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 게스트하우스 ‘春子’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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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어서 오세요. 멀린, 마법사님.”

“오랜만이네요. ‘春子’ “

“네, 마법사님에게는 그렇겠네요. 여기서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서, 저는 어제 뵌 것 같지만.. 늘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멀린은 ‘春子’를 알고 있었던 걸까요?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하는군요. ‘春子’는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고..

“역시 교토에 계셨군요.”

“제가 여기서 시작되잖아요. 잊으셨어요?”

“그럴 리가요. <위즈덤 레이스>가 여기서 시작되죠. 알고 있어요. 첫 밋업도..”

“마법사님께도 그렇겠지만, 저 역시 이 도시를 떠날 수가 없죠.”

“그러게요. 우리 모두에게 의미 있는 시공간이죠. 이곳은..”

멀린은 잠시 회상에 잠긴 듯 다시 두 개의 달이 뜨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3차원에 머물다 중첩된 ‘春子’의 차원에 들어선 멀린은, 마치 꿈속에서 언제나 왕자였던 것처럼, 언제나 장수였던 것처럼, 언제나 군대에 다시 끌려가거나 학교에 다시 입학하는 신입생처럼, 모든 차원의 기억과 미래의 기록이 순식간에 재생되었습니다. 그러니 ‘春子’는 초면이 아닌 것입니다. ‘春子’는 신비로운 살아있는 집이 아닌 것입니다. ‘春子’와 멀린은 차원을 초월하여 하나의 시공간에서 다시 조우한 오랜 친구이며 새로운 만남이며 영원한 인연인 것입니다.

그런데 ‘春子’는 어떻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지 궁금하다구요? 글쎄요, 그건 주인장의 말처럼 그냥 알게 되는 것이랍니다. 멀린의 주문이 불러낸 ‘春子’는 시공간과 차원을 초월해서 존재하는지라, 그의 형태는 인식하는 자의 마음에 따라 서로 다르게 투영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궁금한 것은 그대의 직관에 떠오른 ‘春子’의 존재 방식이군요.

이 초월된 시공간에서 ‘春子’는 집일 필요도, 사람일 필요도 없습니다. 존재는 인식하는 자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니 누군가에게는 사람으로, 누군가에게는 말하는 집으로, 누군가에게 생명 없는 건물더미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春子’는 자신은 사람이라고, 집이라고, 생명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자신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현재에도 존재하는 우주의 역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다 보니 거미줄이 잔뜩 쳐져 있던데, 요즘은 통 누굴 만나지 않고 있나 봐요?”

“아.. 그 거미줄. 2천년쯤 된 건대.. 집으로 존재하는 동안은 그냥 조용히 머물고 싶더라구요. 기록된 이들 외에는 최대한 인연을 생성하지 않고 있어요. [스팀시티]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구요. 후후 그런데 놀라셨죠? 갑자기 소환되셔서..”

“놀라다마다요. 도대체 지난 며칠을 어떻게 보냈는지 정리가 하나도 안 되고 있어요. ‘春子’, 좀 물어봅시다. 왜 갑자기 멈춘 거죠? [스팀시티]는 도대체 왜 가라앉은 거요?”

“마법사님. 저한테 물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잊으셨어요? 저는 그저 지켜볼 뿐이에요. 오히려 궁금한 건 3차원 드라마를 시청하는 우리들이죠. 다른 차원들의 친구들 말이에요. 모두들 멘붕에 빠졌다구요. 아니 어떻게 그 시점에 대관료 따위로 시비를 걸 수가 있어요.”

“아.. 그 얘긴..”

멀린은 ‘春子’가 대관료 얘기를 꺼내자 갑자기 3차원 큐브 속으로 생각이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닙니다. 좀 쉬어야죠. 큐브 속에서 잠시 건져져 한숨 돌리는 타이밍인데..

“아.. 죄송해요. 다들 너무 궁금해해서.. 마법사님은 드라마 속에 직접 계셨으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보라고들 해서..”

“네.. 알죠. 궁금들 하겠네. 자신들의 시공간과 어떻게 연결될지 모를 테니..”

“맞아요. 선택에 따라서 어떤 시공간들은 블랙홀로 빨려들어 사라져 버린다구요. 모두들 자신의 운명이 달린 거라 관심들이 대단해요.”

“그러니까요. 그게 온 우주의 역사를 바꾸는 일인데.. 어디서 대관료 따위로..”

멀린, 대관료 생각을 하니 스트레스가 쏟아져 나오는가 봅니다. 목소리가 자꾸 높아지고 있습니다.

“3차원 지구, 이거 아주 짜증 나는 곳이란 말이죠. 어찌나 다들 고통중독에서 빠져나오질 못하는지. 툭하면 하다 말고 뒤돌아 가 버리고 포기해 버리니, 이거 마법사 노릇을 통 제대로 할 수가 없어요.”

“그러시겠어요. 지켜보는 저도 순간순간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아니 대통령 될 사람이 조기축구회에서 짱 먹을라고 한심한 짓을 하질 않나, 인류 역사를 바꿀 기술을 가지고서 소꿉놀이나 하고 있으니 이게 당최..”

“아니, 그게 무슨 얘기죠?”

“아.. 아닙니다. 이건 결정된 미래가 아니라.. 팬픽, 아니 경우의 미래 중 하나이긴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春子’는 뭔가 알고 있는 듯합니다. [스팀시티]의 미래, 어떤 이들의 미래를 알고 있는 듯한 말을 하다 맙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가능성의 우주에 대기하고 있는 시공간의 경우의 수들일 뿐입니다. 3차원 세계의 선택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래는 아직 펼쳐지지 않았으니까요.

 

팔자

 

“어허.. 이런, ‘春子’가 그런 얘기를 하는 걸 보니. 좋지 못한 시나리오들이 대기 중이군요.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이게 다 ‘이번 생은 여기까지..’, 그 말 튀어나올 때 알아봤어. 허~참, 이번에도 도로 아미타불이란 말인가..”

멀린이 지나치게 상심하자 ‘春子’는 괜한 말을 했는가 싶어 뻘쭘해졌습니다. 조용하게 타오르던 호롱불이 흔들리고 창밖에는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창틀이 심하게 흔들거렸습니다.

“아니, 저.. 그게 아니라.. 잘 아시겠지만, 아직 3차원에서는 선택이 이루어진 게 아니니까요. 마법사님이 역할을 잘해주시면… 그러시라고 거기 가 계신 거잖아요.”

“알죠. 알아요. 이게 다 내 카르마 때문에 이딴 생고생을.. 아니 업을 갚느라 이 꼴을 당하고 있다는 거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아무리 인과응보라도 경우가 있지. 이게 도대체 뭡니까? 고생과 보상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 왜 고생 모드만 계속 되냐구요.”

“그거야.. 마법사님 팔자가 그러니까..”

“뭐요?! 제 팔자가 뭐 어때서요?”

“아니, 뭐.. 이게 딱 마법사 할 팔자라며, 좋다고 내려가셨잖아요..”

“에잇! 그놈의 마법사…”

멀린은 짜증이 나는지 이부자리에 벌러덩 누워 버립니다. 팔자 생각을 하니 만사가 귀찮고 짜증이 나 버렸습니다. 차라리 모르고 있었더라면 희망이라도 품을 텐데, ‘春子’가 말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이거 이번 판도 영 글렀구나 생각이 듭니다. 매번 반복되는 운명적 만남과 의도적 중단에 신물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또 그것이 반복될 거라 생각하니, 모든 걸 집어치우고 ‘春子’처럼 집이나 되어 볼까 생각이 드는 겁니다.

“마법사님.. 마법사님은 집 못하셔요. 성장하는 이들의 고군분투를 지켜보며, 울컥울컥 눈물을 참지 못하시는 분이 저처럼 이렇게 머물러 있을 수가 없죠. 뭐라도 가서 돕지 못해 안달이 나시잖아요. 그래서 내려가셔 놓구선.. 뭘 그리 팔자타령을 하시고 그러셔요.”

“아, 내가 언제 팔자타령을 했다고 그러시오. ‘春子’가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소.”

“아.. 그거야 워낙 다음이 궁금하니까.. 그만..”

“그니까.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요? [스팀시티] 말이요. 가라앉았다면서요. 이제 다 끝난 거 아닙니까?”

“다 끝나다니요! 아니 마법사님,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으셔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끝나긴 뭐가 끝난답니까. 아직 아무도 선택하지 않았는데.”

“음.. 그렇긴 하지만..”

“총수님들이 있잖아요. 그분들도 다 이곳저곳에서 3차원으로 넘어가신 분들이니 현명한 선택들을 하시겠죠. 절 보세요. 제가 이 도시에 존재한다는 건 [스팀시티]가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으음….”

멀린은 ‘春子’의 말에 마음이 조금 풀리는지 눈을 슬며시 뜨고 다시 창밖을 바라봅니다.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 오랜만입니다. 이곳에서 멀린은 언제나 뜨거운 마음이었습니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가 교차하는 3차원 익스트림 큐브를 바라보며, 그곳에서, 성장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역사를 만들어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3차원 큐브를 열망하며 자신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리고, 우주의 부름이 있거든 주저 없이 3차원 세상으로 뛰어들기를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가 3차원 인간 세상의 마법사가 되기까지, 뛰어들고 다시 넘어서고, 태어나고 현신하기를 반복한 시간이 영겁입니다. 그간 수많은 존재들과 인간사를 만들어내고 우주의 진화를 추동해 왔으며, 수많은 나툼으로 나누어 인간 세상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한 시간들, 기억들, 추억들이 쌓이고 쌓여, 주문이 되고 언어가 되어 글로 기록되는 시점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언어가 되어 기록된 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니, 그간의 모든 만남과 선택이 오롯이 생명이 되어, 우주 속 존재로 창조되고 자신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멀린은 지쳤습니다.

“저는 지쳤어요. 아무래도 너무 오래 머물렀던 것 같아요. 이제는 3차원이 많이 버겁네요..”

“마법사님.. 그래요. 잘 알고 있어요. 이곳에서 바라보는 우리들도 그 마음을 느끼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찾아왔잖아요. 마법사님은 좀 쉬셔야 해요.”

‘春子’는 마법사의 지친 마음을 아는지, 창문을 열고 선선하고 시원한 밤공기를 방안 가득 채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창가에 사뿐히 앉아 풀벌레들의 날갯짓을 모으더니, 멀린을 위로하는 노래를 아주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랑이
그대 마음에 차지 않을 땐
속상해하지 말아요.
미움이 그댈 화나게 해도
짜증 내지 마세요.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우리가 가야 하는 곳.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Love is always part of me.

너무 아픈 날 혼자일 때면
눈물 없이 그냥 넘기기 힘들죠.

모르는 그 누구라도
꼬옥 손잡아 준다면
외로움은 분홍 색깔 물들겠죠.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우리가 가야 하는 곳.

사랑은 언제나 그곳에
Love is always part of m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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