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종말-3부] 감독 인터뷰

2009.11.17 

 

# 감독 인터뷰

최근 개봉한 영화 [그 여자 그 남자의 사정]이 독립영화로는 보기 드물게 관객 2백만을 돌파하였다. 한국영화시장에서 독립영화가 2백만 관객을 돌파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래서 본지는 이 영화를 제작, 감독한 ‘조식남’ 감독과의 인터뷰를 마련하였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유령감독이라고 불리는 ‘조식남’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관객 목표가 도달한 후에야 인터뷰에 응하겠다고 해 많은 언론들을 애타게 해왔다. 개봉 일주일만인 지난 주말, 2백만 관객을 돌파하자 감독은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기자 _ 먼저 관객 2백만 돌파를 축하드립니다. 예상은 하셨습니까?

감독_ 감사합니다. 음.. 예상이라기 보다 관객 2백만은 목표였습니다. 일단 목표가 달성되어서 적어도 저의 영화 작업이 실패한 작업은 아닌 것이 증명되어 기쁩니다.

기자_ 감독님께서는 예상 관객 수에 도달하기 전에는 어떠한 인터뷰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도 그러셨구요. 2백만이 목표였다고 하셨는데 특별히 의미하는 바가 있으십니까?

감독_ 상징적인 숫자이긴 합니다만, 파레토의 법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핵심그룹 20%가 전체를 움직인다는 법칙이죠. 그동안 우리나라 영화 흥행 최다 관객수가 천만명이었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즐기는 인구의 맥시멈이 천만이라면 그중 20%는 2백만이죠. 물론 천만이 모두 제 영화를 보고 공감하거나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천만 관객에 20%인 2백만 정도만 봐줘도 영화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는 필요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_ 영화에서 제작, 감독, 각본 모두 감독님이 직접 하셨던 데요. 주연까지 하시지 그러셨어요?

감독_ 하하.. 보시다시피, 이 외모로 주연까지 하는 건 좀 민폐 같아서.. 음 그것보다 제가 미혼이라 유부남인 주인공 남자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을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했습니다.

기자_ 미혼이신 감독님이 찍으신 영화치고는 영화 내용이 상당히 현실적이던데요. 최근 어떤 조사에 의하면 직장 남성들이 아내와 함께 보고 싶은 영화 1위로도 뽑혔습니다. 혹시 남모르는 경험이 있으신 건 아닌가요?

감독_ 하하.. 그런 조사가 있었나요? 결과가 그렇다면 제가 제대로 사기를 친 거네요. 경험은 없고, 저는 독신주의자라 앞으로도 경험할 계획이 없습니다만. 영화는 어디까지나 제 주변 인물들의 경험담이고, 어느 술자리나 대화 자리에서든 익히 쉽게 들을 수 있는 얘기들이죠. 다만 그런 얘기를 나누는 당사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라 객관성 있게 들여다볼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비교적 입장이 자유로운 저는 부담스러운 표현들을 영화에 담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기자_ 본격적으로 영화에 관한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가장 불편해하고 난감해 하는 부분이 아마도 ‘행복해지려면 당장 이혼이라도 해야하는 거냐?’ 인 것 같습니다. 미혼이신 감독님 입장에서야 남들의 얘기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당사자들에게는 단지 경제적 계약관계나 낭만적 사랑의 전제조건을 떠나 결혼생활 자체가 여러 가지 이해관계의 총합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갈등 요인들만 잔뜩 불러일으켜 놓고 책임질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는데요?

감독_ 처음부터 너무 어려운 질문이시네요. 음.. 저는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을 소개하고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게 하는 것이 예술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영화 역시 사람들이 자신의 삶, 구체적으로 결혼제도 속에서 매일같이 경험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진실을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이를 관객 스스로가 돌아보고 스스로 선택하거나 조정 또는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려는 나름의 목표가 있었습니다. 특히 결혼제도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관객들과 소통하고 싶었습니다.

 

생존의 문제가 공동체의 문제였던 시절

대가족제도, 마을 공동체가 아직 제 역할을 하던 시절만 해도 삶의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조언해 줄 많은 어른들, 함께 감당해 줄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그런 사회안전망을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핵가족화되어버린 현 가족제도에서는 개인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감당해야 되는 막중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산업사회 이전의 사회에서 생존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문제였습니다. 노동력을 기반으로 한 농경사회 속에서는 누군가 굶어 죽는다는 것은 농사를 지을 일꾼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최소한의 생존기반은 서로서로 보장해 주었던 것이지요. 사극에 나오는 장면 중에 우리 고을이 모두 굶어 죽겠으니 세금을 면해주시던지, 구휼미를 내려달라고 상소하는 지방관리, 영주의 탄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의 빈곤은 지역공동체의 문제여서 기근이 들어 굶어 죽게 되면 다같이 굶어 죽고, 살아도 같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도 몇 개월이 지나도록 방치되는 일은 없었지요. 포악한 영주들조차도 자신의 세력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생존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빚더미에 몰려 당장 하루아침에 거리에 내몰려도 갈 곳이 없습니다. 예전처럼 산속에 천막치고 피신할 수도 없습니다. 이웃사촌은커녕 부모, 형제, 친척도 외면하는 것이 요즘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개인에게 생존에 대한 책임이 막중하게 지워진 시대는 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없었단 말이죠. 게다가 그 짐의 대부분은 가장에게 모두 집중되어 있습니다. 핵가족 시대의 피해자는 멋모르고 결혼한 남편이고 아내입니다. 더 큰 피해자는 태어난 아이들이죠. 모두가 피해자가 뒬 수밖에 없는 이런 상황 속에서 저는 현대의 결혼, 가족제도가 급속도로 붕괴되어 갈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경제적 계약관계가 본질인 결혼제도에서 더 이상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계약을 이행할 수 없거든요. 생존권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남성에게 여성들은 더 이상 억압당하며 살지 않습니다. 남자가 경제력을 상실하는 순간 가족의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이죠. 

기자_ 그렇다고 모든 아내들이 단지 경제력이 없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남편을 떠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힘든 순간을 서로 의지하며 잘 버텨내 오는 가정들이 더 많지 않습니까? 또 여전히 낭만적 사랑의 여부는 중요한 결혼의 전제 조건이구요.

감독_ 글쎄요? 과연 앞으로도 그럴까요? 어쨌든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입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인간에 대한 이해는 동물적 본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동물적 본성을 무시해서는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어요. 동물적 본성이랑 결국 내 배가 불러야 다른 누군가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죠. 네 물론, 기자님 말씀처럼 힘들어도 서로 의지하며 잘 사는 부부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행한 일이지, 모든 부부들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파괴되는 가족이나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가정이나 낱낱이 들춰보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죠. 저는 그것이 바로 계약조건의 충족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극복하고 누구는 극복하지 못하는 원인은 무엇이냐? 결국 그것은 우리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더라 이 말이죠. 사랑이 없어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사랑한다고 헤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이라면 지금의 가족제도는 사랑을 볼모로 상대의 행복을 강탈하고 있는 측면이 분명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직장 남성들이 퇴근해도 집에 들어가기를 꺼립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돈 벌어다 주고 애 낳으면 오손도손 행복할 줄 알았는데 실상이 그렇지 않은 거죠. 뒤늦게서야 결혼보다 중요한 다른 꿈들을 만나게 되거나 열심히 노력해도, 집 한 칸 장만하기 힘든 현실에 직면합니다. 아내들은 매일 반복되는 집안일에 육아부담, 게다가 원하지 않는 분야에서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맞벌이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개인에게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는 사회 속에서 숨 쉴 공간이 없습니다. 기자님은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드는 노동력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기자_ 글쎄요? 저도 애들은 와이프가 전담해서 키우느라..

감독_ 아이 한 명당 성인 4명분의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어른 4명이 붙어야 아이 한 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얘기죠. 심지어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 육아부담이 모두 엄마에게 일임되어 있어요. 대가족 사회에서 고모, 삼촌, 할머니, 형, 언니들이 나누어 가졌던 육아부담이 지금은 엄마에게만 집중되어 있는 거죠. 한마디로 현 시스템에서 아이 키우기는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습니다. 지금 엄마들 대단한 겁니다. 육아에 맞벌이까지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슈퍼우먼들입니다. 대가족 제도로 다시 돌아가거나, 국가가 육아부담을 대신 짊어지지 않는 한 출산율 저하는 막을 수 없습니다. 출산장려금 조금 더 준다고 그게 해결되겠습니까? 교육정책 바꾼다고 절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해결하는 방법은 또 아주 간단합니다. 먹고 살만하게 해주는 것이죠. 누구나 먹고 살만 해지면 잠자리도 편안해지고 아이 욕심도 덩달아 생기는 거죠. 본능이니까요. 그래서 요즘 부유층들은 아이 많이 낳는 게 유행이라고 하더군요. 돈 없으면 낳을 엄두가 나지 않으니까. 일종의 부의 과시라고 할까? 가사도우미, 학습도우미.. 손 갈 일이 별로 없으니 자식을 셋, 넷 많이 낳을 수 있는 거예요. 우리는 지금 자녀의 숫자가 부의 척도가 되는 이상한 시대에 돌입하고 있습니다.

기자_ 그렇다고 경제적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게 좋아질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결혼제도의 본질과 결혼을 대하는 태도

감독_ 음.. 우리는 먼저 결혼, 가족제도의 본질과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태도를 분리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나아가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소통되어야 할 중요한 가치는 사랑과 존중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남과 여, 어른과 아이, 인종에 상관없이 사랑하고 존중해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과 존중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결혼하고 가족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내가 왜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려 하는지 신중히 살펴보고 그에 맞는 상대를 찾아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낭만적 사랑도 중요한 조건의 하나이지요.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지금과 같이 혹독한 시스템 속에서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기 위한 조건을 만족시켰다고 보기 힘들다는 거예요.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가장 고려되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보세요. 현대의 기혼 남성들은 1인 多역을 해야 합니다. 멋진 남편, 좋은 아빠, 효성 깊은 아들, 사려 깊은 사위, 장래가 촉망되는 부하직원, 능력 있는 상사, 쿨 한 친구…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서 한 가지만 잘하기도 어려운데 너무나 많은 배역을 맡고 있는 거죠. 여성들도 마찬가지이구요. 문제가 안 생기는 게 이상한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과다 배역이 인생의 전반에 나누어져 있는 게 아니라, 인생의 어느 한 시기 특히 30대에 모두 집중되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연애, 취업, 결혼, 출산, 승진, 내 집 장만, 육아 등 하나하나 무엇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업들이 30대에 몽땅 집중되어 있는 거예요. 숨돌릴 틈도 없이 폭탄이 뻥! 뻥! 터지는 거죠. 대학입시와 취업전쟁을 이제 겨우 뚫고 나온 30대들에게 미쳐 준비도 안 된 채로 전방에서 쏟아지는 포탄을 맨몸으로 맞아라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러니 살아남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요. 인생이 지옥훈련도 아니고 슈퍼맨이 아닌 이상 그 모든 배역과 과업들을 어떻게 동시에 모두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겠어요. 게다가 이 전쟁은 옛날처럼 작전을 지시해 주는 장교도, 함께 적에 맞서 싸울 전우도 없습니다. 대가족 중심의 공동체 사회에서는 인생 전투 경험이 많은 베테랑 어른들과 피를 나눈 많은 형제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남편과 아내 오로지 둘이서 감당해야 하거든요. 슈퍼맨과 슈퍼우먼이 아닌 이상 승리는커녕 살아 남기도 힘든 게 현실입니다.

그러니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결혼생활을 일종의 전투로 여기고 나와 같이 그 전투를 잘 감당할 만한 사람을 찾아야 된다는 거예요. 노래 잘하고 춤 잘 춘다고 전투를 잘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혼자 살면 육아, 출산, 내 집 장만 등 인생 과업의 2/3는 사라집니다. 집중력이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낭만적 사랑만 가지고 결혼이란 전투를 감행하기에는 현대산업사회는 너무도 치열하고 잔인합니다. 그러나 경제문제만 해결된다고 결혼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아닙니다. 경제적 능력은 기본이고 그 밖에 갖추어야 할 능력과 스펙이 더욱 많아진 것이죠.

기자_ 감독님 말씀대로라면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도 현시대에 맞게 달라져야 하겠군요.

감독_ 맞습니다. 현실이 이러한데, 자라나는 아이들이 부모의 갈등과 집안의 어려움을 그대로 보고 자라서 어디 결혼하려고 하겠습니까?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야’,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어’ 이게 요즘 젊은 세대들의 기본적 정서입니다. 존경하는 인물에서 부모님이 사라진 지 오래인 것처럼 아이들이 부모의 실패를 열심히 반면교사로 삼고 있다는 것이죠. 근본적으로는 가족제도의 근간인 남성의 경제적 지원, 여성의 출산, 육아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기존 방식의 결혼, 가족제도는 계속 빠르게 붕괴되어 갈 것입니다.

여성들의 사회진출, 경제력, 지위가 상승되면서 일자리도 많아지고 더 이상 남성에게 기댈 필요가 없어졌으니 억압당하면서까지 여성들이 부부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혼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 인식도 점점 바뀌어 가고 있구요.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1997년 IMF가 큰 기점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남편들이 대거 실직하고 집에 들어앉자, 떠밀리듯 직업전선에 뛰어들게 된 아내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나름 경제력들을 갖추게 된 거예요. 요즘의 젊은이들이야 맞벌이가 결혼의 필수요건처럼 되었지만 구세대 남편들은 여자가 살림만 하지 않고, 나가서 일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러다 자신들은 실직하고 의기소침해졌는데 아내들이 나가서 생계를 유지하니까 시쳇말로 ‘가오’가 서지 않는 것이죠. 처음에야 ‘조금만 견디자. 금방 재기할 수 있을 거야’라고 자위했겠지만 시간이 가면서 점점 초조해지고 무력해지는 겁니다. 남자가 일이 없으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되는 건 금방이거든요. 그러니 자식들 앞에서 위신도 안 서고 마누라랑 눈 마주치는 것도 부담스럽고.. 자꾸 밖으로 도는 거죠.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 만나서 매일 술이나 마시고.. 잠시라도 잊고 싶고 벗어나고 싶으니까요. 그러다 알코올중독이 되고 술 취한 채 집에 들어가서 가족들한테 손찌검하고..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거예요. IMF 이후 퇴직자들이 가장 많이 시도한 창업이 치킨, 피자가게입니다. 생전 장사라고는 해 본적도 없는 부부들이 가게 열어놓고 허송세월 하는 거죠. 매일 얼굴 맞대고 있으면 아무리 금슬 좋은 부부도 싸우기 마련입니다. 출장이다 회식이다 부딪힐 일 없던 남편이랑 결혼하고 나서 처음으로 24시간 붙어 있다 보니 왠수가 따로 없는 거죠. 돈 다 까먹고 할 수 없어 여자들이 나가서 비정규직이라도 일을 하게 되고 남자들은 다시 취직은 안되니 사업한답시고 돌아다니다 집 담보 잡히고 보증금 날리고.. 뭐 모두 잘 아실 만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겁니다.

이런 걸 보고 자라난 아이들이 결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습니다. 젊은 여성들에게는 차라리 혼자 사는 게 현명한 선택사항이 되어 버렸구요. 남자들은 비관적이 되어서 일찌감치 결혼은 포기하고 개인적 관심사에 몰두하는 초식남이 되거나 국제결혼을 생각해야 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요. 상대적으로 여성들의 기준이 높아지는 바람에 남성들이 점점 결혼할 기회를 잃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자_ 그러면 앞으로 남성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성들의 디스토피아는 여성들의 유토피아인가?

감독_ 음 조금 극단적인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남성들의 유토피아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없는 남자들은 더 이상 결혼생활을 경험할 수 없게 될 거예요. 좀 더 과장해서 말하면 인류의 역사에서 근, 현대사회는 능력 없는 남자들이 결혼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던 아주 짫은, 꿈같은 시절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모든 남성들이 단지 사랑 하나만으로 자신이 원하는 여자를 데려다 아내로 삼을 수 있는 시절은 인류 역사에서 산업사회 이후를 제외하고는 없었습니다. 남성은 여자를 취하기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보여야 했고 능력 있는 남성은 여러 여자를 합법적으로 취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능력이 떨어지는 남성들, 계급사회에서 계급이 낮은 계층의 남성일수록 결혼은 단지 출산을 통한 노동력 확충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힘들었습니다. 왜 예전에 머슴들은 주인이 혼사를 시켜 주지 않으면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는 경우도 많지 않았습니까? 그러다 산업 사회 이후 계급사회가 무너지고 전반적으로 소득이 향상되면서 누구나 먹고 살 수 있게 되자, 결혼의 요건으로 낭만적 사랑이 중요하게 떠오른 것이죠. 경제력이 없는 남자도 감미로운 목소리, 매너 넘치는 태도, 수려한 외모 등 다른 매력 조건을 가지고 여자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고 여자들은 눈에 콩깍지가 쓰인 채, 실속 없는 남자와 결혼해서 살게 되는 일들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경제력 없는 남자도 당당하게 낭만적 사랑을 이유로 결혼을 할 수 있는 좋았던 시절이었습니다만 영원할 것 같았던 경제 호황이 멈추고 세계적으로 경제 위기가 오고 부익부, 빈익빈 심해지면서 새로운 계급구조가 등장하자 다시 경제적 능력이 결혼의 중요한 기준이 되어 가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기자_ 감독님 말씀을 들어보니, 잔인하지만 마땅히 거부하기도 어려운 현실적 이야기이네요. 그렇다면 예전처럼 능력 있는 남자는 여러 명의 여자를 거느리고 능력 없는 남자는 결혼도 하지 못하는 그런 시절이 다시 온다는 말씀이신가요?

감독_ 글쎄요? 그것은 단언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씀드릴 수 없는 문제이긴 합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르니까요. 자연의 법칙이란 것이 승자독식,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우수한 유전자가 살아남는 방식으로 진화해 왔으니 인간이라고 예외일 수 없겠지요. 많은 동물 종들이 무리 중에 가장 강한 수컷이 무리의 암컷을 모두 거느립니다. 경쟁에서 진 수컷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퍼뜨릴 기회조차 얻지 못합니다. 겁 없이 암컷을 건드렸다가 대장 수컷한테 성기를 물어 뜯기는 수모를 당하기도 합니다. 수컷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최대한 많이 퍼뜨리고 싶어하고 암컷들은 우수한 유전자를 얻고 싶어 합니다. 젖을 먹이고 키우는 것은 암컷이니 수컷은 출산, 육아의 부담 없이 최대한 자신의 유전자를 세상에 많이 퍼뜨리고 싶고, 직접 낳고 길러야 할 암컷은 나만의 남자가 아니어도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수컷에 목을 매게 되는 것이죠. 자연은 이러한 경쟁구도 속에서 스스로를 진화시켜 왔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의 일부일처제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방식인지도 모릅니다. 농경사회 이후 일부다처제를 근간으로 진화해 온 인류의 종족번식의 역사가 일부일처제로 제한되면서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나게 된 것이죠.

기자_ 암초라니요? 인류가 어떤 암초를 만나게 된 거죠?

감독_ 스트레스의 폭발적 증가이지요. 어떤 시절보다 풍요롭고 편리한 문명을 누리고 있는 인류가 역설적으로 이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스트레스에 휩싸이게 된 거에요. 이 스트레스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무한경쟁에 내몰린 인간들의 아귀다툼, 사회안전망 역할을 하던 공동체가 사라지고 개인의 무한책임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 내몰린 인류의 스트레스는 지구를 순식간에 병들게 만들었습니다. 폭발적인 자원의 소비와 환경파괴의 이면에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한 인류의 몸부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자_ 음.. 그런데 환경파괴와 일부일처제가 어떤 연관이 있죠?

감독_ 자연의 질서와 섭리에 따른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아닌 인간의 탐욕과 불안한 현실의 탈피를 위한 약육강식, 적자생존 시스템이 바로 문제인 것이죠. 일부일처 시스템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좋았을 많은 커플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힘, 능력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남성, 여성들이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게 된 것이죠. 이는 마치 능력이 없는 대학생, 젊은이들에게 신용카드와 대출을 남발함으로써 수많은 젊은이들을 신용불량자로 만들어버린 카드대란 같은 일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일개의 개인에게 생존의 책임이 철저하게 지워져 있는 현대자본주의사회 시스템 속에서 일부일처제가 생각지도 못한 한계를 드러내게 된 거예요. 치열한 현대사회에서 변변한 사회안전망도 없이 덜컥 낭만적 사랑만을 가지고 결혼한 커플들이 생각지도 못한 위기에 내몰리게 된 것이죠.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는 커져 가고 사회는 더욱더 치열한 생존경쟁을 더해가는데 아무런 준비와 대책 없이 덜컥 낭만적인 감정만으로 결혼했다가 아이까지 낳습니다. 그런데 직장은 자신이 그리던 유토피아가 아니거든요. 평생을 보장해주지도 않구요. 아내는 아내대로 미혼시절에 누리던 꿈같은 현실이 그립고, 집안은 갑갑하고, 옴짝달싹하기 힘든 현실은 고통스럽구요.

기자_ 그러니까 감독님 말씀은 인류가 별다른 준비 없이 일부일처제에 돌입했는데 영원할 것 같던 경제 호황도 끝나고 여러 위기가 닥치면서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에 직면하고 있다는 말씀이네요.

감독_ 그렇습니다. 어른들은 ‘자기 먹을 건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말씀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운 좋게 경제 호황기를 지내온 이전 세대의 경험이죠. 그분들이라고 지금 결혼하면 어디 쉽게 아이 낳고 생활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변한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현실 인식 없이 감정만 가지고 결혼하다 보니 이런 악순환이 계속 벌어지는 겁니다. 저는 답답한 게, 우리가 대학을 가고 취직하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합니까? 그런데 정작 인륜지대사인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일에는 아무런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공식 외우고 영어 단어 외우는 것보다 수십, 수백 배 어렵고 복잡한 것이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사는 일인데 자판기에서 커피 뽑듯 별 준비 없이 결혼에 돌입한다는 거죠. 결혼도 결혼이거니와 아이를 키운다는 건 더더욱 많은 지혜와 지식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동안 전통적인 대가족제도에서는 그런 지혜와 지식을 가르쳐주고 전달해줄 많은 어른들, 이웃들이 있었지만 현재는 어디서도 그런 실질적인 지혜와 정보들을 필요한 때에 적절하게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도 찾아보고 책도 읽고 경험도 듣고 대입 준비하듯이 열심히 노력해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대가족 사회에서 10명, 20명이 나누어 갖던 경험과 지식을 지금은 부모 둘이 모두 커버해야 하니까요. 그래서 사실상 핵가족 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이들인 거예요. 결국 모두가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아빠도 엄마도 아이들도 어쩌다 한 집에 살게 되었으니 죽지 못해 살아가는 형국인 거죠.

기자_ 그러면 일부일처제는 인류의 실패한 실험으로 끝나는 건 가요? 아니면 다시 일부다처제로 돌아가게 될까요? 남자든 여자든 능력 없는 사람은 결혼하기가 갈수록 어려운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만..

감독_ 여자들이 다시 일부다처제를 선택할까요? 저는 그런 식으로 인류가 역사를 뒤로 돌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일부다처제 또한 어디까지나 농경사회의 유산이니까요. 이미 지금의 사회는 더 이상 경제권, 생존권을 남성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높아졌습니다. 스스로 먹고 살 수 있는 여성이 굳이 종속되고 억압당할 수 있는 기존의 결혼제도 속으로 들어가려고 할까요? 새로운 전제조건들이 생겨나겠죠. 자신의 경제적 능력보다 더 월등한 생활 요건을 제공해 준다던가, 아니면 경제적 조건들은 의지하지 않아도 되니 감성적 만족이나 육아에 도움이 된다든지 하는 무언가 다른 결혼 조건들이 더 중요시되겠지요. 우열의 법칙에 따라 여자든 남자든, 능력이 뛰어난, 스펙이 좋은 사람들의 선택권이 넓어질 테구요. 이전과 달리 상대적으로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결혼 기회조차 얻지 못하겠지요. 세대를 지나갈수록 일찌감치 결혼을 포기하고 혼자만의 삶을 준비하는 솔로들도 많아질 테구요. 일부다처 사회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능력 있는 여성을 따르는 다수의 남자들이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일처다부까지는 아니어도 말이죠. 잘난 남, 녀가 결합하여 가족을 이루기는 했지만, 서로의 사생활은 간섭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유연애를 즐기는 형태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겠지요.

다행인 것은 조물주가 심어 놓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입니다. 남성들의 종족번식 본능, 여성들의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모성본능이 있는 한, 가족제도 그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요. 만약 이것이 본능이 아니고 필요에 따라 사라지고 없어질 수 있는 제도뿐이었다면 어느 통계에서처럼 우리나라는 정말 저출산 끝에 인구감소로 사라질지도 모릅니다.

여러 다양한 형태의 대안가족들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가족제도의 본질인 경제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면 미혼 남녀의 결혼을 통한 가족 결성 방식뿐만 아니라 동성 간의 결혼과 입양, 또는 결혼이 아닌 경제공동체로서의 친구, 이웃, 동료들 간의 가족구성, 사생활이 어느 정도 보장된 형태하에서 같은 목적이나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의 생활공동체 등 다양한 방식의 경제공동체들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기존의 도덕이나 전통, 윤리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처지와 능력, 취향에 따라 무리를 이루게 되겠지요. 자연스럽게 조금은 더 문명화되고 발달된 방식으로 농경사회 이전의 공동체 생활을 회복해 갈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전반적으로 모계사회의 패턴을 기본 골격으로 하게 될 거구요.

기자_ 감독님 말씀을 듣고 있자면 그렇게 될 것도 같은데 영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어쨌든 남자들의 위기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인공 남자가 자살을 한 건가요?

감독_ 어쩌면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현대의 모든 연약한 남자들의 내재된 현실일 수 있습니다. 극 중에서 여자는 남자와 달리 어려운 어린 시절을 살다가 사랑하는 남자를 떠나보내고 현재의 안정된 남편을 선택하게 됩니다. 여자에게는 어린 시절이 여러모로 힘든 시절이었는지 모르지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기도 합니다. 더 나은 안정과 편안한 삶을 추구해 결혼을 선택했지만 적어도 위기의 상황에서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은 구비하게 되었던 거지요. 반면에 남자는 그리 여유롭지는 않지만 신분상승 욕구가 강한 부모의 철저한 관리하에 명문 대학에 가고 대기업에 취업해서 잘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과잉보호 아래에 자라다 보니 정작 위기 상황에서 자기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의지와 경험을 얻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계에 부딪히게 된 것이죠. 버티자면 아직 몇 년은 직장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겠지만 그 이후에 대한 대책은 세울 시간도 방법도 없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죠. 남자는 여자의 사랑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 사랑이 안정된 생활기반이 무너져도 유지될지 자신이 없었던 거죠. 그렇다고 당장 때려치우고 꿈을 찾아갈 수도 없었습니다. 감당해야 할 생활 규모가 하루도 여유롭게 놓아주지 않고 있었거든요. 가족을 생각하니 지금의 현실을 차마 박차고 나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명예퇴직이든 정리해고든 어차피 닥쳐올 두려운 현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런 현실이 닥치고 나면 그토록 지켜내려고 노력해 온 가족도 아내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던 거죠. 혼자였으면 훌훌 털어버리고 새 출발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 상황하에 어떤 가정에서 가장의 새 출발이 용납될 수 있을까요? 결국 그것도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이니 남자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느껴졌을 수 있습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기자_ 하지만 남자의 그런 죽음 이후, 여자가 옛 남자를 다시 찾아가는 설정은 받아들이기 힘들던데요. 여자도 일말의 책임의식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감독_ 책임의식이요? 그것 때문에 남자가 파멸했는데두요? 저는 그 현실에 맞지 않는 책임의식에서 현대인들이 자유로워져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가장의 실직이 온 가족의 파멸인 것처럼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가 정작 그들의 자립의지를 죽이고 있는 거란 말이죠. 왜 수고한 남편 대신 여자가 몇 년쯤 대신 노동할 수 없나요? 어차피 이혼하면 스스로 벌어먹어야 하는데.. 장성한 자식들이라면 아버지 대신 아르바이트든 취업이든 생계에 도움을 줄 수 있어야죠. 가장들 또한 결국 스스로 정리되고 말 잘못 들여놓은 직장이라면 하루라도 빨리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아 그곳에서 실력을 쌓고 도전할 생각을 해야 합니다. 너무 늦었다는 생각은 도전이 두려워하는 핑계일 뿐이에요. 대학 가지 않으면, 대기업에 취직하지 않으면, 영어를 하지 못하면.. 이런 조건들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진짜 생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쓸데없는 스펙들일 뿐입니다.

정작 남자를 죽인 것은 사회이고 그를 그렇게 키운 그의 부모입니다. 물론 부모들도 자신들이 자라고 성장한 배경 속에서 남들 키우는 방식을 따라 그렇게 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책임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여자가 남자의 죽음에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새 출발을 시작한 것은 저는 용기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여전히 책임져야 할 자식들이 있고 남자가 남겨 놓고 간 해결되지 않은 여러 경제적 부담을 홀로 짊어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이를 죽지 못해 생존을 이어가는 파괴적 방식으로 감당하지 않고 자신이 가장 원하고 또 평생 미련이 남을지 모를 옛 남자를 찾아감으로써 주체적인 해결 방식을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그 옛 남자는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독신주의자였으니 여자가 옛 남자를 죽은 남편을 대신할 의지의 대상으로 찾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제 남들의 시선이나 관습에 의해 사는 삶이 아닌 주도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겠다 결심하니 옛 남자를 이해하고 그의 가치관을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저는 여기서 관객들이 희미하나마 구원의 불빛을 발견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기자_ 결국 남자는 죽음으로써 여자를 구원하게 되는 것인가요?

감독_ 안타깝지만 저는 그랬길 바랍니다. 지금의 불편한 현실은 남편과 아내 누구 한사람의일방의 잘못 때문이 아니거든요. 변화하는 현실과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남편과 아내는 저마다 자신들만의 사정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라져가는 환경 속에서 남편과 아내는 자신들만의 사정에 따라 풀고 맺음으로써 새로운 관계 방식을 모색해야 합니다.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의 비슷한 환경에 처한 모든 부부, 가족들이 자신의 삶과 가족관계를 의무와 책임의 관점이 아닌 지지와 격려의 장으로 부활시키고 회복시키는 일이 일어나야 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인식의 변화에 따라 앞으로의 결혼제도, 가족제도는 다양하게 변화되어 가겠지만 이미 가족을 이루고 있는 기존의 관계들에게는 대안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계속 파괴적인 방식으로 결별하고 상처 주고 그것이 불필요하게 대물림되는 악순환을 당분간 이 사회가 감당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 사회적 차원의 지원과 인식의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언제나 제도는 현상을 뒤늦게 반영하니까요. 어려운 상황에 처한 개인들은 자신의 인식을 스스로 바꾸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특히 남성들 말이죠. 이대로 두었다간 비참한 말년을 경험하게 될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능력 있는 남성들이야 지속하거나 버티기가 가능할 수 있겠지만 책임감 때문에 원하지 않는 인생을 살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남성들은 병으로 죽거나, 어느 날 갑자기 이혼당하고 쓸쓸히 골방에서 죽어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성은을 입어서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안방에서 쫓겨나지 않는 신세로 감사할 수 있다면 다행이구요. 경쟁에 도태되지 않는 한 당분간 가장의 체면을 유지해 갈 수 있겠지만 위기가 닥쳐 올 것 같으면 미리 알아서 청소도 하고 설거지도 할 수 있어야 할 겁니다. 아니면 여자들이 굳이 데리고 살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기자_ 그래서 감독님은 결혼을 안 하시는 건가요?

감독_ 보시다시피 제가 능력도 없고 보기에도 후지지 않습니까? 배는 불쑥 나오고 작은 키에다가.. 십 년 백수 생활 끝에 만든 영화입니다. 멋모르고 결혼했었더라면 이 영화는 세상에 나오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니면 제 가족들이 무지하게 고생을 했어야 했겠지요. 물론 잘 감당해 주었다면 지금쯤 이 영화의 성공에 함께 기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미래는 또 다르지요. 영화 한 편 성공했다고 당장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겨우 빚 청산이나 하면 다행인 상황입니다. 어쨌든 저는 지금 제 생활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외로움을 달래 줄 에몽이들도 있고.. 구속되지 않는 관계라면 저는 매우 쿨한 남자거든요.

 

# 인터뷰 후기

인터뷰가 끝난 이후에도 조식남 감독의 거침없는 이야기는 계속됐다. 결혼 경험이 없는 미혼 감독의 철모르는 상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오랜 사색과 고민의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묻어났다. 논리가 부족하거나 어폐가 있더라도 자유로운 상상을 직업으로 하는 영화감독에게서 철저한 객관성과 근거를 기대할 필요는 없었다. 그가 바라보는 세상, 그의 이야기가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현실일 테고, 또 누군가에게는 허무맹랑한 잡설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냥 쉽게 흘려보낼 수 있는 내용들은 역시 아니었다.

관객 200만을 돌파하고 벌써 속편을 준비하고 있다는 그를 바라보며,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했다. 그가 바라보는 것만큼 모든 남자와 여자들, 남편과 아내들의 삶이 갈등의 연속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힘들어도 웃게 만드는 아이들의 재롱과 어쩌다 쥐꼬리만큼 나오는 상여금에 좋아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흐뭇한 기분을 느끼는 것도 생의 작은 기쁨일 수 있으니까. 물론 그는 그건 서서히 독약에 중독되어가는 것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그의 말을 따르면 파멸로 달려가는 전형적인 가장인 나는 인터뷰 내내 혼란스럽다가 용기가 불끈 솟았다가 의기소침해지기를 반복했다.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자신만을 생각하며 용기 있게 박차고 일어서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이혼을 생각할 만큼 고통스럽게 하는 것 같지는 않은 아내를 생각하면 주춤할 수 밖에 없다. 어떤 때는 죽여 버리고 싶다가도 지쳐 잠든 아내의 모습을 보며 안쓰러웠던 적도 여러 번이니 나도 내 마음을 알 수가 없다.

용기 있는 자가 미인을 얻고 도전하는 자가 꿈을 이루겠지만, 서서히 온도가 올라가는 비어커 속의 개구리처럼 무감각한 채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내던져 질지 모를 일이다. 내던져질 때 내던져지더라도 오늘은 그냥 아이들 좋아하는 피자나 한판 사가는 걸로 비참한 기분을 대신해야겠다.

_  ‘씨네22’ 보동남 기자, 200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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