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100] 룰루랄라 춤을 추며
[BOOK 100] Mar 26. 2022 l M.멀린
“동시에 도처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가볍게,
붙박이 재화 따위로 거추장스러워지는 일 없이,
오직 유목민적인 재화에 해당하는
아이디어와 경험, 지식, 인맥 등만을 쌓아가면서,
소유의 이유가 아닌 존재의 이유만을 성찰하며 살아야 한다.”
_ 자크 아탈리, <살아남기 위하여>
춘자는 이 낯선 여행에 임하며 자크 아탈리의 저 말을 가슴에 품었나 보다. 소유가 아닌 존재의 이유를 성찰하라는. 그건 낭만적인 말이 아니라고 춘자는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냥 돈 많이 벌어 세계여행도 다니고, 코인 대박 나서 디지털 노마드로 휴양지에서 설렁거리고, 타이틀은 그럴듯한 스타트업 CEO쯤? 아니면 1인 크리에이터도 좋고 유튜브도 찍어보고. 대충 이런 꿈을 꾸는 범인들을 춘자는 경멸한다고 했다. 이건 자크 아탈리의 책 제목 그대로 ‘살아남기 위하여’ 필요한 생존의 방식이지 낭만 잔뜩 처바른 달짝지근한 떡볶이 처방 따위가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했다. 투쟁! 투쟁! 증명 투쟁!!
“세상의 질서는 정주민의 방식으로 짜여 있으니 나와 같은 사람은 삶이 내내 투쟁이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일탈이 아니라 일상임을 증명하려는 투쟁.”
그 말을 지겹도록 들었지만, 그걸 책으로 또보니 새롭다. 춘자의 여정은 어찌나 낯선 경험들의 연속인지, 그의 첫 여행지인 오사카 대학의 문화인류학 연구실에서 만난 탐험가들,
‘솔로몬 제도의 부족들이 어떻게 평화를 구축하는지 연구하다가 어느 부족 추장의 사위가 될 뻔한 사람, 페루의 아마존에서 벌레를 먹으며 환경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하는 사람, 모잠비크의 젠더 문제나 중국의 짝퉁 문화를 연구하는 사람, 네팔 쿰부 셰르파의 삶과 우간다 남수단 난민들의 삶을 연구하는 사람 등 다양한 연구자들’
만큼이나 이상하고 낯선 세계의 연속인 것이다. 오사카 만국박람회장의 대관람차를 타고 오르며 발견한 눈에서 광선을 쏘는 우뚝 선 태양의 탑을 시작으로, 누워있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계의 주문 소리가 훑어 들어오는 공동묘지 앞의 교토 게스트 하우스. “다카이데스(비싸요)”하고 돌아 나서는 춘자에게 또박또박한 한국말로 “또 오십니까?” 묻는 ‘양복의 병원’ 병원장. 수백 년 된 고택에서 끌려들어 간 감각의 제국의 벽 천정에는 나체로 쇠사슬을 온몸에 감고는 야릇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카사노바 자서전 속 여인이 춘자를 훌쩍 루팡에게 인계하고. 도쿄의 어두침침한 지하 바 ‘루팡’의 한구석에서 고뇌하는 다자이 오사무와 나쓰메 소세키에게서 문고의 사명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듣게 만든다. 피곤한 춘자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주말의 도쿄는 만실이라 그녀를 24시간 개방하는 서점에서 방황하게 하고, 방황하는 춘자를 비웃듯 지하철도 다니지 않는 새벽의 파파이스에서 형광펜으로 밑줄 쭉쭉 그어가며 영어 공부하는 일본 여자에게 공부는 집에 가서 하라고 콜라를 집어던지는 일본말을 할 줄 아는 흑인 여자는 돌연 춘자를 돌아보며 넌 왜 이름이 춘자냐고 묻는다.
그러게 내 이름이 왜 춘자지?
궁금한 건 이 책을 읽는 모두일 테다. 그러나 자신이 왜 춘자인지 설명하지 못하는 춘자는 정작 돌고래 기사단의 언어를 알아듣고 외계인 엘리와 조우하며 해변에서 서핑하는 고양이들과 독재자 프랑코에 대해서 논쟁한다. 게다가 춘자를 괴롭히는 적은 아이러니하게도 물풍선을 투척하는 베드벅이라니.
Where the hell is Choonza!
어찌나 고단한 경험, 피곤한 여행의 연속인지. 그래서 춘자는 이것은 투쟁이고 삶이지 낭만도 일탈도 아니라고 또다시 힘주어 말한다. 그래서 춘자는 ‘Members Only!’라고, 떡볶이나 후루룩 쩝쩝 거리며 ‘여행 좋지~’거리는 낭만 고양이들은 그냥 꺼지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르게. 얼씬도 하지 마시라고. 춘자는 ‘노마드’와 ‘어드벤쳐’라, 낭만적 일탈과 인스타용 출사가 목적인 댕댕이들은 춘자의 멤베가 될 자격도 없다니 누가 그의 멤버가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구도 그의 멤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친구들은 이미 자신만의 Sweet Lullaby를 찍느라 세상 곳곳을 종횡무진하고 있을 테니. 코로나 따위 아랑곳없이.
그러나 이것은 여행의 방식이 아니라 생존의 방식이라고. ‘살아남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생존 투쟁의 방식이라고 하니, 그대의 생존 투쟁의 방식은 춘자의 그것보다 잘났는가? 여기서도 살고, 저기서도 살고. 소유가 아닌 경험을 위하여 재화를 획득하고 소비하고 있는가? 축적하고 쌓는 일에만 혈안이 된 정주민의 방식이 그대의 목을 조르고 있진 않은가? 그 방식의 방식으로 졸.업. 할 수 있겠는가? 춘자처럼 ‘노마드’하고 ‘어드벤쳐’하지 않아도 떡볶이만 먹다 죽으면 다행이라며 이 직업에서 저 직업, 이 직장에서 저 직장, 이 전셋집에서 저 월세방으로 ‘노마드’하고, 떠나는 지하철에 맥가이버처럼 뛰어드는 매일 아침 ‘어드벤쳐’를 애써 마땅한 일상인 양 ‘어쩔 수 없잖아?’ 자위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정주 노예들에게 춘자는 기꺼이 자신의 생존 방식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다음 세대에 나타날 새로운 형태의 부는 한 곳에 쌓이지 않고 이곳저곳으로 움직인다. 부를 쌓아 올릴 수 없다면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넓혀 가는 것이다. 그것은 집중된 부와 권력에 대응하는 분산된 부와 권력이다. 새로운 부를 찾아 전 세계로 흩어진 춘자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블록체인과 암호화폐 위에 세운 단단한 연대 안에서 세계 어디서나 창작 활동을 하고, 독보적인 콘텐츠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낸다. 그 가치는 임대료나 광고 수익이 아닌 블록체인 공동체가 공유하는 암호화폐 가치에 반영되며 그 결과 모든 구성원의 부가 함께 성장한다.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라는 새로운 시스템이 우리의 검과 방패가 되어 줄 것이다.”
실천하는 지성 춘자는 그래서 이 여행의 기록을 블록체인 위에 박제했고 그것을 묶어 물질로 책으로 세상에 내어 놓았다. 그리고 동지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뜻이 맞는 창작자들과 단단한 연대 위에 공동체를 꾸리고, 노마드로서의 삶을 흔들림 없이 영위하기 위해 우리의 집을 전 세계에 짓는 꿈. 춘자는 이 꿈을 현실로 가져오기 위한 고군분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대는 아니다. 그대는 ‘노마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는 ‘어드벤쳐’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는 쌓을 줄도 모르면서 모으기만 하고 정주하는 법도 모르면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춘자를 만날 수 없다. 그의 동지가 될 수 없다. 그러니 춤을 추게나. 일어나 춤을 추게나. 정주하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전후좌우로 몸을 흔들어라. 신나게! 흥겹게! 직관의 리듬에 몸을 맡기고 내일의 걱정일랑 벗어던지고, 춘자의 손을 잡고 서로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시작하면 어느새 우리는 회전하고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될 거야. 우주를 향해 떠오르는 [스팀시티]를 만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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