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벅스 사내의 행동편향

 

 

 

 

 

사내는 말이 없다. 사내는 여행 중이다. 여행 중의 사내는 말을 하지 않는다.

‘여행 중에 필요한 말은 Do you have.. How much.. I want.. Excuse me.. Yes or No 뿐이야.’

신기하게도 사내는 다섯 문장만으로 긴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사적 교류를 하지 않는다면 사내에게 필요한 대면의 순간은 무언가를 주문하는 순간뿐이다. 필요한 사항들은 대부분 인터넷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구글 트랜슬레이터가 알아먹을 만하게 번역해 주니, 이제는 사랑에도 통역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긴자의 한 스타벅스에서 사내는 ‘홋또 고히 (Hot coffee)’를 주문하고 있다. 사내가 필요로 하는 단어 중 ‘홋또 고히’는 예외로 벗어나 있는 특별한 문장이다. 대부분은 그저 메뉴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힛또쯔(ひとつ)‘하면 될 뿐이지만, 유난히 커피라는 단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인들에 대한 배려로 그는 ‘홋또 고히’를 머리에 입력시켰다. 매우 불필요한 일이었지만 말 없는 사내에게도 그 정도의 배려심은 있는 것이다.

스타벅스 일본인 스탭의 예의 그 과잉된 친절함과 함께, 주문한 ‘홋또 고히’를 받아 든 사내는 매장을 휘 둘러 본다. 앉을 자리가 있는지. 그가 좋아하는 창가 좌석은 이미 만석이다. 다른 실내 좌석은 영 앉을 만한 곳이 없다. 다행히 이 스타벅스에는 야외좌석이 꽤나 잘 펼쳐져 있다.

‘그래 좀 쓸쓸하지만, 야외로 나가 볼까?’

사내는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자동문을 지나 야외 좌석으로 향한다. 편안하게 펼쳐진 라탄 쇼파 좌석에 앉을까? 아니면 사내가 유독 고집하는 팔걸이 의자에 앉을까? 잠깐 고민하던 사내는 일단 스타벅스의 매장에서 보기 힘든 라탄 쇼파에 잠시 앉아 본다. 특색이 있어 좋아 보였지만 이내 오래 앉아 있지 못하고 다시 팔걸이 좌석으로 자리를 옮기고 만다.

‘그래도 팔걸이 의자가 편하지.’

사내의 팔걸이 의자에 대한 집착은 꽤나 오래되었다. 사내는 심지어 팔걸이가 없는 의자는 의자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팔의 무게에서 시작된 피로함일 것이다. 사내는 잠을 잘 때에도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잔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온종일 팔을 들고 서 있어야 했던 구약성서의 모세처럼 사내는 팔을 내리기를 주저한다. 그의 팔은 늘 들려 있다. 그의 팔에 많은 이들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사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어쩌면 팔의 무게를 덜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그의 팔에 매어 달린 수많은 이들의 운명이 그를 너무 지치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팔걸이 의자는 그에게 소중한 안식처이다.

‘나는 팔걸이 의자에 하루 종일도 앉아 있을 수 있어.’

라탄 쇼파가 비록 매우 편안해 보였지만, 결국 사내는 팔걸이 의자를 고집하고 말았다. 뭐 어쩌겠는가? 사소한 집착은 천재성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천재들은 사소한 집착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다리를 심하게 떨거나, 유독 재래식 변기만을 고집하거나, 연필이 아니면 글을 쓸 수 없다든가 하는.. 고치면 고칠 수도 있는 사소한 집착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을 교정하려 들지만, 그러면 더 완벽해 질 거라 지적질을 하지만, 그들의 천재성은 그러한 사소한 집착을 동력으로 삼고 있다. 반복되는 어떤 행위, 집착적인 강박은 천재성의 원천과도 같은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하지 않는 그 행위, 멈출 수 없는 그 행위는 외계와의 교신이며 내적 수문을 여는 주문 같은 것이다. 그것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천재성은 말라버리고 만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천재성을 모두 말살해 왔다. ‘앞으로 나란히!’하며 말이다.

사내는 천재성을 잃지 않으려 팔걸이 의자로 애써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번잡했던 잠깐의 순간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꼽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 하나가 없어진 것을 느낀 것이다.

‘어! 이거 어디 갔지?’

그렇다. 사내는 여행 내내 걷는 시간 동안, 늘 음악을 듣거나 팟캐스트를 듣곤 했다. 그것은 사내의 일종의 사회활동이다. 비록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타지를 헤매고 있지만, 그의 사고의 한쪽은 늘 자신이 머물던 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그것은 사내만의 중요한 정체성 유지 방식이다. 고국의 소식, 속한 사회의 다단한 말들과 접속되어 있는 것 말이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사내는 그저 방랑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사내는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속한 세계의 내면으로 들어가고 있어. 여행은 타지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고 내가 속한 사회를 되돌아보기 위해 떠나는 거야.’

떠나면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일상에서는 포착할 수 없는 이면이다. 그것은 떠나와야 보인다. 그것은 타지의 숨결과 부딪힐 때 자신을 드러낸다. 한 호흡으로 흘러가는 속에서는 감지할 수 없고 드러낼 수 없다. 그것은 새로운 세계, 다른 호흡으로 돌아가는 타지에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사내는 그래서 오히려 자신의 세계를 살기 위해 여행을 한다. 그래서 그것은 사내의 일상이다. 그 일상은 타지에서 더 자신의 색을 드러내고 분명해진다. 그 매커니즘을 알게 된 후로 사내는 주기적으로 여행과 일상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이거 잃어버릴 것 같더라니..’

한쪽 귀에만 매달려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 다른 한 짝이 없으면 말짱 무용지물이다. 사내는 연결선도 없이 각각의 귀에 매달려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꼈다 뺐다 할 때마다 언젠가는 잃어버리게 될 거라 생각하곤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내는 불안정한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자신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실체가 아니라 귀로 들리는 가상의 세계이다. 주파수를 통해 연결되어 있는 사내와 사내의 세계는 누군가의 조작이 가능한 세계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상의 영역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현하고, 사내의 상상력은 발현의 설계자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객관적인 실체라고 보기 어렵다. 사내의 주관적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누구나 그러한 주관적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평범이라 말하고 정상이라 말하며 객관적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모든 정보는 그렇게 조작이 가능한 주파수를 통해 흘러 다닌다. 거기에는 수많은 소음들이 뒤섞여 있고 그 소음들은 전혀 다른 실체를 창조한다. 그것은 소문이라 불리기도 하고 가십이라 불리기도 한다. 요즘은 뇌피셜이라는 변명적 정의로 불리기도 한다.

어쨌든 사내와 사내의 세계를 연결해 주던 블루투스 이어폰 한 짝이 사라진 건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그것은 이제 사내가 이곳 긴자의 거리에서 방랑자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공포를 심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행 중에는 여행지에 집중하는 것이 바른 여행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사내는 여행을 하는 중이 아니다. 그는 타지에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므로 사내와 사내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이어폰 한 짝을 잃어버린 것은 운전기사에게 타이어 한 짝이 펑크 난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내는 찾.아.야. 한.다.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잃어버린 이어폰 한 짝을 찾고 있다. 먼저 앉았던 라탄 쇼파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 뭐라 말로 설명하긴 어려우니 일단 무작정 쇼파 근처를 두리번거려 본다. 눈치 빠른 나이 든 중국 여인이 엉덩이를 들고 라탄 쇼파의 방석을 함께 들쳐준다. 없다. 있을 리가 없다. 이런 데서 빠뜨린 것 같지는 않다. 친절하게 협조해 준 중국 여인에게 옅은 미소로 감사를 표하며 사내는 다시 매장 안으로 향한다.

‘어디서 잃어버렸지? 분명 떨어뜨린 기억은 없는데..’

기억은 어디까지나 현재적이다. 기억은 과거에 관한 것이지만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지금, 현재이다. 그러므로 이 기억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어젯밤 꿈으로부터 온 것인지, 언젠가 경험했을 데쟈뷰인지, 아니면 급할 때 떠올리기 마련인 분실기억인지.. 하지만 무엇이든 떠올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씩 확인하고 지워가야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정신줄을 놓고 제자리에서 서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그러나 떠올리는 일은 현재 공간으로부터 분리되는 일이기도 하다. 머릿속은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공간들을 빠르게 훑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라고 불리는 시간과 연결된 분실기억 속 공간의 이미지는 새롭게 창조해 낸 것일지도 모름에도, 우리는 단지 떠올려지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지나간 경험이라고 단정 짓게 된다. 분실기억 속의 시공간은 대부분 분실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 금방 알아내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분실기억은 어디까지나 당황한 나의 마음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들만을 양산해 낸다. 그래서 대부분 그곳에는 그것이 없다.

“쓰미마셍, Do you have seen..”

매장에 다시 들어선 사내는 과잉스럽게 친절한 스타벅스의 스탭에게 묻고 있다. 내 이어폰을 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여행 중에 다섯 문장밖에 사용하지 않는 사내의 입에서 나온 문장은 원하던 문장이 아니다. 아마도 ‘Have you seen..’ 이라고 묻고 싶었던 것 같은데 사내의 입에 담겨져 있는 다섯 문장 ‘Do you have..’ 와 이상하게 엉켜 버렸다. 그러나 위급상황에 문법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차피 커피를 ‘고히’라고 밖에 발음하지 못하는 일본인 스탭에게, 더 상식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은 한 짝만 남은 블루투스 이어폰을 눈앞에 들이대 주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스탭은 ‘손님, 이어폰 잃어버리셨군요!’ 하고 단번에 알아듣고는 함께 매장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런, 그냥 분실물 접수된 게 있느냐고 묻고 싶었는데, 민폐를 끼치게 되었군.’

사내는 당황했다. 스탭에게는 접수된 분실물이 있는지 묻고 싶었을 뿐, 분실물 수색은 조용히 혼자 해도 되는 일인데, (아마도 분실된 이어폰이 접수된 것이 없으니) 적극적으로 분실물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과잉 친절의 스탭의 행동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막아설 수도 없는 일. 사내는 잠시 과잉 수색을 하고 있는 스탭을 슬쩍 뒤쫓다가 그를 다시 붙들고는, 아마도 여기는 없는 것 같다고 눈짓으로 말을 하고 수색을 멈추게 했다. 스탭은 어떻게 그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예의 매뉴얼 상의 웃음을 짓고는 자기 위치로 돌아갔다. 괴상한 일이다. 사내는 스탭의 마음을 읽어 준 것이다. 그것은 부탁을 받은 스탭으로서 해야 할 매뉴얼 행동을 한 것이지, 정말 사내의 이어폰 분실을 염려해서 나온 행동이 아니다. 그러나 사내도 그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으니 스탭의 과잉 행동은 곧 접수된 분실물이 없다는 말로 이해하면 되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음성언어로는 아무것도 소통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매뉴얼적 행동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헤어졌다.

자리로 돌아온 사내는 이내 차분해졌다. 분실물이 발생했을 경우에 할 수 있는 모든 행동을 다 해보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진짜 객관적 현실과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당황한 마음을 달랜 뒤에야 찾아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일종의 ‘행동편향’ 같은 것이다.

* 행동편향이라는 용어가 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엇이라도 행동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를 안정시켜 준다는 말이다. 축구의 패널티 킥에서 골키퍼가 오른쪽, 왼쪽, 가운데 각각 킥의 확률이 1/3씩임에도 불구하고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일단 몸을 날리고 보는 것은, 가운데를 막는다고 가만히 서 있다가 골을 먹게 되면 더 많은 비난과 책임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객관적 실체와는 상관없이 마음이 편한 대로, 심리가 받아들이기 쉬운 대로 비합리적인 선택과 행동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다.

사내는 어쩌면 일단 차분히 앉아서 자신의 몸과 가방들을 모두 수색해 보았어야 했다. 아니다 했다. 사내는 먼저 급하게 자신의 소지품을 모두 뒤졌다. 그러나 분실된 이어폰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음은 누가 그것을 줍기 전에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은 사람을 급하게 한다. 분실된 한 짝의 이어폰 그것이 얼마나 효용이 있을지 없을지는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어쩌면 한 짝뿐인 이어폰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그 공간에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 이것은 얼마나 어이없는 확률인가? 그럼에도 사내는 그 확률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지체의 시간이 길어지면 쏟아지는 자책감을 감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들 일단 움직이고 보는 것이다. 다행히 사내의 판단에 그만한 이어폰을 가져갔을 만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긴자의 낮 시간, 스타벅스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부유해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고객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긴자의 중년 아주머니라고 블루투스 이어폰을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사내의 ‘행동편향’으로 비롯된 심리는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믿고 싶은 대로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그 행위는 결국 자신의 마음과 연결된 행위이니 그것은 언제나 옳은 것이다. 적어도 사내에게는 그렇다.

지체되면 자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색 행동을 모두 완수해 낸 사내는 편안해진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와 앉는다. 그리고는 다시 천천히 소지품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한다. 가방과 호주머니 그리고 숨어있을 만한 여러 포켓들을 모두 열어본다. 아니다. 먼저 하나만 남은 이어폰을 충전기 본체에 끼워 넣는다. 자 이제 이어폰처럼 생긴 것이 나오면 그것은 분실된 그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쟈켓 상의의 다른 주머니에서 떡 하니 튀어나왔다.

‘이런, 여기 있었군.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럴 줄 알았다니 무슨 소리인가? 사내는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이라고 의심쩍은 부호를 달아야 하긴 했지만 급한 마음에 소지품 수색을 대충 하고 매장으로 뛰어 들어갈 즈음, 사실 사내는 어쩌면 이것은 나의 소지품 어딘가에서 고개를 들고 있을 거란 직관을 얻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그리 숨을 곳이 없는 매장 공간의 특성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그것은 시공간이 하나로 묶인 4차원의 세계 속에서 사내를 희롱하고 있었다. 사내는 직관으로 그것을 느꼈지만, 수색을 멈추지 않았다. 여기는 3차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에서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것도 편향적 마음 말이다. 3차원의 시공간은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있기에 시간과 공간 사이에 사람들의 인식과 시선, 자존심과 자존감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것들이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매뉴얼을 만들었다. 그 매뉴얼을 따르지 않으면 사람들은 모두 함께 시공간 속으로 얽혀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모두들 그것을 강력하게 준수하라고 서로를 세뇌시킨다. 그것은 어쩌면 예의인지도 모른다. 매너인지도 모른다. 제대로 자신의 소지품을 찾아보지도 않은 채 남이 앉아 있는 쇼파를 들추는 일, 그리고 그것에 암묵적으로 협조하는 일, 말도 안 되는 문장을 내뱉는 사내의 표정을 읽고 과잉된 행동으로 수색을 함께 전개하는 일, 그리고 그만하면 됐다고 옅은 미소를 지어 주는 일.. 객관적 실체는 그 모든 3차원 적 행동편향이 한바탕 일어난 뒤에야 찾아왔다. 그것은 그냥 사내의 쟈켓 호주머니에 가만히 들어 있었을 뿐이다. 4차원의 시공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한곳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내는 안도와 회한이 담긴 한숨을 지으며 아직 입도 대지 못한 커피와 마시멜로우가 든 비스킷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매장 안으로 향한다. 찾았으니 된 것이다. 3차원의 세계는 다시 평화를 찾은 것이다.

‘그래 밖은 아직 쓸쓸하지.’

따뜻한 실내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긴자의 중년 아주머니들의 수다 속에도 수많은 3차원 적 행동편향에 대한 숨은 논평들이 빗발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내에게도 그것은 삶이고 일상이다. 다시 찾은 이어폰을 귀에 꽂으며 다시 사내가 속한 3차원 사회의 일상 속으로 회귀하는 일은 방랑자가 아닌 일상을 사는 3차원 여행자의 바른 자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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