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멀린’s 100] Feb 20. 2022 l M.멀린
독창적인 질문과 아름다운 문장을 찾고자 “엉엉 우는” 저자와 그 슬픔에 예민하게 주파수를 맞추는 내비게이터로서의 독자가 남아있는 한, 책세상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계속될 것이다.
_ DT 시대의 독자란 누구인가, 육영수, <기획회의> 554호
이것은 예언일까? 선언일까? 과연 그러할까? 독창적인 질문과 아름다운 문장을 찾고자 “엉엉 우는” 저자가 아직도 남아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슬픔에 예민하게 주파수를 맞추는 내비게이터로서의 독자는 분명 남아 있다.
그는 나다.
어디서 어떤 곳에서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글을 만나면 나의 마음은 분수처럼 터져 나온다. 메모장을 가져다 대고 그 문장들을 기록한다. 이내 잊고 언젠가 마치 처음 읽은 것처럼 다시 되새기게 되더라도 그건 어디로 가지 않고 나의 손에 그대로 기억되어 있음을 안다.
그런 희열과 기쁨을, 주어지는 데이터에서는 찾을 수가 없다. 유튜브와 넷플릭스가 우리의 정신세계를 모두 지배해 버린 듯 하지만, 수많은 웹툰의 표지들이 머리에 촘촘히 박혀버린 듯하지만, 정작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보고 읽는 것은 썸네일이 가득한 메인창 뿐이다. 이실직고하자 우리는 감상하기보다 고르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 잠들 거면서.
그 마음은, 슬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비게이터로서의 독자의 사라지지 않는 본능 같은 것이다. 어떤 작품이, 어떤 콘텐츠가 나의 정서에 반응할 것인가? 그것은 빼곡히 꽂힌 도서관 서가 사이에서도 나를 불렀다. 나는 무엇에 이끌리는지 알지 못한 채 그것들 앞에 섰고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건 바로 나의 이야기였다.
그런 선택직관성을 모두 제거해 버린 지극히 마케팅적 기준으로 정렬된 온라인 플랫폼의 메인페이지는 우리의 감성과 정서 따위는 모두 엿 바꿔 먹어버렸다. 이놈의 인공지능은 우리의 취향을 철저하게 파악하여 먹기 좋은 그것을 내놓는다고 뻥을 치고선, 자극적인 캡사이신이 잔뜩 발린 자기 알고리즘을 우리에게 강요한다. 왜 그놈의 알고리즘 추천은 볼 게 없는가? 물론 자극을 따라가다 보면 연신 혀를 호호거리며 시간을 킬링해 댈 수 있지만, 그것은 참으로 허망하고 기분이 더럽다. 도대체 난 뭘하고 있는 걸까? 이놈의 바보상장에 중독되어.
작아진 바보상자는 손에서 떠날 줄 모르는 제2의 신체가 되어버린 지 오래니. 우리는 무엇으로 이것에서 탈출할까. 그거 아니? 알고리즘이 지겨워지면 차라리 책을 보자는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는 걸. 그런데 책은 어디로 갔지?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젓다 다시 찾는 건 그놈의 작은 바보상자다.
바보상자에 노예가 되어버린 듯하지만 메마른 가슴은 언제나 그것을 향해 있다. 게다가 노예가 넘볼 수 없는 그 세계는 점점 장벽을 높이 올리고, 온갖 불평불만이 가득한 얼굴책은 친구 끊기 하다 포기해 버리고, 플렉스 할 수 없다면 하트 누르는 것도 역겨운 참으로 별난 사진첩으로는 관음증만 해소할 뿐이다. 어디라고 목 늘어난 티셔츠 차림으로 찍은 흔들린 셀카를 업로드할까. 알아서 모여든 가난한 마음들이 요즘 그래서 녹색창에 글을 심고 있단다. Z세대의 네이버 블로그 사용률이 급증했다고. 거기서 일기를 쓴다고.
그래 그렇게 시작했지.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며 우리는 문장을 하나하나 골랐지. 그러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고 에세이를 써보는 거야. 그러다 꿈이 생겨났지. 문학소년소녀의 꿈. 새소년소녀의 꿈. 그렇게 읽기와 쓰기의 유행도 레트로를 타는가.
아이와 들른 문구 코너에서 요즘 아이들은 연예인 포토 카드에 스티커 장식해서 가지고 다니는 게 유행이라고. 그래? 아빠 때는 책받침이었는데. 책받침? 그게 뭔데? 아.. 책받침. 소피 마르소 사진이 박힌, 포니테일 머리를 한 소녀가 그려진 그 책받침. 그때로 다시 돌아가고 있는 건가? 그들의 방식으로.
그 방식은 아날로그만은 아닌 듯 하다. 다이어리 꾸미기도 요즘은 앱으로 한다니까. 그게 편하고 그건 또 새로운 문화고. 하지만 언제나 결핍은 그 시절로부터다. 언젠가 최진실의 몇 주기 다큐에서 그의 어머니가 그녀의 서랍장을 열어 보여 주었다.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엽서와 카드, 스티커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이게 이 아이의 결핍이었나보다고 이걸 그렇게 사 모았다고. 다 큰 어른이. 대한민국의 톱스타가.
아아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우리의 슬픔은 여전히 문장으로 그림으로 기록되고, 그것은 0과 1의 디지털 세상으로 모두 떠나버린 줄 알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물성을 그리워하고 만지고 싶어 한다. 너를 만지고 싶어 손에 쥐는 그것에는 “엉엉 울던” 저자들의 눈물 자욱들이 검은 글씨로 박혀 있고 우리는 이제 어디에서나 그것에 접속할 수 있다.
여기 이 공간에서 우리는 디지털 공간의 글쓰기를 경험하고 시도하고 훈련하고 있다. 그것은 발견되는 것이니까. 왜 읽히지 않을까 아쉬워할 것도 낙심할 것도 없다. 그건 언제나 숨겨져 있었고 원하는 이들, 찾는 이들에게 발견되어져 왔으니까. 다만 그 시기와 때는 알 수가 없으니 우리는 그저 받아적을 뿐.
역사가는 엉터리 예언가이지만, 책을 벽돌 삼아 쌓는 기억의 공동체는 디지털 공간에서도 어김없이 (재)건축될 것이다. 늙고 젊은 당대인들이 공유하는 기억-지식 공화국의 진정한 주인공은 돈과 권력으로 ‘만들어지는’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재)발명하려고 애쓰는 독자다.
_ DT 시대의 독자란 누구인가, 육영수, <기획회의> 554호
여기 바로 이곳에서 창작자들의 도시를 꿈꾸는 [스팀시티], 그들을 인도할 춘자가 그 기억의 공동체를 건설하고 있다. 엉터리 예언가들은 책은 죽었다며 누가 더 책을 읽겠냐며 저주를 공언했지만, 아빠의 책받침이 아이 손의 포토 카드로 이어지듯 우리의 손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있고 그 마음이 전달되는 방식은 여전히 ‘손에서 손으로’ 인 것이다. 그 본능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다만,
‘독창적인 질문과 아름다운 문장을 찾고자 “엉엉 우는” 저자’. 그 저자가 여기에 있는가? ‘슬픔에 예민하게 주파수를 맞추는 내비게이터로서의 독자’ 그 독자가 여기 이곳에 있는가? 우리는 누구를 찾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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