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라면값이 비싸단다

+ Mont Saint Michel, France

프랑스의 유명 관광지, 몽생미셸. 멀린은 이곳에 그다지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너무 유명한 관광지는 막상 가보면 식상한데다가, 오로지 바다 위에 떠 있는 수도원 하나를 보려고 멀리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번에는 코스를 이쪽으로 틀었으니 가보기로 합니다. 밀물 때면 바닷속에 잠겨 하늘에 떠있는 듯 보인다는 천공의 섬.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몽생미셸의 주차장은 썰렁합니다.

“너무 늦게 왔나? 야경이 멋있다고 소문난 곳이라 야간개장을 할 텐데..”

이리저리 꽤 넓은 주차장을 돌아 보지만, 차도 없고, 주차장 입구도 애매합니다. ‘괜히 어설픈 시간에 들어갔다 주차비만 버리는 거 아니야?’ 결국 멀리 몽생미셸의 수도원이 보이는 자리에 차를 대고 해가 지기를 기다려 보기로 합니다. 생각해 보니 이 시기의 유럽은 해가 밤 열 시는 되어야 진다는 걸 잊고 있었습니다. 아직 서너 시간이나 남았습니다. 배가 점점 고파져 옵니다.

“아! 라면이 있었지.”

그렇군요. 트렁크에 한 짐 실려있는 캠핑장비들 속에 파리에서 구입해 둔 한식거리들과 라면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야외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버너와 코펠까지.. 한국을 떠나 벌써 여러 끼를 빵과 현지식으로 때운 터라, 라면은 천상의 요리입니다.

“야, 이거 대박이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한마디씩 감탄사를 내뱉습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온 이국 땅에서 가장 큰 기쁨은 라면입니다. 한국 사람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잘 가꿔진 프랑스의 강변 공원 벤치에, 코펠과 버너를 세팅하고 라면을 끓여 봅니다. 저 멀리 천공의 섬이 손가락만큼 보이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유럽의 하늘을 배경으로, 라면을 후후 불어 봅니다. 입속에 퍼지는 매콤한 맛이 끝내 줍니다. 야외에서 먹는 라면, 타국에서 먹는 라면 맛이 천하제일입니다. 게다가 후식으로 바리스타 한스의 에스프레소까지.. 모두들 기력을 회복한 나머지 분기탱천합니다.

“까짓것, 걸어가 보자!”

저 멀리 보이는 몽생미셸까지 오솔길이 나 있습니다. 손가락만 하게 보이는 저곳까지 걸어가 보기로 합니다. 미리 알아 본 정보에 의하면, 주차장에서 섬까지 운행하는 무료 셔틀버스가 있다고 하는데, 어디서 타는 지도 모르겠고 힘도 넘치니, 유럽에서의 첫 트레일을 가뿐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걸어 봅시다. 노래도 부르고, 농담도 주고받고, 장난도 쳐 봅니다. 싱글생글합니다. 라면이 주는 MSG 파워가 불끈불끈합니다.

 
그런데.. 좀 멀군요. …

많이 멀군요. ….

아직 멀었나요? …..

 
바람이 붑니다. 점점 거세집니다. ‘바닷가라 그런가?’ 붉은 해도 점점 떨어지고 있는데, 저 멀리 보이는 손가락만 한 몽생미셸이 아직도 손가락만 합니다. 게다가 지는 해의 실루엣은 점점 사라지고.. 이제 조명만 반짝이는 몽생미셸이 비몽사몽합니다.

“얼마나 더 가야 돼요? 이 길이 맞을까요?”

점점 불안이 엄습합니다. 무엇보다 야간개장을 안 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더 불안해집니다. 그냥 돌아가기에는 꽤 멀리 왔는데, 막상 앞까지 갔는데 야간개장을 안 하면 어쩌나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꽤나 걸은 것 같은 시점에 저 멀리 셔틀버스가 지나갑니다. ‘아! 야간개장을 하는구나.’ 다행이다 생각하며 또 걷습니다. 어느새 뱃속 가득, 마음 가득, 열정 가득했던 라면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루하게 가로등도 없이 어두운 밤길만 계속됩니다.

열정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에는, 세상에 불가능은 없어 보이고 자신감에 충만하게 마련이야. 그런데 그 자리에서 조금만 나아가도, 어느새 가득했던 열정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지루한 일상만 계속되는 거야. 목표는 조금도 가까워질 줄 모르고.. 그렇다고 사라지지도 않아. 그냥 늘 그만한 크기로, 여전히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나를 바라보고 있지.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열정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를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채우고 들어앉기 시작하는 거야.

별것도 아닙니다. 몽생미셸, 안 봐도 그만입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에는 여행 일정에 있지도 않았던 곳입니다. 게다가 라면 먹고 즐거웠으니, 오늘 일정이 망가진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왠지 멀린과 한스, 잭 누구도 이 길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구 하나, ‘그만 돌아가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인데, 모두 입을 닫고 묵묵히 걷고 있습니다.

그게 좀 신기했어. 여러 번 여러 사람들과 여행을 해 봤지만, 보통 이런 경우 그만 가자고 하는 사람이 꼭 나타나기 마련인데, 누구도 그 말을 하지 않더군. 오히려 나는 언제 그 말이 나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이야.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 ‘대천사 미카엘의 섬’이라는 뜻입니다. 708년, 대천사 미카엘이 노르망디의 주교 오베르의 꿈에 나타나, 이 섬에 수도원을 지으라고 계시합니다. 오베르 주교는 주교답게(?) 개꿈이라고 생각하고 개무시합니다. 그런데 또 꿈에 미카엘 천사가 나타나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수도원을 지으라니까.’ 주교 다운 주교 오베르는 이번에도 개무시합니다. 결국 3번째 꿈에 나타난 전쟁의 수호신 대천사 미카엘은 오베르 주교를 노려보며, 주교의 머리에 두 손가락을 뻗어 구멍을 내 버립니다. 화들짝 놀라 깨어난 오베르 주교는 머리에 구멍이 나 있는 걸 보고, 그제서야 부랴부랴 수도원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구멍이 난 주교의 두개골이 몽생미셸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직관을 무시하면 곤란해. 쟌다르크가 현명했지. 어차피 할 거라면 단번에 듣는 게 폼 나고 좋잖아. 머리에 구멍 내면서까지 질질 끌려가는 것보다 말이야. 나도 할 말은 없다만..

직관을 무시했던 멀린도 여러 번 다양하게 혼이 났습니다. 씁쓸한 기억들입니다. 남 얘기할 게 아닙니다. 이번 여행도 결국 오베르 주교처럼 세 번째 만에 혼이 날 대로 난 뒤에야, 부랴부랴 떠나온 여행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난 머리에 구멍은 안 났다구. 머리카락이 좀 빠지긴 했지만..

쟌다르크에게 나타나 구국의 사명을 전해 준 대천사 미카엘은, 이미 700여 년 전에 오베르 주교에게 나타나 이 섬에 수도원을 지을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이 섬은 백년전쟁의 기간 동안, 난공불락의 요새로 프랑스의 든든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수도원의 완공은 단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몽생미셸의 수도원이 완공되는 데는 80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 계시했으니 단숨에 지어질 거라 생각할 수 있어. 그러나 하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달라서 ‘천 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 년 같지.’ 그러므로 직관을 따른다는 것은, 오히려 매우 오랜 시간을 일상 속에 걸어가야 한다는 걸 의미하기도 해. 심지어 나는 죽고, 여러 세대에 걸쳐 완수되는 경우도 있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처럼, 목표는 사라지지 않는데 가까워지지도 않고, 지루한 밤길만 계속되는 그런 길 말이야.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머리에 구멍이 났는데 어딜 도망가겠습니까? 심장에 구멍이 나기 전에, 지루해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야 합니다. 어쨌든 끝은 있고 길은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 드디어 다 왔다. 지쳤으니 그만 가자!!”

결국 몽생미셸에 도착했습니다. 여러 대의 셔틀버스가 자신들을 앞질러 가도록 묵묵히 걸은 끝에, 웅장한 밤의 몽생미셸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섬 내부를 둘러볼 에너지가 남지는 않았습니다. 셔틀버스가 끊기기 전에, 돌아가는 길은 어쨌든 편하게 가야겠습니다. 웅장한 몽생미셸을 뒤로하고 바로 돌아섭니다.

어쩌면 그냥 야간행군을 했을 뿐입니다. 인증샷 몇 컷을 남기려고 이 먼 밤길을 걷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직관을 따라 시작된 여행에, 어떤 하늘의 뜻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반응하며 걸을 뿐입니다. 여행의 초입에서 경험한 몽생미셸의 밤길은, 이 여행의 여러 포인트에서 이들에게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 낸 경험은, 이후 같은 갈등의 순간에도 든든한 기억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작은 경험들은, 세 사람의 인생의 다른 묵묵한 순간들에도, 잘 견디고 벼텨내 줄 에너지가 되어 줄 것입니다.

“그나마 라면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니?”
“걸어올 생각도 안 했겠죠.”
“그렇구나, 라면이 죄인이네. ㅋㅋ”

간신히 올라탄 셔틀버스조차도 떠나온 지점까지는 데려다주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또 밤길을 걸으며 쏟아져 내릴 듯한 프랑스 시골마을의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라면을 먹었어야 했나? 말았어야 했나?’ 의문에 젖은 채, 무수한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을 경이롭게 바라봅니다. 쟌다르크와 오베르 주교가 미카엘 천사의 날개에 앉아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듯합니다.

‘프랑스는 라면값이 비싸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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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살 난 유리창은 암스테르담에 버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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