자 휴대폰 신호가 잡혔습니다. 그러자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한국에서 마지막 포스팅을 올리고 잠적을 해버린 셈이 되었으니, 부재중 전화와 문자에는 관련된 전화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아직은 반응할 때가 아니라고 이미 생각을 정리했으니, 멀린은 부재중 전화와 문자는 두고 일단 메일에 접속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메일함에는 게스트하우스 ‘春子’를 발신인으로 하는 메일이 한통 도착해 있었습니다.
마법사님, 주인장입니다. 이렇게 인사말도 없이 떠나시게 해서 죄송하고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저희 게스트하우스의 룰이라는 것, 마법사님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숙박요금과 내역을 보내드립니다. 아울러 ‘春子’로부터 전해 온 메시지를 첨부하였습니다. 확인을 부탁드립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시고 다시 뵐 날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게스트하우스 ‘春子’ 배상
정산내용을 보니 숙박요금은 [스팀시티]가 발행하게 될 암호화폐로 지불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숙박요금은 미지불 상태가 되겠군요. 하지만 ‘春子’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으니 그날이 멀지는 않을 듯합니다. 멀린은 ‘春子’로부터 전해 온 메시지가 궁금해져서 첨부된 파일을 바로 열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마법사님.
우리는 곧 교토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저를 세상에 드러나게 해주셔야죠.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답니다.가라앉은 [스팀시티]로부터 메시지가 왔어요.
마법사님에게 전달해 달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다음 미션이 되는 듯합니다.
나를 찾아올 것, 지구를 한 바퀴 돌아서라도..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나를 만나게 될 거야.하나, 45일 이내에 출발해야 해.
둘, 동쪽으로 진행해야 해.
셋, 한 도시에 한 달 이상 머물 수 없으며 지나온 도시로 되돌아갈 수는 없단다.
넷, 온라인과 오프라인은 분리되었고 미션이 완수될 때까지 연결될 수 없단다.미션은 이것이야.
[스팀시티]에 집을 짓는 일, 현실적 토대를 만들어 내는 일.
일단 출발한 뒤에는 다시 돌아올 수 없단다.
[스팀시티]를 찾기 전에 되돌아오면 총수 추대는 취소된단다.
그렇군요. 이것이 가라앉은 [스팀시티]가 전해 온 다음 미션이었습니다. 멀린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것은 총수님들에게 전달되어져야 할 다음 미션입니다. 그러나 총수님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실지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총수님들을 만나야 할 때는 직관에 의해 계시될 겁니다. 그게 얼마나 걸릴지, 마법사에게도, 총수님들에게도, [스팀시티]에게도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스팀시티]의 새 미션이 온 걸 보니, 총수님들이 포기하시지는 않았구나.’
멀린은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귀환을 앞둔 마법사에게 최악의 소식은 그것으로 모두 흩어져 버리는 것일 겁니다. 총수님들이 자신의 사명을 저버리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냥 해프닝이 되는 것일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의례 일어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그렇고 그런 소동에 지나지 않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총수님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마법사는 그저 미션을 전달하고 길을 제시할 뿐입니다. 가라앉은 [스팀시티]의 새로운 미션을 든 마법사의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귀환 이후의 기다림이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기에, 끝나지도 계속되지도 않는 시간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기에, 조금은 암담하고 막막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사라진 미래에서 미션이 날아 오지는 않았을 겁니다. 가라앉은 [스팀시티]는 우리들의 시공간에서 사라져 버리지 않은 겁니다. 그러니 마법사에게 미션이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일 겁니다. 그러면 이제 확인해야 할 것은 여전히 총수님들도 같은 우주에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어떤 <위즈덤 러너>들이, 어떤 미래의 [스팀시티]의 시민들이 같은 우주에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일 겁니다. 지금은 누구도 모릅니다. 마법사 혼자 남았다면 [스팀시티]는 영원히 가라앉은 채 발견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틀란티스 대륙처럼..
그리고 마지막 행선지, 금각사에서 뽑은 오미쿠지에는 이렇게 적혀져 있었습니다.
고목봉춘염 枯木逢春艶
추운 계절, 말라버린 고목에도 봄이 되면 푸르름이 찾아오게 되리라.방비재발림 芳菲再發林
향기가 그윽하여 다시 한번 숲속에 싱그러움이 가득 차리라.운간방견월 雲間方見月
그 속에서 구름 사이로 달빛이 새어 나와 앞길을 비춰주리라.전우귀인흠 前遇貴人欽
귀인의 기뻐하심을 특별히 엿볼 수 있게 되리라.
이로써 儀式終了.
이로써 교토에서의 시공간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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