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마이 페이보릿 인 서울

[CITY 100] Jan 17, 2022 l M.멀린

 

 

그곳마저 문을 닫는다. 그곳마저..

그곳마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은 조금 절망적이다. 소중한 추억이 중요한 만남들이 생각들이 살고 있던 곳인데. 창문 너머로 비쳐오던 서울의 햇살이 따뜻하던 곳인데.

언젠가 언급했던 합정역 그 카페는 [스팀시티]의 역사에도 중요한 곳인데 이제 그곳마저 문을 닫는단다. 코로나 시국에 문을 닫는 곳들이 부지기수니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인데, 애정하던 곳들이 사라지는 일은 마치 이별 선고를 받은 연인처럼 당혹스럽고, 전장에서 함께 싸우던 전우들이 총탄에 픽픽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절망적이며, 친구들을 하나둘 먼저 떠나보내는 노인의 마음처럼 허망하다. 그리고 다음은 나의 차례인가.

떠돌이 마법사의 삶에 집 없이 살아 온 세월이 오래라, 게다가 반복되는 만남과 중단의 삶이 연속되어 온지라, 어쩌면 마음 붙일 곳은 영원할 것 같던 그곳들뿐이었을지도. 50년, 100년이 지나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내게 커피를 내어줄 것 같던 그 카페들.

한국에 유난히 카페가 많은 건 집 한 칸 없이 떠돌이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이 마음 붙일만한 유일한 공간이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곳들은 서재이기도 작업실이기도 사랑방이기도 하고 ‘차 한잔할래?’, ‘배는 고프지 않니?’ 물어와 주는 어머니 같기도 하다. 몸을 누이면 집이라고 할만한 공간의 머리와 발치가 모두 닿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만의 공간을 허락하는 도시 생활에서. 비록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마치 내 집 안마당과 거실을 내어 준 듯 바라볼 수 있는 그곳들은 어쩌면 도시 서민들의 유일한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곳들이 자꾸 문을 닫는다. 하나둘 픽픽 쓰러져 간다. 사라지는 그곳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단단하던 유빙들이 자꾸 녹아 없어져 발 디딜 곳이 사라져가는 북극곰의 마음이 된 듯하다.

돌아갈 집이 없는 여행자는 방랑자일 뿐이다. 그리고 집은 이제 Home이 아니다. 마음과 마음을 교류하는 일은 누구와도 할 수 있고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넘나들며 언제든 할 수 있지만, 물리적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에 구속되어 있는 그곳들은 낡아질지언정 영원할 것 같기만 한데, 우리는 그것들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계절을 살고 있다. 이 시대 도시 서민들에게 간절한 그곳은 Home이 아닌 House가 된 지 오래고 그래서 수많은 이들이 그곳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있는지 모른다. 친구와 가족까지 단절해가며 그곳을 얻으려 사활을 걸고 있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음 붙일 곳이 그곳뿐이니. 맞아주는 곳이 그곳뿐이니.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 줄 것은 같은 그곳.

사람들은 집은 House가 아니라 Home이어야 한다고 하지만, Home은 House 위에 세워지고 House 안에서 보호받는다. 변화무쌍한 자연과 세월의 변화 앞에 House 없이는 Home이 버텨낼 재간이 없다.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가족. 가족이 가족 되게 하는 힘은 House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매일 치고받더라도 House 안에서는,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갈등을 감내하고 넘어설 수 있다. 성장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그러나 광활한 대지를 내 집인 양 외쳐도 홀로 남겨진 곳에서 즐거운 우리 집을 노래할 수는 없다. 그래서 대대로 어른들은 House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써오지 않았던가.

개성이 넘치고 다양성이 확대될수록 함께 사는 일은 어려워져만 간다. 한 사람에게 필요한 사적 공간의 넓이가 25평이라고 했던가? 4인 가족이면 도대체 얼만가? 하지만 이전의 우리들 터전에는 마당도 있고 다락방도 있고,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저녁때뿐이니 우리는 이렇게 저렇게 그 공간을 확보하고 살았던 거다. 그러나 이제는 닭장 같은 공간에 몸을 우겨넣으려니 가족은 나 혼자뿐이다. 불편하지만 그렇다고 개선의 여지도 보이지 않는 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서 최적화된 공간을 경험할 순 없을까? 그곳들의 인기는 그것으로부터 기인한다. 눈치 주지 않으며 전기 콘센트를 마음껏 쓸 수 있는 곳. 그리고 매일 어디든 가깝게 찾아갈 수 있는, 21세기 청춘들의 House, 집. 21세기의 공동체는 그곳들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다.

방랑자이고 싶지 않은 마법사의 여행 루틴 중 하나는 이동하는 숙소마다 공간을 일정한 규칙으로 최적화하는 일이다. 숙소가 바뀌어도 손에 닿는 그것들이 일정한 위치와 동선에 있을 수 있다면 이곳은 내 집이라고, 눈감고 손을 뻗으면 필요한 것들이 그곳에 있으니 여기는 내 집이라고 편히 눈을 감을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애정하는 카페를 찾는 일이다. 스위트룸에 묵지 않는 이상 장기 여행자의 숙소 공간은 빤하니 거실과 서재는 따로 구축을 해야 한다. 이 도시에 마음에 드는 그곳을 찾는 일은 숙소를 최적화한 뒤, 의자나 쇼파, 침대에 파묻혀 제일 먼저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내 집은 표시해주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그곳들은 현실처럼 구현해 놓은 가상공간의 각종 map들과 친절한 리뷰들 덕분에 이 도시에 애정할 그곳의 후보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리고 도시에서의 첫 일정은 물론 그 중 첫번째 후보지에서 시작된다. 여행지의 이별은 그곳을 두고 떠나오는 일이다. 그리워하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 생활의 종지부를 언제 끊게 될까. 이생은 이것으로 계속 방랑자의 삶을 이어가야 할까.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지만 대신 더욱 그곳들을 찾아 나서겠지. 손에 쥐어지지 않는 그것들, 연결되지 않는 그것들, 연속되지 않는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구걸하고 싶지는 않다. 유혹하고 싶지도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결의하고 싶지는 더더욱 않다. 언젠가 이생을 떠나며 나의 친구들은 전우들은 연인들은, 나의 상념과 슬픔, 생각과 이상을 모두 지켜보고 받아내 주었던 그곳들이었다고. 그곳들에게 이별을 전하며 떠나고 싶었는데 오히려 그들이 먼저 이별을 고해오고 있다. 연결되지 않는 관계들, 사람들은 산처럼 쌓여만 가는데, 그들은 어디로 가지도 않고 언제나 여전히 살던 대로 살고 있는데, 왜 내가 애정하는 그곳들은.

삶의 보릿고개를 넘지 못하고 쓰러져 가는 그곳들은 내게 너무 많은 것들을 퍼주었나 보다. 내가 그곳들에 너무 많은 상념들을 쌓았나 보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했던 걸까? 쌓은 이는 나만이 아니었을 테니.

잘 가렴. 고마웠다. 네가 나의 집이었어. 더 버텨내 주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건 아마도 나의 무리한 요구. 너 또한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 테니 아쉽더라도 떠나는 너를 배웅할 수밖에. 다음 생에는 내가 너의 집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한자리에 머물러 오고가는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바라보는 일이 어떨지. 그 쌓여가는 감정의 무게를 담고 있는 일은 또 어떨지. 그것 역시 힘이 드는 일이겠지만 이번 생 나의 무게를 감당해 주었으니 나도 너에게 갚을 날이 있겠지. 그땐 나를 꼭 찾아오렴. 네 발길이 닿는 어딘가에서 문을 열고 있을 테니. 너는 나를 알아보겠지. 내게 내어주던 그 커피 맛을 너도 나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야.

그곳들에게 안녕히.
친구들에게 안녕히 .
그리고 나는
또 다른 그곳들 친구들을 찾아
다시 길을 나설게.
 

 

 

위즈덤 레이스 

 이전글다음글

Scroll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