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의 별

+ 게스트하우스 ‘春子’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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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하루카 열차

 

“여보세요! 저기요, 일어나 보세요. 여보세요… 한국분이시죠?”

“네? 네.. 아, 네..”

누군가 멀린을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멀린은 화들짝 놀라 눈을 뜹니다.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는 실내등 불빛에 눈이 부셔 사방을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어렴풋 시야에 들어오는 건 기차 객실의 모습. 아.. 여긴 교토행 하루카 열차입니다. 잠이 들었던 걸까요? 멀린의 온몸이 땀에 젖어 있고 둘러메고 있던 가방끈은 목에 칭칭 감겨 있습니다.

“에어컨이 고장 났나 봐요. 오사카를 지나면서부터 저러더니 결국 교토에 도착할 때까지 작동을 제대로 안 하네요. 그런데 어디 불편하세요? 일어나셔야 돼요. 교토역에 다 왔어요.”

“아, 네.. 그렇군요. 교토에.. 교토에 다 왔나요?”

“네, 지금 플랫폼에 들어서고 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요? 멀린은 어리둥절한 채로 힘들게 몸을 일으켜, 좌석에 기대 주변을 둘러봅니다. 지금 멀린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뒤쪽 좌석에서 잠들어 있던 회사원이 아닌가요? 그런데 얼굴이 어디서 본 듯합니다.

“아.. 한국분이신가요?”

“네?”

“아니, 한국말을 하시길래..”

“아.. 네.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교토는 처음이신가요?”

“아니요. 처음은 아닙니다만..”

“역에 도착했으니 일단 내리시죠.”

교토행 하루카 열차는 역사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멀린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 회사원의 얼굴을 기억해 내지 못한 채, 일단 짐을 주섬주섬 챙겨 열차를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플랫폼에 내려서자 탑승구 일대가 복잡합니다. 열차의 에어컨이 작동을 하지 않았다더니, 승객들이 항의를 하는가 봅니다. 분지인 교토의 여름은 살인적인 더위로 유명합니다. 한밤중임에도 체감온도는 30도를 넘는 듯합니다. 이렇게 더운데 에어컨이 나오지 않았으니 승객들이 열 받을 만 합니다. 탑승구 앞에서는 열차 기관사로 보이는 이가 화가 난 승객들에게 열심히 뭐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듯한데, 일본어라 멀린은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기관사의 얼굴도 어디서 본 듯합니다.

’가만.. 저 사람 찰스 아닌가?’

승객들에 둘러싸여 손짓과 발짓을 섞어 열변을 토하고 있는 기관사의 모습이, 키가 작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길렀으며, 산타할아버지처럼 배가 불쑥 나온 찰스의 모습과 너무 닮아 있었습니다. 멀린은 확인해보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서려고 하던 순간, 아까 그 회사원이 뒤에서 덥석 손목을 잡고 잡아끄는 것이었습니다.

“어서 빨리 빠져나가시죠. 여기는 좀 위험합니다.”

“네? 위험하다구요? 뭐가요?”

멀린이 묻는 말에 회사원은 가타부타 답변도 없이, 멀린을 홱 잡아끌고는 빠른 걸음으로 개찰구를 빠져나갑니다. 그 사이 멀린과 회사원 곁을 회색 제복을 입은 보안요원들이 스쳐 지나가고, 멀린이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보자, 찰스처럼 보였던 기관사는 멀린과 잠시 눈을 마주치고는 빙긋이 웃더니, 승객들 속으로 몸을 감추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멀린은 순식간에 일어난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스럽고 영문을 모르겠는 채로 역광장에까지 회사원을 따라 나와 버렸습니다.

“아니, 저기요. 잠깐만요. 지금 어디를 가시는 거죠? 이 손 좀 놓고.. 얘기 좀 하시죠.”

“아, 네. 이제 정신이 좀 드십니까?”

“네? 정신이요? 뭐 아직 어리둥절하긴 하지만, 그런데 누구시죠? 한국분이세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신데.. 절 아시나요?”

“아, 아닙니다. 객실에 에어컨이 고장 나서 계속 열차가 뜨거워졌거든요. 저도 졸고 있다 더워서 깼는데, 열차에서 안내방송도 없고, 중간에 내릴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쪽에서 잠꼬대를 심하게 하시길래.. 아, 한국말로 말이에요. 그래서 한국분이신 걸 알았습니다. 도착할 때가 되었는데도 못 일어나시길래 깨워드린 거구요.”

“아. 네 그렇군요. 어쨌든 챙겨주신 건 감사합니다만, 그런데 저 혹시 이름이 남준?”

멀린은 알쏭달쏭했던 그의 얼굴을 기억해 냈습니다. 동편 마법사 남준. 그의 얼굴이 마치 동편 마법사 남준의 얼굴을 닮았기에,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정체불명의 회사원

 

“아, 전 한국인이 아닙니다. 한류의 팬이라 한국말을 배웠을 뿐이에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실례했습니다. 아무튼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까 승차장에서는 뭐가 위험하다는 건지..”

“아.. 그건 뭐 요즘 한일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니까요. 극우세력들을 좀 조심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분들은 주의를 잘 기울이지 않으시는 편이라.. 별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숙소는 예약하셨나요?”

“숙소 요? 급하게 오느라 숙소는 미리 예약을 못했습니다. 교토에 오면 항상 가는 호텔이 있기는 한데 빈 객실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요즘에는 호텔 객실 구하기가 쉽지 않던데..”

“아, 마츠리 기간이라 그럴 거예요. 그렇다면 제가 숙소를 소개시켜 드려도 될까요? 고급은 아니지만, 꽤 쾌적하고 편안한 숙소가 있답니다.”

“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그런데 여기서 먼가요?”

멀린은 남준 마법사를 닮은 이 회사원의 소개를 받아보기로 합니다. 그러고 보니 직관의 령을 따라 급하게 떠나온 교토라, 항공편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준비도 해온 것이 없었습니다. 숙소도 평소에 교토에 오면 묶는 호텔이 있었지만, 일단 도착해서 찾아보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급하게 떠나온 터입니다. 그런데 7월에는 교토 마츠리라는 대규모 행사가 열리는 기간이라, 숙소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기는 합니다. 본인이 아니라고 하니, 그가 남준 마법사일 리는 없겠으나, 이제까지 보여준 것이 호의라면 소개해주는 숙소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일단 따라나서 보기로 하는 것입니다.

회사원은 멀린을 이끌고 택시를 잡아타더니, 운전기사에게 일본말로 숙소 이름을 얘기합니다. 택시기사는 처음에는 잘 못 들은 것처럼 재차 묻더니, 이내 아~ 거기 하는 표정으로 운전대를 꺾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수상하게도 택시 운전기사는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습니다.

“아.. 일본은 택시 요금이 좀 비싸던데..”

멀린은 덥석 택시를 잡아버린 회사원에게 좀 부담스러운 듯이 넌지시 물었습니다. 평상시의 멀린이라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여행 중에 굳이 택시를 잡아타지는 않습니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현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현지인의 일상을 경험할 수 있는 여행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밤도 늦은 터라 대중교통도 모두 끊어졌을 시간이기는 합니다.

“네, 좀 그렇죠. 걱정 마세요. 제가 법인카드로 결제할 테니까요.”

“네? 아니 그건 좀.. 제가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네요.”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게 다 제 임무이니까요.”

“네? 임무라구요? 무슨 임무…”

“아, 그러니까..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아무튼 멀린님은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제 이름은 어떻게 아셨죠?”

“아.. 그게 저기.. 예약하신 그 승차권, 승차권 영수증을 떨어뜨리셨더라구요. 아.. 여기, 여기 있네요. 이걸 제가 객실 통로에서 주웠거든요.”

회사원은 좀 당황한 듯 주섬주섬 서류 가방을 뒤적이더니, 예약자 이름에 멀린이라고 적힌 하루카열차 예약 영수증을 내밀었습니다.

“아.. 이걸 제가 떨어뜨렸군요. 후후 이거 사실 제가 슬쩍 버린건대.. 한국 사람들은 영수증을 잘 챙기지 않거든요.”

“네 그런 것 같더군요. 일본인들은 이런 것 하나도 꼼꼼하게 챙기는 편입니다. 습관 때문에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제가 멀린님의 영수증을 일부러 훔치려고 한 건 아닙니다.”

“아.. 그럼요. 무슨 말씀을.. 그런 오해는 일절 하지 않고 있습니다.”

멀린은 이 알 듯 모를 듯한 상황에 일단 적응해 보기로 합니다. 직관을 따라 떠나온 상황이니, 펼쳐지는 모든 상황 역시 이미 기록된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일관성을 잃지 않는 행동이라 생각해 봅니다.

택시는 정적에 빠진 한밤중의 교토를 빠르게 헤치고 나가 어딘지 모를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여름밤의 정적에 빠진 교토의 도로는 적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회사원은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궁금한 게 많은지 질문 공세를 계속 퍼붓습니다. 멀린도, 이 누군지 모를 회사원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더군다나 프라이버시를 중시하는 일본인에게(그의 국적은 아직 알 수가 없지만), 개인신상에 관해 묻는 것이 실례 일 듯해 참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여전히 한류는 인기가 많은가요?”

“한일관계가 복잡해도 사람들의 정서는 막을 수가 없지요. 일본인들의 한류 사랑은 여전히 대단하답니다. 대놓고 즐기지 못할 뿐이지.”

“그렇군요. 참으로 문화의 힘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디 회사 출장을 다녀오시는 중이신가 보죠?”

“아.. 아닙니다. 저는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가 좀 복장이.. 회사원 같죠?”

“아, 뭐 꼭 그런 건 아니고 서류 가방을 들고 계시길래, 출장을 다녀오시는 중이신가 했습니다. 혹 그러시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멀린님은 마법사입니까?”

“네? 아.. 그게 뭐 ..”

 

여우의 자손들, 별의 후예들

 

멀린은 슬쩍 회사원의 직업을 물어보려다 역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멀린이 마법사인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왜, 제가 마법사라고 생각하시죠?”

“아.. 그거야 멀린이라는 이름을 보고, 그냥 추측해 봤습니다. 멀린은 마법사 아닌가요? 어디였더라? 영국인가?”

“아, 네.. 그렇죠. 네 맞습니다. 그건 닉네임이긴 한데, 제 직업이기도 하죠.”

“네? 마법사라구요. 아 정말 마법사시구나. 한국에는 마법사가 직업인 사람들이 있나 보죠?”

“글쎄요? 저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왜 그런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리면 100명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그중 10명은 그걸 글로 쓰고 있고, 그중 한 두명은 이미 그걸 시도하고 있다고.. 제가 마법사라면 100명쯤은 자신을 마법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네 그렇겠네요. 그럼 여기 일본에도 100명쯤은 마법사가 있겠군요.”

“뭐, 그럴 수도..”

“아! 맞아요. 여기 교토에 마법사의 사원이 있긴 합니다. ‘아베노 세이메이’라고 헤이안 시대의 음양사가 있습니다.”

“그래요? 음양사라구요? 음양사라니, 그건 마법사가 맞네요.”

“네, 아주 유명한 실존 인물이에요. 그 무슨 만화, 애니메이션에 음양사 캐릭터로 자주 등장하는데, 아마, 어머니가 여우라고 하죠?”

“오~ 여우요? 전설 속 멀린은 악마, 몽마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네, 세이메이의 아버지가 위험에 빠진 여우를 구해줬는데, 그 여우가 인간으로 변신하여 결혼한 뒤 세이메이를 낳았다고 해요. 그러다 여우인 사실이 드러나자, 자신의 능력을 세이메이에게 모두 전해주고 떠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인지 세이메이는 어려서부터 음양도뿐만 아니라 천문학에 능했다고 해요. 그래서 황실에 채용되어 천문관으로 관직을 지냈는데, 천황의 병을 주술로 낫게 하기도 하고, 가뭄이 심할 때는 기우제를 지내 비를 내리게 하기도 했다더군요. 그래서 고위 관료로 대접을 받았는데 그 가문이 대대로 천문관을 이어받아 활동하다가, 막부시절에는 막부와 결탁하여 ‘츠치미카도 가문’을 세우고 전국의 모든 음양사들을 통솔했다고 하더군요. 지금도 활동을 한다는데, 그 뭐더라.. 신도와 결합한 무슨 종교단체를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아.. 10세기의 가문이 아직도 활동을 한다구요? 대단하네요. 10세기라.. 그러고 보니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는 강감찬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그 강감찬 장군도 여우의 후손이라는 전설이 있지요. 이거 참 묘한 인연이군요. 그 강감찬 장군이 죽을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해서, 그곳을 낙성대(落星垈)라 부르고 있죠. 강감찬 장군은 태어날 때도 별이 떨어져서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생겼는데, 이 문곡성이 뭐냐하면 음양가에서 길흉을 점칠 때 쓰는 9개의 별 중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이라고 해요.”

“오호~ 그래요? 세이메이도 수학에 능해서 재상의 임무도 맡았다고 하던데, 희한한 공통점이네요.”

“후후 설화에 따르면 강감찬 장군은 부모가 아이를 갖지 못해서 밤낮으로 빌었는데, 어느 날 아버지의 꿈에 선녀가 나타나서 100명의 여자와 잠자리를 하되, 사정을 하지 않으면 위대한 인물이 태어날 거라고 했다고 해요. 그래서 강감찬 장군의 아버지가 몇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자와 관계를 하고, 마침내 100번째 여자를 만났는데 그게 사람으로 둔갑한 여우였던 거죠. 여우라 홀렸는지 이 아버지가 깜빡하고 사정을 해버린 거예요. 그래서 선녀의 예언이 물거품이 되나 했는데, 열달 뒤에 집 앞에 웬 아이가 버려져 있었대요. 그 아이가 강감찬 장군이 된 거죠.”

“허 참.. 1번을 못 참고.. 여우긴 여우였나 보네요. 그런데 100번을 채웠으면 장군이 아니라 왕이 될 수도 있었겠는데요?”

“그러게요. 장군의 아버지가 고려의 개국공신이었으니, 강감찬이 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네요. 참 이상하죠? 두 사람의 공통점이 이렇게 많으니, 같은 인물이 아니었을까요? 생존시기마저 비슷하니. 마법사들은 이런 걸 나툼이라고 하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세이메이에 대해선 어떻게 그리 자세히 아시죠?”

“아, 그거야 제가 음양.. 아니 저.. 교토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답니다. 아 여기도 붙어 있네. 여기 보세요. 이 앞 유리창 하단에 스티커가 붙어 있죠. 오방성 스티커 말이에요. 이게 교토의 버스와 택시, 승용차에는 대부분 붙어 있는 부적이랍니다. 교통사고로부터 보호해 준다고 하거든요.”

회사원이 가리키는 택시 앞 유리창 하단에는 별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습니다. 교토의 교통수단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스티커였습니다.

“아, 저거. 저 별이 세이메이의 오방성이군요. 저거 교토 버스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저게 그거였구나.”

“네 교토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적이죠.”

멀린은 오방성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오각별은 마법사의 상징이기도 하고 멀린의 문장이기도 하니까요. 멀린의 문장에는 오각별에 휘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성취와 도전의 상징으로서의 휘장이 말이죠. 강감찬의 묘곡성과 세이메이의 오방성, 그리고 멀린의 휘장을 두른 오각별 문장이 모두 이상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강감찬 장군의 낙성대는 자주 가는 곳이니, 멀린은 세이메이 사원에 꼭 가보고 싶어졌습니다. 가능하다면 시간을 내서 이번 여행 기간에 들러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세이메이 사원이 먼 가요?”

“아닙니다. 교토 중심부에서 멀지 않아요. 왜요? 가보시려구요?”

“네. 꼭 한번 들려봐야겠어요.”

“네, 그러세요. 좋은 곳이죠.”

멀린과 회사원이 세이메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어느새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차 문을 열자, 밤이어도 여전히 후끈하고 습한 교토의 여름, 밤 공기가 멀린을 훅 덮쳐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멀린은 에어컨이 고장난 기차에서부터 무척 많은 땀을 흘렸습니다. 택시에서 내리다 말고 슬쩍 현기증이 밀려오는 걸 보니, 몸이 많이 지쳐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한편으로 멀린은 지금까지의 상황을 도통 이해하기가 어려워, 혹 무언가에 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게다가 세이메이가 여우의 후손이라고 하니, 같이 타고 온 정체 모를 회사원과 한밤중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택시 운전수의 인상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오리무중,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어제 하루카 열차에 올라탄 순간부터 지금까지, 멀린은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수고하셨습니다. 여기서 좀 걸으면 제가 소개해 드릴 숙소가 나옵니다. 골목이 좁아, 숙소 바로 앞까지 택시가 들어갈 수 없거든요. 괜찮으시면 좀 걸으실까요?”

“아.. 네. 초면에 신세를 너무 많이 지는 것 같군요.”

“별 말씀을.. 저를 따라오시죠.”

회사원은 자신이 말한 대로 택시비를 직접 지불했습니다. 법인카드로 말입니다. 회사원이 택시 요금을 결제하는 동안 슬쩍 보니, 카드에 일본어로 회사명이 적혀있는 듯한데, 뭐라고 적혀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검은 바탕에 금색 테두리가 둘린 카드가 매우 고급스러워 보이긴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을 철저하게 구분한다는 데, 법인카드로 택시비를 지불하는 게 멀린에게는 미심쩍게 보였습니다. 회사원의 ‘이것도 임무’라는 말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택시 운전기사는 왜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걸까요?”

“아.. 그건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네? 맹인, 아니 시각장애인이라구요?”

“네 아마도.. 그러니까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았겠어요?”

“아니 앞이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택시를 운전하죠?”

“멀린님은 마법사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미래가 보이시나요?”

“아니 그건.. 미래를 눈으로 보는 건 아니지만, 그것은 미래기억으로 떠오르죠. 하지만 택시는 눈으로 보고 운전을 해야 하는 거잖아요.”

“글쎄요. 미래기억을 쫓는 법을 아신다면, 눈으로 앞을 보지 못해도 얼마든지 운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아.. 뭐, 그건 그렇습니다만..”

택시는 일본식 옛 전통가옥이 가득한 마을 초입에 멀린과 회사원을 내려놓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멀어져가는 택시 빽미러 속에서, 택시기사의 선글라스가 반짝하고 빛이 나더니,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라져 버렸습니다. 멀린은 회사원을 따라, 거리 한쪽으로 흐르는 작은 냇길을 걸었습니다. 한밤의 교토의 전통거리가 꽤 한적하고 고즈넉하게 느껴졌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택시기사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거리가 너무 조용하여 소리를 내기가 민망한 지경이어서, 일단 다음 기회를 기약하기로 합니다. 회사원은 냇길을 따라 걷다가 작은 다리를 건너 골목으로 접어들더니, 어느 전통 가옥의 대문 앞에 섰습니다. 가옥의 대문 처마에는 밤을 밝히는 초롱이 매달려 있고, 초롱에는 한자로 ‘春子’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문 기둥에는 나름 멋을 부려 쓴 필기체 영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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