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용성의 괴물과 싸우는 일

by mmerlin

[멀린’s 100] 2018.02.05 l M.멀린  

 

효용성의 괴물과 싸우는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두 효용성의 노예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효용성은 말 글대로 효용이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는 일입니다. 그것은 매우 자로 잰 듯 우리 곁에서 지랄을 떨어 댑니다. 효용성이 있어? 효율적이냐고?

효용성에 비해 효율적이란 말은 그나마 낫습니다. 무언가 효율적이냐 비효율적이냐 하는 말은, 수고를 좀 더 해야 하느냐 아니면 수고를 좀 덜 수 있느냔 말이기 때문입니다. 수고는 뭐 쫌 더 하면 됩니다. 비효율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그냥 감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신 불평 정도를 늘어놓을 뿐입니다. 그러나 효용성.. 이 효용성의 측면에 들어서면 우리는 날카로워집니다. 효용성이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건, 말 그대로 손해 보는 일이고 쓸데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 무엇의 효용성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쓸 데 있는 일인지, 하면 도움이 되고 이득이 되는 일인지는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고라는 것을 하는 겁니다. 사람이 사고라는 것을 하는 것은 이 효용성을 따져보자고 하는 일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 사고라는 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이 쌓은 사고의 폭 안에서 제한되는 것이니, 어떤 일과 무엇의 효용성은 말 그대로 내 사고의 경우 또는 내 사고의 폭 안에서만 효용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뿔싸!’ 하게 되는 겁니다. 내 사고의 경계를 벗어난 무엇의 효용성이 드러나지는 순간, 무릎을 탁 치거나, 쥐구멍을 찾고 싶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 효용성 없음을, 무식하고 강력하게 주장해 왔더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자 어쩌겠습니까? 무엇의 효용성에 대해서 논할 때 신중한 사람은 일단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음.. 음.. 하게 되는 겁니다. 그건 아니고! 그건 이렇고! 하기 전에 ‘음..’, ‘음..’ 하게 되는 겁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음..’, ‘음..’ 하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유부단입니까? 우유부단은 결단에 관한 것이니 그것은 아직 우유부단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일단 효용성에 대해 판단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음.. 음..’ 하더라도, 뭐 선택은, 결단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뭐 효용성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해보지 뭐!

하던가

음.. 효용성을 잘 알 수 없으니 일단 기다려 보자.

할 수 있는 겁니다. 무턱대고 그건 아니지! 그건 매우 쓸 데 없는 짓이야! 하고 속단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쓸 데 없는 짓. 그건 없습니다. 세상에 모든 작용은 다 쓸 데 있는 짓입니다. 나비의 날갯 짓 하나로 태평양에 태풍이 일어나는 데, 어떤 짓인들 영향을 주지 않는 일이 있겠습니까? 나의 어떤 짓에 세상만사가 영향을 받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이득을 얻는 이들이 있고, 손해를 보는 이들이 있고, 이번에는 그냥 지나가는 이들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냥 지나가는 이들 또한 게이지 한 칸을 채우게 되는 겁니다. 그게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지 모르나 어쨌든 여파 하나를 얻는 겁니다.

그러니 효용성, 도대체 효용성 없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느냔 말입니다. 물론 내 입장에서, 각자의 입장에서, 정해 놓은 목표와 관련하여 효용성이 있다 없다 하는 말인 거 다 압니다. 그러나 그 목표에 도달하는 길과 방법이 내가 생각하는 그 길과 방법뿐이겠습니까? 그래가지고야 어찌 태풍을 일으키겠느냔 말입니다. 우리가 일을 해나가다 보면 수많은 변수가 튀어나오고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전개되는 것이 오히려 진리이거늘, 그 변수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지금의 이 국면, 그리고 고민하고 있는 이것이, 어떤 쓸모를 가지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효용성, 그것의 잣대를 사후적으로나 평가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건 해 보았더니 쓸모가 있었어.’, ‘그건 효용성이 있을 줄 알았는데 별 쓸모가 없더군.’ 그런 사후평가를 내릴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쓸 데 없는 짓’, 해도 됩니다. 뭐든 ‘효용성’, 미리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효용성을 가질지, 쓸모없는 짓으로 끝 날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니, 일단 하고 볼 일입니다. 눈앞에 뻔히, 실패할 것이 명확해 보이는 일조차 쓸 데가 있습니다. 개 똥도 쓸데가 있는 데 하물며.. 찾으면 없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다고 효용성을 개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디 쓰일지 모른다고 모든 걸 다 쥐고 있다간,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 무엇, 누구의 효용성은 너의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쓸만 한가? 그것이 쓸모가 있을까? 판단하는 마음은 나의 심사에 있습니다. 직관이 이끄는 대로, 너의 마음이 반응하는 대로 그것을 들었다 놓았다 해 보십시오. 그러면 너의 가는 길에 무엇이 쓸만한지 알게 됩니다.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험치와 연륜이 쌓여 무엇을 보면 턱하고 쓸모를 알게 되는 겁니다. 노련한 주부가 시장에서 채소를 탁 들어보기만 해도, 그 신선함의 정도와 맛의 유무를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서 효용성, 그것은 직관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물과 일, 사람의 효용성은 너의 직관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우리는 호응을 이룰 것인지, 그렇지 못할 것인지. 직관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관을 개무시합니다. 너의 사고의 폭이 그만큼이기 때문입니다. 사고로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고는 직관을 뒷받침해 줄 뿐입니다. 정교하고 예리하게 해 줄 뿐입니다. 판단은 사고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다 큰 일 납니다. 판단은 직관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도박이 아닙니다. 직관의 언어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감 따라 결정하는 일이 도박일 뿐입니다.

모든 상황과 사물, 관계들이 뿜어내는 언어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진지하고 낮은 소리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시끄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듣지 못합니다. 머릿속이 너무 시끄럽기 때문입니다. 그 작은 머리로 사고란 것을 한답시고, 온갖 사람들의 말과 되도 않는 이론들의 주절거림으로 머릿속을 채워놓았기 때문입니다. 조용해 줄래?..

닥치고 나면.. 만물의 언어가 들려옵니다. (그것도 좀 시끄럽습니다만.) 그리고 길 위에 그 언어들이 놓입니다. 갈 길이 명확히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가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하지만 길을 모르게 되지는 않습니다. 효용성, 그것은 그때에 빛을 발합니다. 만물과 직관적으로 소통하게 되는 순간, 효용성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길, 하나의 방법이 아님을 알게 해 줍니다. 내 멋대로 온갖 짓을 다해도 결국 가야 할 곳에 가고, 있어야 할 곳에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때에 효용성은 괴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직관을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효용성, 그것을 숭배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사고의 폭 안에서 괴물이 되어 마구 재단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일, 무엇, 그리고 관계들 사이에 마구 끼어들어 자기 혼자만의 잣대를 들이대고, 마구 칼질하며 재단하여 모든 관계를 난자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혼자가 되는 겁니다. 두 팔을 내저으며 효용성의 칼질을 해 대는 이에게 다가갈 수 있는 만물은 없습니다. 그는 유리되어 혼자만의 세상에서 온갖 지적질을 해대는 겁니다. 그리고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책임! 책임 말입니다. 실은 책임지고 싶지 않아 효용성을 들이댄 겁니다. 그 괴물을 놓아준 겁니다. 그런데 그게 도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겁니다. 혼자 남았으니 책임도 혼자만의 몫이 되는 겁니다. 그 괴물과 이제는 이별해야 할 때입니다.

효용성, 직관의 뒤를 따르는 효용성을 즐겨야 합니다. 그것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책임은 직관이 집니다. 직관은 책임감이 강합니다. 그것은 만물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관을 따르기 시작할 때 만물은 우리를 책임집니다. 그들이 인도하는 길 위에 있는 이상 그들은 우리를 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니 효용성, 따질 일이 아닙니다. 닥치고 직관에 마음을 열면 그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에는 아무거나 해도 됩니다. 뭔 짓을 해도 됩니다. 그래봐야 운명의 손바닥을 못 벗어난다는 깨달음만 남을 뿐입니다.

2019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그러니 올해는 아무거나 하십시오.
효용성 따지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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