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술가인가

by mmerlin

[멀린’s 100] Jun 29. 2022 l M.멀린  

 

‘로빈슨 크루소는 과학자가 될 수 있을까?’

정답은 ‘될 수 없다’라고 합니다. 과학은 타인의 검증을 필요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라는군요. 공증이 주요한 요소인 것. 그러면 크루소는 예술가가 될 수 있을까요?

예술은 누가 보아주어야 예술입니까? 이는 마치 네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꽃이 될 수 있었다던 시의 구절이 생각나게 하는군요. 독자가 없는 글은 예술이 아닌가요? 관객이 없는 연주는 예술이 아닌가요?

정의는 하지 말기로 해요.

결국 이런 정의의 시도는 대중과 타자를 전제로 하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에 단독자로 존재하는 동안 신은 신이 아닌 겁니다. 조물주는 피조물에 의해 존재하는 거니까요. 그러니 이미 존재하는 대중과 타자들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뭐가 예술이냐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너의 예술이 소통되고 있는가. 아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누가 보아주는가에 대한 답을 회피하려는 시도이겠죠.

아니 누가 보아줍니다. 누구라도 보아줍니다. 내가 안 보여줘서 그렇지. 아무도 안 보는 예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족이라도 보니까요. (가족도 안 본다구요? 그럴 리가요? ‘너 그딴 식으로 쓰니까 그 모양이지.’ 소리 듣기 싫어 안보여주는 거겠죠.) 그리고 세상에 내 것을 좋아 할 1%는 반드시 존재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도 그런 것을 찾으니까요. 그런데 그게 돈 주고 볼만하냐의 문제는 다릅니다. 그것을 회피하려고 크루소를 끌어다 대면 좀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지점에서 상품성이 없으면 예술이 아닌가의 질문이 생겨납니다. 당연히 그건 아니겠죠. 그러나 많은 예술가의 욕망은 상품성을 가진 예술입니다. 그건 내 선택입니까? 내 문제입니까? 상품성과 예술성을 저울질할 수 있는 누구라면 고민이 되겠지만, 어차피 상품성이라곤 1도 확보하지 못한 ‘나 혼자 예술’이라면 고민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건 그냥 하면 됩니다.

예술가의 욕망은 왜 상품성일까요? 지속가능한 예술을 위해 그렇다고, 생계는 해결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하면, 생계는 왜 꼭 예술을 통해 해결해야 하는가 되묻고 싶습니다. 그러면 좋은 거지, 꼭 그래야 하는 거냐고. 예술을 지속하기 위해 다른 일로 돈을 벌 수는 없는 거냐고 말이지요. 물론 인정욕구에 관한 거라면 그건 별도로 합시다. 예술조차 상품성이 인정의 척도가 되는 자본주의를 살고 있으니 그건 참 복잡하고 떨쳐내기 어려운 유혹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業, 家의 본질에 관해 말하자면 그건 하고 싶은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예술가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일까요? 그건 좀 이상합니다. 예술의 상품성을 인정받아, 예술로 생계를 해결하며, 예술만 할 수 있는 삶은 멋진 삶이겠고 부러운 삶이겠지만, 그게 안 된다고 내가 하는 게 예술이 아닙니까? 나는 예술가가 될 수 없는 겁니까? 게다가 그것 때문에 예술을 포기한다면 너가 그동안 한 건 예술입니까? 사업입니까? 노동입니까?

정원을 가꾸는 취미를 가진 누군가가 열심히 화초에 물을 주고 정원을 가꿉니다. 누가 그에게 ‘정원사 될려고 그래?’라고 말하면 같이 웃겠죠. 그건 그냥 취미니까요. 하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들여서 취미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신발을 수집하기도 하고 심지어 돌도 사들입니다. 그건 모두 이해합니다. 그러면 예술은 안됩니까? 전 재산을 들일만한 가치가 없습니까?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영화를 찍으면 다 돈을 벌어야 하나요? 아, 물론 블록버스터를 제작하고 싶다면 그건 돈이 좀 많이 들겠군요. 뭐 고급 취미, 아니 고가의 취미는 수집의 영역에도 존재하니 어차피 같은 것일 겁니다. 그러나 하자고 들면 뭐든 지속할 수 있습니다. 규모의 문제는 차치하고 일단 행위의 문제라면 하고 싶은 것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흑인은 작가가 될 수 없다거나, 여자는 무대에 설 수 없는 시대도 아니니까요. 돈의 문제라면 누구나 벌 수 있고, 예술의 문제라면 누구든 ‘예술’ 할 수 있습니다. 고맙게도 그런 시대입니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지 않으면 시인도 될 수 없는 시대가 아닌. 문제는 예술과 상업성 그 둘을 결부시키고 그것을 전제로 삼으려는 이상한 사고방식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일을 하다 보면 예술에 집중하기 어렵고 작품성이 떨어진다며, 이번에는 상품성 대신 작품성을 핑계로 댑니다. 그러면 굶어죽으면 안 됩니까? 예술하다 굶어죽으면 안 됩니까?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위해 죽을 수 없습니까? 왜 삽니까?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들을 하고 누리고 즐기기 위해 사는 건데, 그거 하다 죽는 거 이상합니까? 그거 할 수 없어 죽는 거 이상합니까? 그거 나쁜 겁니까?

그러니 우리는 ‘크루소가 예술가가 될 수 있는가’ 라고 묻기보다 ‘그게 좋으니?’ 하고 물어야 할 겁니다. 그게 전 재산(예술가의 전 재산이라고 해봐야 보잘것없을 테니), 너의 모든 시간과 기회비용을 그것에 쏟아도 좋으니? 물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품성이 없어 팔리지 못하는 것과 상관없이 ‘너는 그것을 좋아하는구나, 정말 좋아하는구나. 그러면 너는 예술가네.’ 하면 되지 않을까요?

예술, 藝術, Art란 말의 어원이 경작하다, 가꾼다는 말에서 나왔으니 그것을 하는 이들은 다 예술가인 것이죠. 팔리느냐 팔리지 않느냐는 사업가에게 물을 일이구요. 그러니 어쩌면 ‘예술하고 있네’라는 말은 가장 정확한 말이 아닐까요. ‘사업하고 있니? 장사하고 있니?’라는 질문은 사업에게, 장사꾼에게 해야 합니다.

나는 글쓰기를 사랑합니다. 이렇게 쓰고 나면 쾌변을 본 듯 상쾌하고 가뿐하며 뿌듯합니다. 물론 저조한 조회수는 ‘상품가치 없음’을 다시 확인시켜 주지만, 그건 아직 1%를 다 만나지 못해 그런 거라고, 원인이 ‘독창성 부족’, ‘작품성 결여’라면 더 노력하고 더 연마해야 할 것이고, ‘시대와의 불화’, ‘유행성 결여’라면 그 1%는 여러 세대에 걸쳐 있을 수 있으니 때가 이르기까지 잘 보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어도 할 수 없구요. 정원 가꾸기가 취미인 모든 사람이 입장료를 받고 관람객에게 개방할만큼의 상품성을 확보해야 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러나 이렇게 글을 가꾸는 이 행위를 너무도 사랑하기에 멈출 수 없고, 계속해왔고, 계속해갈 거라고. 그러니 나는 누가 뭐래도 글을 경작하는 ‘예술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검증은 무인도를 찾아낼 대중의 몫인 거구요.

그래서 너의 글은 얼마나 팔렸냐구요? 로빈슨 크루소에게 물어보십시오. 이렇게 굶어 죽지 않고 계속 쓰고 있으니 된 것 아니냐구요. 그리고 또 글을 쓰기 위해 뭐라도 할 거라고. 무인도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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