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여자도 없는 세계 _ (3) 답장
DM은 잘 읽어 보았습니다. 정신이 어떻게 되신 게 아닌가? 생각하겠군요. 누군가 읽는다면 말입니다. 말씀하신 세계에 대해선 마스터 스쿨 시절 <미래 세계 연구사례집>에서 읽어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가능성이 크지 않은 세계라 생각해서 별생각 없이 읽고 말았던 기억이 나네요.
수많은 미래가 가능성으로 존재하고 각각은 우리의 인식에 닿는 순간 현실이 되고 역사가 되죠. 선생의 증언 덕에 그 세계가 우리의 세계에서 생명력을 얻게 되었군요. 물론, 이건 저의 입장입니다만. 선생께서는 경험하셨으니 연결된 세계일 테고, 그렇다면 그 세계는 벌써 우리 세계에 진입한 세계가 된 것이네요. 스쳐 지나가게 될지, 연결되어 우리 세계의 미래가 그 세계로 나아갈지는, 지금 선생의 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말씀하신 다트머신은 다행히 지하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당구장 주인이 미처 처분하지 못하고 나간 것 같습니다. 저도 이 카페 소유주의 부탁을 받아 대신 운영하고 있는 형편이라 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릅니다만, 선생의 DM을 받고 카페 소유주인 친구에게 문의해보니 아마도 다트머신을 동작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군요. 스위치 박스의 열쇠를 전에 당구장에서 일하던 쿠바인이 가지고 있었는데 당구장이 문을 닫으면서 한국을 떠나버렸답니다. 그 이후로는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없다는군요. 전원이 들어와야 운행을 할 수 있겠죠? 현재로선 방법이 요원해 보입니다만.
미래의 자신을 위해 나의 과거의 기억을 지울 수 있겠는가? 결국 선생의 질문은 이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답을 알고 있을 리야 없고, 결국 이것도 선생의 선택의 문제로 남게 되겠지만, 그 미래의 자신과 현재의 나, 더군다나 환생한 존재로서의 미래의 나는 과연 지금의 나일까? 질문을 던져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지금 선생의 삶에는 휴먼 힐러의 침투가 있었는데, 그것은 말씀대로면 휴먼 힐러의 선택에 의해 선생께 주어진 것이겠죠. 물론 함께하신 백 일 동안 선생과 휴먼 힐러의 관계가 여기까지 이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선택의 순간은 백 일의 만남 동안 계속 있었다고 봐야겠죠. 그러므로 휴먼 힐러가 이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선생의 동의와 상관없이 테러를 가한 게 아닌 이상, 선생의 선택은 이미 일정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랑과 호감의 결과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휴먼 힐러와 미래의 선생 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수 세기를 거슬러 온 과거의 어느 세계에서도 그것은 또다시 재현되었습니다. 그러니 사랑은 다시 한번 이루어졌고 책임은 서로에게 나누어졌다고 봐야겠지요. 또한 이렇게 고민하고 계시는 것만 보아도 선생님의 사랑은 세기와 세계를 뛰어넘어 반복되고 있다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선택의 기준이어야겠지요. 그것은 미래의 나를 위한 것이 이미 아닌 것 아닐까요? 사랑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선생님의 선택이 숙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사랑을 기준으로 하는 선택이 무엇일지, 그것은 선생님만 아실 테니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생은 반복되고 만남도 역시 그러하니까요. 시간의 선후와 세계의 존재 여부는 하나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두 분은 만났고, 또다시 만났다는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할 것입니다. 모습은 달라도.
그런데 쓰다 보니 어이가 없군요. 사랑이 떠나도록 놓아두겠습니까? 그건 진짜 사랑입니까? 살리고 지켜야 할 것은 미래의 선생이 아니라 지금의 휴먼 힐러와 선생의 사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하지 못할 게 뭡니까? 저라면 지구를 다 뒤져서라도 쿠바인을 찾아내어 다트머신을 다시 작동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함께, 그녀와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겠습니다. 미래의 나를 향해 말입니다. 그리고 부딪혀 보는 겁니다. 연약해진 미래의 선생을 보호하기 위해 기억을 지우는 게 무슨 해결책이겠습니까? 그의 말처럼 상처와 절망은 극복하고 승화시켜야 할 것이지 지워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세 사람? 두 사람?이 함께 도와 하나하나 극복해간다면 미래의 선생도 자신의 생을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몹쓸 사회는 그런 식으로 정복욕을 다룬다지만, 피우지 말라고 담배를 안 피우던가요? 마시지 말라고 술을 안 마시던가요? 하지 말래도 사랑을 멈추지 못해 그 세계에서도 우리 세계에까지 거슬러 온 이가 있으니. 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워야 할 것은 선생의 기억이 아니라 그 사회의 왜곡된 인식입니다. 지켜야 할 것은 선생의 기억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세기를 거슬러 온 사랑입니다. 정복자여!
휴먼 힐러의 건강 상태가 염려되는군요. 언제 시간 되시면 오셔서 저희 카페의 마메리카노용 원두를 가져가십시오. 마법이 걸려 있어 공복에 달여 드시면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그리고 선생의 선택은 빨라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랑이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20세기 카페, 마법사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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