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계단과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

+ 게스트하우스 ‘春子’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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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었네

 

“이런, 제가 손님들을 너무 오래 붙들어 두었군요. 피곤하실 텐데 이제 좀 쉬셔야죠.”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멀린은 교토역에 한밤중에 도착한 이후로 지금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만 아직도 밤이라는 것, 달이 떠 있다는 것,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고 있다는 것만이 분명할 뿐입니다.

“그러게요. 두 분 얘기에 심취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요.”

“저도 난생처음 만난 마법사님과의 대화가 무척 재미있었습니다. 단골 손님을 오랜만에 뵈어서 또 좋았구요. 늘 사용하시던 그 룸으로 드려야 겠죠?”

“네. 여기 제 리플릿, 드릴게요.”

회사원은 지갑에서 어떤 카드를 꺼내더니 주인장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주인장은 카드를 태블릿에 대고 몇 가지를 입력하더니 다시 회사원에게 돌려주며 한마디 덧붙입니다.

“잊지 않고 가지고 다니시는군요. 이 리플릿을 사용 할 수 있는 곳이 좀 많아져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러게요. 이 좋은 걸, 이곳에 올 때만 사용하는 게 아깝습니다. 이렇게 혁신적인 매체를 말이죠. 그나저나 이번 생에 이걸 다른 곳에서 사용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두 사람이 리플릿이라 부르는, 전형적인 호텔 카드키나 신용카드처럼 보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멀린은 알지 못합니다. 평범한 카드에 어떤 혁신적인 기능이 들어 있는지 모르지만 두 사람은 매우 기대하는 눈치였습니다. 멀린은 리플릿이라 불리는 이 매체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날을 새버릴 것 같아 그냥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두기로 합니다.

“자, 마법사님은 어떤 룸으로 드릴까요?”

“아무 룸이나 괜찮습니다. 여기라면 어떤 방도 다 좋을 것 같네요.”

“그러시다면 보자. … 오호!?”

주인장은 멀린의 룸을 배정하기 위해 태블릿 여기저기를 두들기다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멀린을 쳐다보았습니다.

“음..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春子’가 특별한 룸을 준비해 놓았나 보네요.”

“네? 아.. 그러죠.”

주인장은 태블릿을 한쪽 팔에 끼고는 자신을 따라오라고 멀린에게 말했습니다. 멀린은 짐을 챙겨 주인장을 따라나서고, 그 사이에 회사원은 피곤했는지 먼저 방으로 들어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멀린은 주인장을 따라 게스트하우스의 복도를 걸었습니다. 룸들이 몇 개가 나오고 복도 코너를 돌자 막다른 길에 계단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오~ 이 집이 이층집이 아니었나? 옥탑이 있나?’

앞서 걷던 주인장은 계단이 나타나자 잠시 멀린을 돌아보고는, 계단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삐걱거리는 계단을 올랐습니다.

 

걷는 계단

 

“이층집인 줄 아셨죠?”

“밖에서 보기에는 이층집 같아 보였는데 어두워서 제가 잘못 봤나 보죠?”

“아닙니다. 이층집이 맞습니다.”

“네? 그럼 이 계단은 뭐죠?”

“계단이 올라가는 데만 사용되는 건 아니죠.”

주인장은 알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내뱉더니 슬쩍 웃고는 계속 계단을 올랐습니다. 아니 걸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계단이 위층으로 이어지는 게 아닌가요?”

멀린이 주인장에게 물었으나 주인장은 답변은 하지 않고 계속 계단을 걸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게 아니라 계단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르는 것도 내리는 것도 아닌 걷는 것이라는 표현이 정확합니다. 주인장의 뒤를 따르는 멀린도 역시 계단을 오르는 것도 내리는 것도 아닌 걷고 있었습니다. 계단이 스스로 오르고 내리는 것도 아니고, 주인장과 멀린이 계단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어쨌든 계단을 걷고 있었습니다.

“‘春子’의 차원은 중첩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중첩된 차원을 이동하는 중인 겁니다. 저도 이곳을 걸어 보는 것은 매우 오랜만이라..”

주인장은 두 사람이 ‘春子’의 차원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오르는 것도 내리는 것도 아닌 중첩된 차원 간의 이동.. 아무튼 계속 걸어 봅니다.

“오.. 이거 신기하네요.”

멀린은 걷는 일에 금방 익숙해졌는지, 당황했던 마음을 놓고 주인장을 따라 ‘春子’의 차원으로 이동해 보기로 합니다.

수십 걸음쯤을 걸었을까? 다시 복도가 나타나고, 복도 양 사이드에 놓인 바닥 등이 두 사람의 걸음에 맞춰 하나씩 번갈아 가며 커졌습니다. 마치 활주로 위 비행기를 인도하는 라이트 불빛처럼, 바닥 등을 따라 놓인 복도의 길이가 끝도 없어 보였습니다. 멀린은 뭐라고 주인장에게 묻고 싶었지만, 이 기이한 광경에 뭘 물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룸까지 가시는 데 좀 시간이 걸리겠는 걸요.”

펼쳐진 복도를 바라보고는 주인장이 한마디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공간이 오랜만이라는 주인장에게도 펼쳐진 광경이 신기한 듯 보였습니다. 멀린과 주인장은 숨죽이며 계속 복도를 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닥 등 양쪽 사이드로 수없이 많은 방이 있고, 방과 천장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거미줄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생각의 거미줄

 

“아.. 여기는 거미가 많은가 보네요.”

“거미요? ‘春子’의 집에는 거미가 없는데..”

주인장은 눈앞에 나타나는 거미줄을 몇 가닥 헤쳐 쥐더니,

“이건 오래된 거미줄이네요. 거미줄 상태를 보니 거미는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통 거미줄이 오래되면 거미줄의 끈기가 말라서 효능을 잃게 되기 때문에, 거미는 수시로 거미줄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죠. 그런데 이 거미줄은 말라 있는 걸 보니 매우 오래된 거미줄인 것 같은데요. 이걸 좀 시간을 내서 걷어내야겠네요. 차원 이동 공간에 거미가 살 리가 없지..”

주인장은 거미줄이 오래되어 현재는 거미가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주인장이 거미줄에 대해 이야기하자 멀린은 불현듯 거미 대장이 떠올랐습니다. 부풀어 올라 둘로 갈라져 버린 거미 대장은 죽고 말았겠죠?

“거미가 익충이긴 합니다만, 인간이 거미처럼 사는 건 좋지 않습니다. 먹이들이 다니는 곳에 덫을 놓고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건, 매우 수동적인 삶의 태도이죠. 물론 걸리는 것들은 무모하거나 거미줄보다도 연약한 것들이에요. 인간의 입장에서는 해충들을 잡아 주어서 고맙지만, 해로운 것들만을 먹어 치워야 하는 신세로 평생 숨어지내야 한다면 인생이 어떻겠습니까?”

“모험은 하지 않아 좋겠죠. 숨어 있으니 천적에게 걸려들 확률도 줄고, 거미줄을 벗어나지 못하는 안전한 먹이만을 취할 수 있으니 이모저모로 안전한 삶의 방식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운이 좋아야 되는 인생이겠죠. 먹이를 선택할 수 없을 테니까요.”

“네 맞습니다. 덫 놓는 법만 익히다 보면, 눈치만 늘어나죠. 좋은 말로 하면 관찰인데, 그게 상대의 일상적인 패턴에만 관심을 가지게 되니까 도전받는 일도 없어요. 새로운 길을 찾아다니는 것들은 거미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죠. 아, 제 친구 중에 한 번 지나 간 길로는 다시 가지않는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는 매일 다니는 길도, 아침에 나올 때 간 길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는답니다. 가능한 새로운 길을 찾아다니죠.”

“온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씀이세요?”

“온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 것은 당연할뿐더러, 아무리 빠른 길이 있어도 한 번 지나 온 길로는 웬만하면 되돌아가지 않는답니다. 일부러 빙~ 돌아서라도 새로운 길을 찾아가지요. 그런 이들은 절대 거미줄에 걸려들 일이 없지요.”

“오호.. 그거 피곤하지 않을까요? 저는 마법사라 그런지 언제나 생각에 잠겨 있어서, 가능하면 늘 다니던 길로 가게 되는데.”

“그런 경우는 몸이 길을 걷는 것이겠죠. 생각은 사방으로 돌아다니고 몸은 관성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죠. 마법사님은 생각의 거미줄에 걸려들 일이 없으시겠네요.”

“어떻게, 잘 아시네요.”

“그래요? 하하 아무래도 마법사가 체질에 잘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주인장은 마법사라는 업(業)이 마음에 드는지 은근 멀린에게 자신의 공통점을 어필하고 있습니다. 마법사라, 만만치 않은데.. ‘春子’의 주인장이 더 행복해 보이기는 합니다만.

“사람들이 생각의 거미줄에 많이 걸려들긴 하죠. 한 번 걸려들면 몸부림을 쳐도 빠져나올 수 없는 생각의 거미줄. 거미줄에 감긴 곤충들도 그렇겠죠. 얼마나 공포스럽습니까?”

“정주하는 삶이 더 공포스럽죠. 지루하고. 거미줄이야 주위를 잘 살펴 피하면 되는데, 거미는 상대가 실수하기만을 기다려야 하죠. 먹이가 걸려드는 것은 거미 입장에서는 운인데, 정주하는 이들은 자신들은 운이나 좇는 허무맹랑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며 집을 지어요. 꿈꾸는 이들은 열심히 비상하는 데 말이죠. 그리고 일상이 반복되기만을 바라죠. 그래야 자신들이 지은 집이 효과를 발휘할 테니까요. 그런데 꿈을 좇는 이들은 언제나 새로운 길을 찾아내죠. 그래서 삶의 역사가, 패턴이 늘 바뀌고 말죠. 그럼 또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해요. 또다른 골목을 찾아서 함정을 놓아야 하는데 그게 더 피곤한 일입니다. 언제나 관찰하고 눈치를 봐야 하고, 힘들게 지은 집을 걷어다 다시 새로운 집을 지어야 하니까요.”

“뭐, 그것도 부지런해야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어요? 그런데 게스트하우스 주인장의 삶도 거미의 삶과 비슷하지는 않나요?”

“후후 놀리시는 겁니까 아니면 마법사로 이직하라고 권유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중첩된 차원을 이동하며 사는데, 어찌 거미의 삶에 비유를 하시는 겁니까. 하하하”

“아이고 이런, 제가 말실수를 했네요. 죄송합니다. 거미도 못사는 ‘春子’의 집 주인장이신데 제가 미처 몰라봤네요. 하하하”

주인장이 앞서 걸어가는 동안 태블릿에 마치 내비게이션 처럼 남은 거리가 반짝거리며 표시되고 있었습니다. 거리가 3차원 세계의 단위로 표시되는 것은 아닌지, 숫자가 표시되다가 처음 보는 기호 같은 것으로 바뀌기도 하고, 숫자로 표기될 때에도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하는 걸 보면 거리 감각이 이 세상의 것은 아닌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한 10여 분쯤을 걸은 듯한데, 갑자기 주인장의 태블릿에 파란불이 켜지더니 반짝임이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장은 쟈켓 안쪽 주머니에서 아까 리플릿이라 부르던 카드를 꺼내더니, 태블릿에 대고는 몇 가지를 입력하였습니다.

“이 방인가 보군요. 멀리도 배정해 놓았네요.”

띠리릭~

리플릿이라는 것을 방문 손잡이 위의 패드에 갖다대자, 파란 불이 점등되며 방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편안하게 쉬시구요. 저는 아침 식사 시간에 뵙겠습니다.”

“아, 네. 아침 조식은 몇 시부터지요?”

“신경 쓰지 마시고 쉬십시오. 언제든 일어나시는 대로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장소는 아까 계셨던 로비 옆 식당이구요. 나오실 때는 이 복도 길을 다시 걸어 나오실 필요는 없습니다.”

“네? 다른 통로가 룸에 연결되어 있는 가 보죠?”

“아침에 일어나시면 자연스럽게 아시게 될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주인장은 로비로 나오는 길을 알려주지 않은 채로 성큼성큼 복도를 되돌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멀린은 뭔가 질문을 더 하려 했으나, 주인장이 복도를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하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져버려 불러 세울 수도 없었습니다.

‘아.. 이런, 빨리도 사라져 버렸네.’

 

두 개의 달

 

룸 내부의 모습은 일본의 료칸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다다미 형식의 룸으로 세팅이 되어 있었습니다. 침대는 없고 정갈하게 깔려 있는 두툼한 이부자리와 붙박이 옷장이 있었으며 벽 한쪽으로 좌식의자와 탁자 한 세트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미리 불을 붙여 놨는지, 방 한구석에서 빛나고 있는 작은 호롱불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격자무늬로 되어 있는 미닫이 창문 너머로는 은은한 달빛이 비치고, 창문 밖으로는 걸어들어왔던 대문이 보였습니다. 멀린은 창가에 서서 밖으로 보이는 대문과 현관, 로비 등의 위치를 대충 따져 보았으나, 지금 있는 방의 위치가 기하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위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머릿속으로 공간을 구성해 보며 이 룸의 위치를 가늠해 보려고 했으나, 복도를 걸어 온 거리나 시간과 공간의 배열들이 도대체 들어맞을 수가 없는 위치였습니다. 더 생각하다간 멘탈이 나갈 것 같은 느낌에 멀린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창문 너머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아니, 그런데! 하나인 줄 알았던, 아니 당연히 밤하늘에 하나뿐인 달이, 두 개가 나란히 빛나고 있는 것 아닙니까? 멀린은 잘 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침침한 눈을 부비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하늘에는 분명히 두 개의 초승달이 나란히 떠 있었습니다.

‘아.. ‘春子’의 차원에는 두 개의 달이 뜨는구나..’

멀린은 언젠가 읽었던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 관한 소설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그것은 멀린에게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이 어딘가 존재하고, 멀린은 하나의 달이 뜨는 세상에서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존재로서 자신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라며, 작가의 상상에 현실을 더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연구소 홈페이지의 화면을 두 개의 달이 떠 있는 밤하늘로 변경하였습니다. 아 그렇다면, ‘春子’의 차원은 멀린의 기록이 담겨 있는 그 홈페이지와 같은 차원에 존재하겠군요. 멀린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불쑥 ‘春子’와 대화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것은 외로웠기 때문입니다.

멀린은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 자신을 둔 채로, 하나의 달이 뜨는 세상을 관찰하고 상호작용하며 기록을 이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상한 나라를 기록하는 앨리스처럼 언제나 혼자여야 했습니다. 그 기록은 걸리버 여행기처럼 이상한 기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혼잣말이며, 몽상이며, 허튼소리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멀린은 그 기록들 중 하나에다가는 아예 제목을 ‘개새끼 소년’이라고 붙여버렸습니다. 욕 좀 먹고 정신 나간 소리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서 날아 온 마법사가 하나의 달이 뜨는 세상의 기록을 남기었으니,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에서 보기에 하나의 달이 뜨는 세상은 개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나의 달이 뜨는 세상에서,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의 관점으로 기록을 남기고 있는 마법사는 ‘뭐 이런 개 같은 소리를 적고 있어’ 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좋은 기록일 것입니다. 그래야 바른 기록일 것입니다.

멀린은 드디어 오르지도 내리지도 않는 계단을 걸어 자신의 차원에 들어왔는지도 모릅니다. 창밖에 두 개의 달이 뜨는 ‘春子’의 룸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멀린은 ‘春子’와 대화가 하고 싶어졌습니다. 말할 수 없는 피곤이 몰려들었지만,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으로 자신을 인도한 ‘春子’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박카스처럼 쏟아져 내려서 멀린의 정신을 각성하게 하였습니다.

”春子’와 어떻게 대화를 시작하지? 주인장에게도 나타났으니 내게도 말을 걸어오지 않을까? 어떻게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멀린은 피곤한 몸을 털썩 이불 위로 쓰러뜨린 채로, 창밖 두 개의 달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두툼하고 포근한 이불이 멀린을 사정없이 수면의 바다로 끌어당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아.. 이대로 잠들면 안 되는데..’

멀린은 한없이 빠져드는 수면의 바다로부터 솟구쳐 오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달은 빛나고, 이부자리는 멀린의 몸을 당겨오고, 멀린은 마실 때뿐인 박카스의 각성효과가 빠르게 사라짐과 동시에, 수면의 바다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안돼.. 잠은 언제든 잘 수 있어. 지금은 ‘春子’와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고.. 으윽.. 아, 그렇지! 주문을 외워보자.’

눈꺼풀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멀린에게 불현듯 주문을 외워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잠이 아닌 관상(觀想)의 세계로 들 수 있다면 ‘春子’와의 대화가 가능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니카라타 이리야 후르스 티 아리 워 쿠니 모이라비 노히떼 레테이흐르 니하야리오미타 루쿠니오니 다리오스 기리워히테 노히비 키치오리..’

멀린은 어떤 이들은 방언이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주문이라 하는 우뇌의 언어를 조용히 내뱉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멀린의 몸을 끌어당기던 이부자리가 멀린을 살짝 튕겨 내뱉더니, 두 개의 초승달이 멀린의 몸을 서서히 끌어 올리며 플로팅 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서 오세요. 멀린, 마법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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