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손을 놓은 건 너희들이야

[MOVIE 100] Apr 28. 2022 l M.멀린

 

 

청년이 브랜드가 되어버렸다. 청년식당, 청년다방, 청년주택, 청년피자. 청년, 청년..  청년이 세대 구분이 아닌 브랜드가 되어버린 데에는 슬픈 사연이 있다. 그러니까 어차피 이제 사회초년생인 이들을 받아줄 회사도 조직도 공동체도 더는 없이 각자도생해야 하는 이들을 좀 보살펴 달라는.. 먹고는 살게 한번 팔아달라는..

패기와 참신함을 말하는 진짜 청년은 브랜드를 ‘청년’에 가두고 싶지 않았으리라. 원대한 꿈을 반짝이는 한 때에 국한시키고 싶지 않았을 테니. 그런 이들이 예전에는 제일을 말하고 현대를 말하며 세계경영을 외쳤지. 그러나 우리의 청년들은 지금 먹고살기 바쁘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냐고, 어른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그 보상으로 ‘청년’ 주홍글씨를 찍은 이곳들에 적선이라도 매상 좀 올려주라고 라벨링을 붙여버린 거라면, 자존심은 다 먹고사니즘과 바꿔 먹어버렸나. 그 라벨링 쪽팔리지도 않을까.

맞다. 과도한 일반화니 마법사의 말은 괘념치 않아도 된다. 그러나 뭘 모르기에 뭐든 할 수 있는 인생의 짧은 용기백배의 시절을, 너무 많이 알아버려 눈치만 백단이 되어버린 생존 기계 모드로 소진해버리긴 아깝지 않은가. 무 베기 싫어 칼을 칼집에서 뽑아버릴 생각도 없다면 그 칼 녹 다 슨 뒤에 강원랜드 전당포에서 바꿔 먹을 셈인가.

여기 20년 전의 청년들은, 우리들은 그렇지 않았다고, 팽팽하게 맞섰던 우리들을 보라고 얼굴을 빤빤하게 들이밀고 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아니 기껏해야 고등학생 주제에 부조리와 정면으로 맞서고 패배감에 쩔어 도망치지 않고, 누구도 찍소리하지 못하게끔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는 진짜 ‘청년’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참 오랜만에 보았다.

 

 

이 시대를 그린 청춘물, 학원물들은 좀비 아니면 지옥 같은 현실을 외면한 판타지물 천지인데. 참으로 현실적인, 심지어 누구누구의 실제 이야기 같아 보이는 진짜들을 드라마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용기가 가상하지 않은가. 누가 볼까? 저런 판타지 중에 판타지를. 빌런 없이 착하고 성실하기만 한 이들이 자신의 삶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성장해 가는 이야기 말이다. 그게 재미있을까? 현실감이 있을까? 그런 생각에 비추어보면 이 드라마의 인기는 참 거시기 하다. 어쩌면 제대로 ‘라떼’를 세숫대야 채 들이붓는 이야기에 왜들 환호하는 걸까? 그건 아직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불씨가 남아 있다는 신호로 해석해도 되는 걸까?

사랑과 우정,

그게 전부인 시절이다. (그게 전부가 아닌 시절이 있나?)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버텨내는 힘은 사랑과 우정이 전부다. 부모도, 선생도, 사회도 무엇하나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뿐더러 도움도 되지 않는다. 스물다섯, 스물하나는 중력을 뚫고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봄의 정기 그 자체이며, 그것으로 세상을 모두 나의 그늘, 우리의 나와바리로 덮어 버리겠다 포효하는 용맹의 시작이다. 그런 에너지를 가끔 스포츠의 현장에서 본다. 그건 희한하게 계속된다. 스포츠 스타들은 다른 ‘청년’들이 고작 수능성적과 스펙 따위를 가지고 ‘이생망’을 외치는 한복판에서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니들 말은 틀렸다고, 너는 고작 ‘청년’이냐고 반문한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그들은, 이미 등짝에 “이러다 ‘청년’ 하면 됨”이라고 써 붙이고는 도망쳐 방구석에다 히키코모리 진지를 구축하는 동년배들에게, 너랑 내가 다른 것이 뭐냐고 묻는 것이다. “다르다. 나는 다르다. 너랑 나는 유전자가 다르다.”고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모니터 속으로 도망치는 동년배들과 사랑과 우정을 나눌 수는 없다. 그들은 자꾸자꾸 연기처럼 사라져 가니까. 줄어드는 에너지 게이지와 함께 저주에 갇혀 녹아내리는 존재가 되어가니까. 누가 이들에게서 사랑과 우정을 앗아갔나? 누가 이들을 친구들에게서 떼어 놓았나?

손을 놓은 건 너희들이다.

손을 놓지 않았던, 친구가 부당한 폭력을 당하고 있는데 비겁한 손을 슬쩍 놓고 도망치지 않았던, 드라마 속 주인공들과 너희가 다른 삶을 살게 된 원인이다. 그걸 자꾸 사회의 부조리 탓으로, 어른들의 탓으로, 슬쩍 방향을 비틀어 놓는 너희들 탓이다.

 

 

사랑과 우정 없이 그 시절을 버텨낼 수 있다고? 경쟁과 질투만으로, 열등감과 패배 의식만으로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다고? 그래서 사회가 이 모양이 되지 않았니. 너희들이 욕하던 어른들, 경쟁과 질투로 세상을 버텨내던 어른들이 부정과 불공정, 탈법과 불법을 일삼지 않았니. 잡은 손을 놓았던 그때의 비겁한 청년들이 술래가 되어 모두의 손을 끊어 놓는 바람에 우리가 이런 시대를 살게 되지 않았니. 그러니 다시 돌아가려면, 다시 되돌리려면 우리는 사랑과 우정을 되찾는 수밖에, 놓은 손을 다시 잡는 수밖에, 놓친 손을 다시 찾는 수밖에. 그게 21세기에도 가능하다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브랜드가 아닌 삶으로서의 ‘청년’을 언제까지나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내게 말해주렴. 마법사에게 보여주렴.

그게 보고 싶었고, 그건 지금도 누가 하고 있고. 비록 드라마 속에서지만 볼 수 있어서 흐뭇했다고 뿌듯했다고. 마법사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마법사가 되었으니까. 너에게 손을 내밀고 있으니까.

혼자서는 가지 못할 길이야. 혼자서는 하지 못 할 일이야. 라이벌이든 동료든, 친구든 경쟁자든, 네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고 내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지. 그걸 경험도 해보지 못했다면, 안됐구나 그거야말로 ‘이생망’이네. 그게 뭔지 모르겠다면, 딱하구나 다음 생엔 21세기는 스킵하렴.

 

 

스물다섯, 스물하나

축 늘어져 기대지 않고 나도 너처럼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너가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거라고, 나도 너처럼 잘 해내고 싶다고 기대하게 만드는 친구를 찾는 거야. 그런 친구가 되는 거야. 그것뿐이야.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할 일. 평생 해가야 할 일은 그것뿐이야.

이 외로운 청년 늑대들아!
900살 먹은 마법사도 아직 그러고 있는데
니들은 뭐 잘났다고 각자도생하고 지랄이니.

그게 되겠니?

손을 놓은 건 너희들이야.
손을 놓친 건 우리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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