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理)

+ 마스터 회의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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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오면

 

“정신이 좀 듭니까? 이봐요 멀린, 멀린.. 안 자고 있는 거 알아요. 다 듣고 있었죠?”

“아.. 네.. 여기가..”

찰스가 플로팅 되어 있던 멀린을 불러 깨웁니다. 멀린, 잠들어 있던 게 아니었군요.

“어디긴 어디요. 회의장이지. 그만 일어나요. 마법사들 돌아오기 전에 담배나 한 대 피웁시다.”

“아, 네..”

멀린은 자는 척하고 있던 걸 들켜 무안한 지, 어색한 몸짓으로 몸을 일으켜 세웁니다. 찰스는 그런 멀린을 힐끗 보고는 빙그레 웃으며 단상에 걸터앉습니다.

“이리 와요. 담배 뭐 피워요? 말보로? 던힐? 아, 한국 사람이니까 88 피우나?”

“88은 이제 안 나오는데요. 그런데 다들 어디 갔죠? 아무도 없네요.”

“응.. 회전운동 중이요. 그놈의 영감탱이, 이참에 왕 흉내 함 내보겠다고, 다 데리고 토성까지 갔소.”

“네? 토성이요?”

찰스는 품에서 시가를 두 대 꺼내더니, 한 대는 입에 물고 다른 한 대는 멀린에게 건네며 불을 붙여 줍니다.

“어 헉, 콜록콜록 켁켁.. 아, 이거 독하네요.”

“시가는 처음이요? 아, 이 좋은 걸 안 해보고 뭘 했수?”

“그러게요. 저 뭐 했죠. 클럽도 한 번 못 가봤답니다. 담배는 인제 그만 끊으려는데.. 아, 여긴 교토죠.”

멀린, 독해서 더 못 피우겠다 싶어 그냥 꺼버리려다, 여기가 교토라는 것을 기억해 내고선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처음 피워 본 담배 맛은
아침까지 목 안에서 간질간질타.

어젯밤에 하도 울적하기에
가만히 한 대 피워 보았더니

_ 윤동주, <울적>

윤동주에게 담배 한 대를 피워 올려야 합니다. 이것은 교토에 오면 치르는 멀린 만의 의식입니다.

“아, 윤동주.. 세리모니 중이요?”

“네.. 어떻게 아시네요?”

“그럼, 당신이 책에 썼잖소. <개새끼 소년>, 그 챕터 제목이 뭐였더라? 시인께 뭐였는데..”

“시인께 담배 한 대 픠워 올립니다.”

“아, 맞아. 그 가모가와 강가에서 담배 피우는 영상도 있었지.”

“네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기억하지. 기억하다 말고.. 감동적이었거든.”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크으.. 좋다.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우리 어머니는 어느 별에 계시려나..”

“그런데 다들 토성까지 갔다고 했죠? 거기서 뭘 하나요?”

 

찰스의 질문

 

“하긴 뭘 해. 그냥 쇼하는 거지. 이도, 그 양반이 임금님 병에 걸려서 말이지. 세종 계열은 그게 문제야. 기회만 있으면 왕 노릇 한번 해보려고, 틈만 나면 가나다라마바사.. 암튼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멀린, 이따가 회의가 다시 시작되면 어차피 나올 질문이긴 한데.. 왜 총수를 뽑은 거요? 요즘 추세는 그런 게 아니잖아, 뭐 과두제랄까, 대의원, 위원회, 그런 걸 먼저 만들고, 대표나 의장이나 당회장, 뭐 이런 대표제를 하는 게 보통이잖소? 그런데 왜 하필 총수냔 말이지.”

“아. 네.. 그 얘긴 여러 번 하긴 했는데.. 그러니까 뭐, 저도 플로팅 되어 있긴 했지만, 회의 내용을 다 들었습니다. 모두 집중하고 있는데 벌떡 일어나기가 뻘쭘해서 가만히 누워 있긴 했지만요. 그런데 회의 내용을 들어보니, 저도 왜 [스팀시티]가 위원회가 아닌 총수를 원했는지 알 것 같더군요.”

“그래? 그게 뭐요? 왜 총수를 뽑았다는 거요?”

“그러니까 남준 마법사가 말한, 동편 세계관의 그 이(理)와 기(氣)의 작용으로 보자면, 기(氣)를 모아서 형체, 즉 커뮤니티를 구성하게 하는 구심점으로서의 이(理)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옳거니! 그렇지. 그 뉴턴의 제 3 법칙을 따르자면 구심점부터 있어야지.”

“네 그래서요. 그 구심점 역할을 할 총수를 찾은 거죠.”

“엥?? 뭐가 그렇게 간단해? 총수가 구심점이었다고? 위원회는 안되나?”

“위원회는 그러니까, 음.. 그건 좀 허벙하다고 할까요? 온라인에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손을 잡아봐야, 그게 구심점 역할을 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이 들었어요. 구심점이 꼭 한 사람일 필요는 없지만, 두 사람이든 열 사람이든, 밀도와 결집력이 단단하지 않으면 원운동을 함부로 시작할 수 없거든요. 어설프게 맞잡은 손은 쉽게 끊어지니까요. 그래서 일단은 단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죠. 아니 [스팀시티]가 그걸 원했어요. 제 생각은 아니고 해석입니다. 직관에 따른..”

“아, 그 정도야 나도 알지. 나, 마법사요. 내가 그랜드 마스터잖소.”

“아.. 네 그러시죠. 이게 마법사들하고 대화하는 일이 좀처럼 없는 일이라.. 평상시 대화에서는 이런 걸 이해시키는 게 힘들거든요. 덕분에 해설이 버릇이 되었네요.”

“이해합니다. 그건 내가 더 잘 알지. 우리 계열의 수장 다윈은 자신의 직관을 사람들에게 잘 이해시키기 위해, 20년이나 발표를 미루고 논문을 다듬었으니 말이요. 그런데 구심점이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것 아니요? 시대정신이나, 운명, 역사의 흐름 같은 것들에 반응하는 개개인의 창발적 연대 같은 것 말이요.”

“네 맞아요. 그렇게 시작된 거죠. 이 블록체인 시스템이 말이에요. 이(理)와 기(理)의 창발적 발현, 사토시의 논문이 이(理)였다면, 모여든 탈중앙화의 시대정신은 기(氣)가 되어 블록체인에 생명력을 불어넣었죠. 이것이야말로 이(理)와 기(氣)의 상호작용으로 태동하는 커뮤니티의 실 예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줄 알았어요. 어떤 시대정신, 우주의 의지가 발동되어 새로운 시스템이 발현되었구나. 그러면 그 흐름 속에서 저절로 커뮤니티가 발생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된 거죠. 맞아요. 그랬어요. 처음에는..”

“그런데 왜 총수를 뽑은 거요? 그런 창발적이고 자발적인 연대야말로 21세기적인 것이 아니요? 자연발생적인 진화 말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종의 발생은 우연이거나, 우주의 의지이거나, 운명이거나 창발적이더라도, 적자생존의 과정에 돌입하게 되면, 종 간의 연대와 경쟁이 일어나게 마련이지 않습니까? 같은 종 내에서, 또는 천적 간의 약육강식 게임이 시작되는 거죠. 그러면 당연히 세, 즉 커뮤니티를 이루는 것들이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어요. 저는 이미 블록체인 시스템이 창발적 발현의 단계를 지나, 산업화의 과정에 들어서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적자생존의 게임에 진입하게 된 거죠.”

“그렇군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총수보다는 위원회나 과두제가 더 다양성을 많이 확보할 수 있지 않겠소? 적자생존 경쟁에 진입할 만큼 아직 생태계가 포화상태에 이르지는 않은 것 같던데..”

“네, 블록체인 시스템은 이제 시작단계죠. 더 다양한 시도와 도전이 나와야 하고 그럴 여지는 무궁무진해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판을 주도하고 장악할 수 있는 강력한 돌출된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포화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면, 아니 그전에 이미 기존 산업체제의 강력한 도전을 맞닥뜨리게 될 텐데, 그것을 감당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가는 아직 의문이거든요. 블록체인 시스템은 인류사적으로 볼 때, 인류의 출현, 물물교환의 시작, 화폐의 등장만큼 강력한 전환점이 될 텐데, 그걸 기존 권력이 가만두지 않겠죠. 초기에 그러한 저항에 맞설 만큼 강력한 구심점을 만들지 않으면 용두사미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게 무엇이든 결국 신의 의지, 자연의 선택이 아니겠소. 살아남은 시스템이 선이고,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될 텐데, 일부러 힘을 그렇게 들일 필요가 있을까?”

“잘하는 짓이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찰스가 멀린의 말에 부정적인 언급을 살짝 얹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레이트 마스터 이도가 갑자기 허공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내며 무대 위로 뛰어 올라왔습니다. 그리고 이어 7천명의 마법사들이 바람처럼 관객석 여기저기서 나타났습니다. 발현한 마법사들로 관객석이 다시 들어차자, 곧 박수소리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환영합니다! 멀린,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마법사들의 환영의 박수소리와 휘파람 소리, 우렁찬 인사말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모두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있습니다. 회전운동의 감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합니다.

“멀린, 깨어나셨군요. 기다렸습니다.”

이도가 멀린에게 악수를 청하고, 뒤를 이어 동편 마법사 남준과 서편 마법사 아이작도 멀린과 반가움의 포옹을 나눕니다. 회의장이 다시 이어질 토론에 대한 기대감으로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도는 자리로 돌아가 백색의자에 다시 앉고, 무대에는 아이작과 남준 그리고 멀린이, 반짝이는 마법사들의 눈길을 받으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스터 회의의 재개

 

찰스 : 아아, 마이크 시험 중, 쳌! 쳌! 잘 나오나요? 그래요. 다들 잘 보고 오셨습니까? 회전운동은 언제나 흥분되죠. 여러분들이 회전운동을 가열차게 하는 동안, 저는 깨어난 멀린과 대화를 좀 나누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모두가 궁금해할, 바로 그 질문 말이죠. 왜 위원회가 아닌 총수를 뽑았는지 제가 먼저 질문을 좀 드렸죠. 그러자 멀린은 그것이 구심점이었다. 이 창발적으로 태동하는 새로운 시스템에, 흐름을 주도할 강력한 구심점을 돌출시키고 싶었다고 답변을 했습니다. 아니 [스팀시티]가 그걸 원했다고 말이죠. 그렇죠 멀린?

멀린 : 아.. 네, 충분한 답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모두들 그 부분을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말씀드리자면, [스팀시티]의 총수를 뽑게 된 것은 철저하게 직관을 따른 결과입니다. [스팀시티] 프로젝트 이전에, 제게 온 직관이 지도자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한가에 관한 질문이었고,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스팀시티]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지나와 보니 총수가 추대되어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이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시도한 겁니다. 앞선 토의 내용을 토대로 말씀을 드리면, (아.. 죄송합니다. 실은 깨어나 있었거든요.) 암튼, 그것은 일종의 구심점 찾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땅에 등장한 여러 가지 기운들을 모아, 형태를 갖춘 커뮤니티를 탄생시키기 위해, 구심점의 역할을 할 총수를 추대한 것이죠.

아이작 : 그렇다면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동편의 이기심, 즉 이(理)와 기(氣)에 대한 이론에는 이해가 깊지 않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완전한 개인의 출현을 위해 준비된 필드가 블록체인이라면, 왜 블록체인 시스템에 커뮤니티라는 것이 필요하죠. 각자가 이(理)가 될 수는 없나요? 아니 이미 블록체인 자체가 커뮤니티인 것이 아닌가요?

멀린 : 그건, 그렇게 되기를 저도 바랍니다. 인류의 개인화, 개성화에 관한 우주적 의지의 발현이 블록체인 시스템이라면, 완전한 개인이 먼저 출현하고, 이들이 각자의 자장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교집합으로서의 커뮤니티가 형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장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제 겨우 자신의 이름을 인식하는 이가 있고, 누군가는 이제 꿈을 꾸기 시작했으며, 누군가는 이제 막 꿈을 이루기 직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고, 또 누군가는 도전의 과정에서 깊게 상처를 입고 치유가 필요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마다 성장의 과정과 상황이 다른데, 일률적으로 모두가 블록체인에서 스스로를 발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의 단계에 있는 이들로부터, 막 열매를 맺기 직전인 사람들까지, 정말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상황에서, 천편일률적인 성장의 결과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떤 모델이 필요합니다. 꿈의 필드로서 블록체인 시스템이 발현하려면, 그 과정을 통해 꿈을 이루는 이들이 먼저 등장해 주어야겠죠. 그래야 따르는 이들이 생기고 도전하는 이들이 연이어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멀린은 성장의 관점에서 총수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모델링이 되어주는 일. 블록체인 시스템에서 자신을 성장시키고 꿈을 이루는 일이 실제로 가능한지 실험해 보는 일, 그것이 [스팀시티]의 총수 추대 과정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남준 : 앞서 말씀드렸듯이, 동편 세계관의 이기심(理氣心)은 구심점이 되어주어야 할 이(理)를 반드시 필요로 합니다. 서편 세계처럼 몸만 훌쩍 크고, 돈만 많이 번다고 장땡이 아닌 거죠.

아이작 : 어허~ 말씀이 심하시군요. 토성까지 가서 인류의 역사를 모두 훑어보시고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서편 세계의 이기심(利己心)이 어떻게 인류를 발전시켜 왔는지 충분히 보셨잖아요.

남준 : 네 물론 봤습니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도전하게 했던 그 신심과 성심, 이념과 신념의 역사를 감동스럽게 보았습니다. 네 그것에 대해서 말하는 겁니다. 그들은 왜 땅끝까지 복음을 들고 나아갔는가, 다치고 병들고 지쳐도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으며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 그 동력, 그 이(理) 말입니다. 그것이 내세를 위한 것이든, 신에 대한 충심이든, 자기 신념이든, 심지어 인정욕구의 해소를 위한 것이든, 무엇이든 그 이(理)가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 이(理)가 서편에서는 신이고 초월적 관념이었다면, 동편에서는 사람이고 관계였습니다. 무리를 이루고 한 곳에 정착하여 국가를 형성한 뒤에, 우리 동편 세계의 이(理)는 사람 사이의 관계였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왕과 백성 간의 관계, 스승과 제자 간의 관계, 친구와 친구 사이의 관계, 그 관계 사이의 이(理)는 화평하게 지내는 것이고, 서로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理)의 상징으로서 왕이 있고, 그 왕을 구심점으로 왕과 백성의 커뮤니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왕은 포식자가 아닙니다. 왕은 비가 오지 않아도 책임을 져야 하고, 홍수가 나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왕은 백성들의 이(理)를 올바로 구현하기 위해, 밤낮이 없도록 마음을 닦고 정신을 수양하고 육체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백성들의 뜻을 대신 전하는 신하와 대신들의 간섭과 비판에 늘 직면해야 했고, 때로는 그들의 간교한 휘둘림에 맞서 암살의 위협을 감당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굴복한 왕은 허수아비가 되었고 맞선 왕은 때로 미쳐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팽팽한 이(理)의 해석과 수양, 실천의 과정을 통해, 동편의 왕국들은 수백년, 수천년의 전통과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해 왔습니다.

그 이(理)의 중심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 관계는 저 하늘나라 어디 보좌에 앉아 있는 유리된 신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사람, 서로가 서로를 신처럼 섬기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동편 세계의 사람은 육체에 구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氣)가 흩어졌다고 해서 그 이(理)도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편 세계에서 육체가 죽으면 영혼은 하늘나라에 가듯, 동편 세계의 사람은 기(氣)가 흩어져도 이(理)로 남습니다. 그것은 가문이고, 이름이고, 이어지는 세계입니다. 동편 세계의 정신은 이 땅으로 돌아와 새로운 기(氣)를 입습니다. 돌아오고 또 돌아와, 다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고치고 다듬고 단단하게 세워가야 합니다. 죽은 이 역시 잠시 머물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성장과 질서는 순차적입니다. 고정된 땅에서 순차적으로 성장하고, 성장에 따라 권한을 누리게 됩니다. 연공서열이란 것 말이죠. 고리타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만큼 안정적인 것이 또 없습니다. 고립되어 있고 고정된 사회에서는 말이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안으로만 고립되어, 고정된 관계에만 집중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다른 세계관을 가진 서편 세계의 진격에, 우리는 그대들을 친구로 맞고 싶었으나 그대들의 탐욕은 우리의 문화를 해체시켜 버렸지요. 결국 순차성이란 질서가 사라지고 각자도생의 아비규환이 벌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절대 악도 아닙니다. 그간 동편 세계가 연공서열과 순차성에 안주하며 진화를 더디 하고 있었던 탓이니까요. 자연스러운 물극필반이었죠.

 

인류의 사춘기

 

멀린 : 네 안타깝게도 동편 세계의 이(理)도 갈 곳이 없어져 버렸죠. 하지만 이것으로 부모살해를 이루게 된 것이 아닐까요? 알을 깨고 나와야 할 때, 그러니까 동편 정신의 사춘기가 드디어 시작된 게 아닐까요?

남준 : 맞습니다. 동편 세계의 사춘기가 드디어 도래했다고 봐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건강한 발달과정을 밟으려면, 사춘기에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꿈이 있어야 하는데, 동편 세계의 어른이 서편 세계였을까요?

멀린 : 물리적으로는 그런 면이 없지 않습니다. 동편 세계는 자본주의의 후발주자였고, 서편 세계의 부모살해의 과정을 뒤늦게 경험했어요. 게다가 자본주의는 따라가기에도 벅찼으니까, 새로운 이(理)를 주체적으로 발현시킬 수 없었던 거죠.

찰스 : 서편 세계를 양부모 삼은 거군요. 하하 양부모가 참 철이 없었습니다. 아닌가? 유산을 놓고 경쟁하는 형제였나?

아이작 : 그렇다면 부끄럽군요. 서편 세계는 몸을 살찌우는 데에만 급급했어요. 질서에 따른 성장이라는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미친 듯이 육체적 성장을 가속시켰죠. 공허한 성장. 그게 딱 맞는 말이겠네요.

남준 : 하지만 인류 성장의 모델이 되어 줄 영웅들이 있었죠. 꿈을 따라, 인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한 도전자들 말이에요.

아이작 : 맞습니다. 그들이 서편 세계의 새로운 정신이 되어주고 있죠. 프론티어, 도전자들, 인류에게 온라인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고, 우주로까지 뻗어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고 있는 영웅들 말이죠.

초월적 세계와 신을 이(理)로 삼았던 서편의 정신세계는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의 과정을 통해 알을 깨고 나왔습니다. 신이라는 부모를 살해하고, 산업사회라는 생산능력을 획득한 서편 세계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성장과 성장을 거듭하였고 나아가고 나아갔습니다. 성장하는 사춘기는 돌도 소화해낼 만큼 강력한 위장을 가졌으니까요. 덕분에 남준 마법사의 말대로, 집단적 개인으로서, 이(理)와 기(氣)의 절대왕국을 누리고 있던 동편 세계는, 반강제적으로 알을 깨고 나와야 했습니다. 서편 세계의 프론티어들이 연신 두들겨 댔으니 말이죠.

멀린 : 집단적 개인이 해체되고 이제 물리적 개인으로서 생존경쟁의 한복판에 내던져진 동편인들은 밀린 숙제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생존경쟁의 전쟁터에서, 분리된 자신의 물리적 개체를 보존하려면, 더 이상 ‘우리’가 아닌, ‘너’를 이겨야 하니까요. ‘너’보다 앞서야 하니까요. 그리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드디어 동편 세계에도 알을 깨고 나온, 분리된 ‘나’가 등장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나 먼저 뛰어 나간 서편 세계의 개인들을 따라잡으려면, 더 이상 애미애비도 없고 자식, 친구도 없어야 하는 겁니다. 오로지 생존경쟁의 라이벌들만 존재하는 겁니다. 그렇게 서편이고 동편이고 할 것 없이 모두들 달리고 달려 마침내 지구를 다 털어 먹었습니다. 이제 인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이(理)는 없고, 물리적 개인의 폭발적 성장만 추구하던 인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커뮤니티를 상실한 인류는 새로운 가족을 만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비대해진 몸도 가누지 못한 채 홀로 쓸쓸히 흩어져 갈까요?

 

인류의 새로운 이(理)

 

남준 : 동편 세계도, 서편 세계도, 사춘기를 넘어 청춘으로 자라나게 하려면 새로운 꿈이 필요해요. 꿈은 청춘의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죠. 이렇게 모두들 돼지같이 몸만 키워서는, 지구라는 좁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제로섬 게임을 반복할 수밖에 없어요.

아이작 : 새로운 꿈? 그건 뭡니까?

남준 : 글쎄요. 그건 뭘까요? 멀린은 그게 뭐라고 생각해요?

인류의 새로운 꿈, 인류가 새로 품게 될 이(理), 그것은 뭘까요? 남준의 질문을 받은 멀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개를 돌려 이도를 바라봅니다. 그레이트 마스터 이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멀린 : 황공하지만, 그건 이미 대왕 세종이 보여 주지 않았을까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한 사람 또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세종이 품었던 이(理), 나라와 백성, 친구와 이웃을,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하는 마음. 그건 청년 예수가 품었던 꿈이기도 하죠.

이도 :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그때 이도가 백색의자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걸어 나오며 복음서에 나오는 구절을 읊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이작과 남준, 멀린도 이도 곁에 서며, 복음서의 다른 구절로 화답합니다.

아이작 :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남준, 멀린 :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도 : 새 이(理)를 너희에게 주노니 꿈꾸라, 사랑하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주는 블록체인 세상의 새로운 ‘이(理)’이니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꿈꾸라
사랑하라

그렇습니다. 사춘기를 지나, 이제 청춘기에 들어서는 인류에게 내려진 새로운 이(理)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꿈꾸고,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경쟁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같은 꿈을 꾸며, 함께 손을 맞잡고, 지구 너머 새로운 세상으로 함께 나아갈 친구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새로운 이(理)는 꿈의 공동체, 드림 커뮤니티를 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희망도, 공포도, 혼자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복음입니다. 기쁨도, 슬픔도,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는 복음입니다. 세상이 작고 작으니, 무한하게 넓은 우주로 나아가고 나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우주 끝까지 이르러, 내 친구가 되리라!”

그래서 우주는 인류에게 블록체인의 새로운 대륙을 내어주고, 친구를 찾으라 명하고 있습니다. 내 꿈에 참여하고 너의 꿈에 참여할 친구를, 내 꿈에 투자하고, 너의 꿈에 투자할 동료를 만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인류는 블록체인 세상에서, 같은 꿈을 꾸는 친구와 동료들을 만나 연대하고 우주로 나아갈 것입니다.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희망과 공포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관념뿐인 신과, 숨 막힐 듯한 집단으로부터 벗어나, 우리는 진정한 ‘나’로서 완전한 ‘너’와 연대할 것입니다. 그 세상을 [스팀시티]가 열게 될 것입니다.

“자! 모두 일어나, 다 함께 이 새로운 이(理)를 찬양합시다!”

함께 나누는 기쁨과 슬픔
함께 느끼는 희망과 공포
이제야 비로소 우리는 알았네
작고 작은 이 세상

마법사들의 노래가 움직이는 마법의 성 가득 울려 퍼집니다. 모두의 눈 속에는, 토성의 궤도를 돌며 보았던 인류의 미래기억이 푸른 불꽃을 내며 피어나고 있습니다. 성장하는 인류는 결국 지구를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손에 손을 맞잡고, 움직이는 마법의 성의 마법사들과 함께, 전 우주로 뻗어 나갈 것입니다. 그것은 기록되어 있는 역사이며, 인류의 영혼에 잠들어 있는 미래기억입니다.

산이 높고 험해도
바다 깊고 넓어도
우리 사는 이 세상
아주 작고 작은 곳

노래가 계속될수록 마법사들은 더욱 비장해집니다. 그들이 깨워야 할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꾸고 함께 할 친구를 찾으라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서로 사랑하라고, 일깨우고 알려주어야 할 운명적인 만남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이 높고 험해도
바다 깊고 넓어도
우리 사는 이 세상
아주 작고 작은 곳

It’s a small world after all
It’s a small world after all
It’s a small world after all
It’s a small, small world

“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이상으로 마스터 회의는 모두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또 만나요!!”

찰스가 마스터 회의의 종료를 공식 선언하자, 모든 마법사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며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만남은 아쉽지만, 이제 마법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의 그대들을 만나러 돌아가야 합니다.

회의장을 감싸고 있던 벽들 사이로 7개의 원형문이 열리고, 바닥에서 선로가 상승하자, 마법사들을 태우고 떠날 7대의 하루카 열차가, 사방에서 경적을 울리며 회의장 중앙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레이트 마스터 이도와 그랜드 마스터 찰스는, 떠나는 마법사들을 배웅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합니다. 마법사들 모두 아쉬운 표정으로 작별을 고하고, 저마다 자신의 지역으로 떠날 기차에 오르고 있습니다.

쿠르르 쾅!!

그런데 그때, 갑자기 굉음이 울리며 움직이는 마법의 성이 크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어디를 그냥 가시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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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도시건설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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