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천재들의 세기
+ 다빈치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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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의 천재들
멀린 : 16세기에 다녀오셨다고 하니, 저는 항상 16세기가 궁금했어요. 위대한 인류의 세기 아닙니까? 16세기는.
아이작 : 그렇죠. 종교개혁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하고 르네상스의 절정이었던 세기이기도 하죠. 여기 이 로마 공항의 이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활동하던 천재들의 세기이기도 하구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인간이 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위대한 세기이죠. 아, 그러고 보니 16세기와 성 베드로 대성당도 깊은 인연이 있네요. 16세기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이 대성당을 건축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려고 면죄부를 판 거잖아요. 그게 참 아이러니한 게, 율리우스 2세는 예술에 조예가 깊은 교황이었어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예술가들의 강력한 후원자였으니까요. 여기 시스타나 성당 천장화와 최후의 심판도 그가 미켈란젤로를 독려해서 그리게 한 거죠. 메디치 가문과 함께 르네상스 예술을 중흥시킨 장본인인데, 그가 후원 자금 확보를 위해 발행한 면죄부가 결국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기게 만들었으니, 확실히 그는 르네상스의 후원자가 맞긴 했네요.
멀린 :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 셈인가요? 그렇다면 율리우스 2세 덕에 인류가 새로운 진화의 국면에 들어선 셈이네요.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는 교회의 비대해진 권위를 해체하고, 조직의 일부로서의 인간이 아닌 완전한 개인으로서의 자기인식을 시작하게 했으니까요. 역시 물극필반物極必反은 진리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래서 중간에 애매하게 머물러 있는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아붙이는 방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그건 균형도 아니고 신중도 아니죠. 가운데 서서 눈치만 보고 있는 거 말이에요. 역사는 이쪽이든 저쪽이든 진자운동을 극대화함으로써 자기 한계를 확장시켜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죠.
아이작 : 그런 의미라면, 16세기는 확실히 인류가 개인화, 개성화로의 진화를 위한 진자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세기라고 볼 수 있죠. 동편은 어땠나요?
멀린 : 음.. 다른 지역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의 16세기는 위대한 철학자들의 세기로 불리죠.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화담 서경덕, 남명 조식 같은 성리학자들이 대거 등장한 세기이거든요. 아, 화담은 아시죠? 중세 동편 마법사 중 대표적인 인물인데..
아이작 : 아, 그 왜 유체이탈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던? 멀린의 나툼 중 한 명이기도 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요?
멀린 : 알고 계셨군요. 네, 제 나툼 중 일부이기도 하죠. 아니 제가 일부이죠. 말을 바꿔서 했네요.
아이작 : 아닙니다. 어차피 차원이 중첩되어 있으니 모두 동시적인 것이죠.
멀린 : 역시 출장 다녀오신 분답습니다. 하하 화담은 차원 이동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하더군요. 한국에서는 화담보다 그의 제자인 전우치가 더 유명하긴 합니다만. 구름 타고 다니는 전우치.
아이작 : 구름을 타고 다닌다고요?? 동편의 마법사들은 정말 대단하군요! 차원 이동은 쉬워도 물리법칙을 넘어서는 건 정말 대단한 수련의 결과가 아니면 안 되는데..
멀린 : 동편이야 세계를 의식의 환영으로 접근하니 그게 더 쉽죠. 서편 세계처럼 물리현상에 대한 탐구를 통해 접근하면 아무래도 물리법칙의 한계 안으로 통찰이 제한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아, 개인적 편견입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그런데 구름 타고 다닌 제자 전우치보다 정작 화담은 기녀 황진이의 연인으로 더 유명합니다. 황진이는 당대 최고의 미녀였는데,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은 유일한 사내가 화담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지지요. 같은 공간에서 몇 밤을 보내도 손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는..
아이작 : 헉! 그거야말로 최고의 공력입니다. 미녀의 유혹에도 끄떡하지 않는 공력이라니. 같은 공간에서 밤을 지새우는 데도 말예요? 해탈하지 않고서야 인간이 그게 가능하긴 합니까? 우리 요원들은 차원 이동을 하는 곳에서마다 염문을 만들기 바쁜데..
멀린 : 하하하 부럽습니다. 요원의 사랑. 그거 한번 해보고 싶네요. 아, 그런데 저기.. 그 에이전트 세븐 말이죠. 기억하시죠?
아이작 : 네? 아..
아이작은 멀린이 뜻밖의 인물을 언급하자 갑자기 당황하며 낯빛이 어두워졌습니다. 에이전트 세븐. 교토행 하루카 열차에서 멀린을 마중 나왔던 그녀에 대해 멀린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와 서편 마법사 아이작,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요원의 사랑
멀린 : 음..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생각해 보니 여기서 우연히 만난 것도, 단지 우연만은 아니 것 같으니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에이전트 세븐은 살아있습니다. 지난 교토 마스터 회의에 저를 안내해 주었어요. 그때 말씀드릴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이작 : 아.. 그래요? 살아 있군요. 다행이네요. (잠시 침묵 후) 저를 아직 기억하고 있던가요? 아니 원망하고 있겠군요.
멀린 : 음..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25세기를 떠나오면서 레테의 강을 지나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거든요. 아무튼 그녀가 살아있다는 말씀만은 분명하게 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작 :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현 세기에도 그녀가 와 있나요? 혹시 보신 적이 있으세요?
멀린 : 음.. 그건 왜 물으시죠?
아이작 : 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혹 만날 수 있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어서 말이죠. 그렇게 떠나버린 게..
멀린 : 두 분의 일에 제가 함부로 끼어들 수는 없지만, 이번 생은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번 생에 그녀가 존재한다 해도 아이작의 연인으로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거란 것입니다.
아이작 : 아, 다시 재회하고 싶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그녀의 마음에 너무 큰 짐을 지운 것 같아서..
멀린 : 아무튼 이번 생에 존재한다 해도, 에이전트 세븐과 아이작이 운명적으로 만나지지 않는다면.. 이미 누군가의 연인이 되어 있는 거겠죠. 그러니 그녀의 이번 생의 사랑을 존중해 주세요.
아이작 :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답을 들은 것 같네요. 그렇다면.. 그래야지요. 네 물론..
아이작은 잠시 과거? 아니 25세기의 기억이 모두 소환되는 듯 보였습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슬퍼졌다 우울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삼키고는 이내 다시 평정심을 회복했습니다. 역시 요원은 감정에 함부로 휘둘리지 않는군요.
멀린 : 아, 이거 제가 괜한 말을.. 제 나툼의 사랑 이야기를 하다 그만, 아이작의 상처를 건드렸군요.
아이작 : 아, 아닙니다. 저는 이번 생에 충실해야죠. 멀린께서도 화담의 나툼이시니 같은 기억과 상처를 가지고 계실 텐데, 저 때문에 불필요한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셨으면 하네요.
멀린 : 저야 뭐.. 이번 생은 태양의 마법사로 헌신한지라, 포기한 지 오래인데요.
태양의 마법사는 대지와 조우할 수 없는 외로운 마법사입니다. 언제나 떠오르고 다시 떠오르며 길을 밝히지만, 정작 본인은 대지의 상호작용에 직접 참여할 수 없습니다. 만질 수도 만져질 수도 없는. 그들은 마치 봉쇄 수도원의 수도사들처럼 언제나 비춰줄 뿐, 대상과 조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이작 : 저는 밤의 마법사라.. 밤에는 많은 일이 벌어지지요. 하지만 날이 밝아오면 모든 것이 물러갑니다. 많은 만남과 반복되는 이별. 그건 슬픈 일이죠.
멀린 : 우리 모두 슬픈 운명을 타고 태어났군요. 이번 생은 좀 다르리라 기대했는데..
아이작 : 그래서 더 커뮤니티에 집착하시는 건가요? 멀린은 언제나 커뮤니티를 시도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저는 늘 혼자였는데..
멀린 : 그런지도 모르죠. 저는 운명으로 여기고 있지만 말이에요. 한국의 16세기 천재 철학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학파를 구성했어요. 그들도 아마 매번의 생에 외로웠을 겁니다. 그래도 그 세기에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생겨났으니 좀 덜 했겠네요. 그러고 보면 화담의 인내는 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다시는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만..
아이작 : 하하 그러네요. 바늘로 허벅지를 찔러도 모자랄 판에 말이죠.
멀린 : 대신 일가를 이루었죠. 그들 모두 스승도 없이 스스로 깨우친 이들이에요. 대단하지 않나요. 보통은 계열을 따르게 마련인데. 물론 자신들 스스로에게 스승이었겠지만.
아이작 : 그래서 천재들인 거겠죠. 그런 천재들이 인류를 각성시키죠. 자신에 대해 각성함으로써 말입니다. 서편의 역사에서 르네상스의 번성은 창조주에 종속된 피조물에서, 직접 창조하는 창조자의 위치로 인류를 이동시켰어요. 종속된 인간에서 독립된 인간으로, 따르는 인간에서 이끄는 인간으로 말이죠. 진화의 차원에서 보자면 석기시대의 방식으로 살아오던 인간. 즉, 자연에 종속되어 자연법칙의 한계에 머물던 인간이 그것을 극복하기 시작한 첫 세기란 말이죠. 그건 먼저 의식의 변화로부터 시작된 것이죠.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자기 확신 그리고 물질적인 변화로까지 이어졌어요. 산업혁명 말입니다.
멀린 : 네 맞습니다. 16세기에 비로소 인류가 지구의 리더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죠. 자연의 일부였던 개체에서, 자연을 적극 개발하고 변형하고 창조하는 결정자의 위치로 올라선 거죠. 덩어리로서의 인류에서 개인으로 분화되기 시작한 첫 시작이었고, 신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위대한 세기이기도 하죠. 사실 종교개혁이 내세운 이신칭의以信稱義는 구원의 주도권을 신으로부터 빼앗아 온 상징적인 사건이 아닙니까?
아이작 : 일종의 쿠데타죠. 신의 대리인이 면죄해 주어야 하는 존재에서, ‘내가 믿으면 되는 거야’ 하고 처벌권을 환원 시켜 버렸으니까요. 그건 문명사회 이전에는 인간 개개인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무리에 속하지 않으면 위임할 필요가 없는 주권 말이에요. 문명사회는 개인에게서 주권을 위임받는 대신 관계를 확장시켜 주었어요. 씨족, 부족, 국가, 연합.. 확장되는 관계망 속에서 인간은 개체에서 덩어리가 되어 자기 인식을 확대해갔지만 종속성을 벗어나진 못했어요. 그러니까 자아의 확장이 대륙 너머 지구 밖으로까지 확대되긴 했으나, 개인이 그걸 직접 소유하지는 못했죠. 대신 가족이, 부족이, 국가가 그리고 종교가 대리하여 확장된 자아를 보장해 주었고, 인류는 그것으로 자기 인식을 대체하고 있었던 거죠. 그것을 개인에게 환원시킨 첫번째 사건인 거죠.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먼저는 신으로부터 독립해야 하니까요.
멀린 : 그런데 그 시작은 천재들의 자기 인식, 자기 확신, 자기 증명의 과정을 통해 인류 전체로까지 퍼져나간 것 아닙니까? 그게 한 사람을 통한 진화의 방식인 거죠. 서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상징되는. 그 천재들이 사회의 억압과 관습에 자신을 굴종시켰다면 인류의 진화도 그만큼 늦어지고 왜곡되지 않았을까요?
아이작 : 그런 사례는 무수하게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존 질서와 타협하지 않는 인디고 아이들과 같은 전사들이 아니면 인류의 진화는 쉽게 굴절되고 마는 것이죠. 그들이 자신의 경로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돕는 일이 우리 마법사들의 주요한 미션이기도 한 것이구요. 그런데 이 시대에는 그게 더 어렵고 피곤한 일이 된 것 같아요. 생존 자체가 문제였던 시대에는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고 인식하는 것이 분명했는데. 죽기 아니면 살기였으니까요. 지금처럼 선택지가 많은 사회에서 문제는 억압과 강요가 아니라 타협과 유혹입니다. 평범함의 유혹과 천재성의 타협 말이에요.
멀린 : 그래서 공동체, 커뮤니티가 중요한 거죠. 홀로 자기 개성화의 과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너무 어려운 사회가 되었어요. 개성화 이외의 선택지는 매우 쉽고 편안하니까요. 물론 결과는 뻔하지만. 시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기인식은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에너지를 얻고 각성을 유지할 수 있어요. 사막에서 혼자 수련하는 때는 이제 지났다구요. 헬기 소리, 관광객들 소리에 좀처럼 집중을 할 수 없을 테니 말이죠.
그때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멀린과 아이작이 앉은 카페 옆자리에 자리를 잡으며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말소리가 잘 안 들리는지 목청을 높이다 포기하고 잠시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왕왕대는 스피커에서는 멀린의 항공편이 연착으로 다시 딜레이되었다는 안내방송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기술이 끝없이 발달한 21세기의 로마 공항에서, 두 사람은 커뮤니티의 소음과 지나친 소통으로 말미암은 잦은 연착 덕분에 만남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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