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을 하자

2011.04.03

 

‘욕欲’이라는 말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관은 무엇이니? ‘욕심’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르니?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에 관한 포기, 불필요한 절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한 자기학대.. 이런 것으로 ‘욕심’이라는 말이 오염되어 있다면 너는 앞으로 이 단어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니?

우리가 ‘욕심’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장은 실은 ‘결핍’이라는 말로 대체되어야 하는 상황들이란다. ‘저 사람은 욕심이 많아’ 라고 얘기할 때 상대의 행동은 대부분 결핍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야. ‘탐욕’은 말이지 채워도 채워도 충족된 느낌이 없기 때문에 또다시 채우려 드는 반복된 행위일 뿐이야. 그러니까 결핍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일 뿐이지. 욕심이란 채워지면 사라지게 마련이다. 어디인가, 무엇인가, 채워져야 할 결핍이 채워지지 않은 상태일 때 우리의 몸과 마음, 정서는 ‘욕’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거야. 그것은 갓난 아이가 배가 고프다고, 기저귀를 갈아 달라고, 빨리 재워 달라고 우는 것과 같이 자연스러운 신체적, 정서적 반응일 뿐이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 ‘욕’에다 엄청난 굴레를 씌워놓았단다. ‘욕’을 ‘탐’ 하는 것은 죄라고 말이지. 얼마나 모호한 말이니? 어디까지가 ‘욕’이고 어디까지가 ‘탐욕’인지는 누가 아는 거니? 누가 정하는 거니? 그렇게 사람들의 본능적 욕구를 통제하는 것이지. ‘욕’을 통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통제 수단이 되는 것이지. 어떤 ‘욕’을 통제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통제 수단이 될까? ‘똥’을 못 싸게 하는 거야. 못참고 결국 터져 나오겠지만… 본능을 통제하는 것만큼 강력한 방법은 없는 거야. 그래서 사회 발달의 정도에 따라 먹는 것을 통제하고, 입는 것을 통제하고, 성적 본능을 통제하고 심지어는 웃음을 통제하기도 한단다. 정서를 통제하는 것은 도리어 쉬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가장 통제하려는 분야는 역시 생각이야.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끔 몸을 혹사시킴으로써 사람을 ‘멍’한 기계로 만들지. 어디냐고? ‘군대’지. 병사는 전쟁하는 기계일 뿐이야. 기계는 오로지 상급 지휘관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여야 하지. 그러니 신병이 입대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얼차려’뿐인 거야. ‘얼’을 차렷 자세로 만들어야 해. ‘얼’도 명령에 의해서만 통제될 뿐이야. 자신의 욕구와 상관없이 모두가 밥을 동시에 먹어야 하고, 잠도 동시에 자야 하고, 배설도 통제를 받아서 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 ‘욕’이 통제된 사회의 구성원들은 모두 병사와 같아지는 거야.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이고 바위처럼 감정이 사라지는 것이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욕’이라면, 그 ‘욕’을 거세당한 존재들은 바위 같은 ‘무생물’일 뿐인 거야. 통제 권력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좋으니,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 말이야.

그래, 군대는 그렇다 치자. 너는 너 스스로에게 어떻게 대하고 있니? 너 자신의 ‘욕망’에 대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냔 말이다. ‘풍선효과’를 아니? 어딘가를 누르면 반드시 다른 어딘가는 부풀어 오르게 되는 현상 말이야. 인간의 ‘욕’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야. 어느 부위를 통제하면 그 결핍은 반드시 다른 부분을 통해서라도 채워지려고 하는 관성을 가지고 있지. 너의 결핍은 반드시 채워지려고 몸부림을 치게 되어 있어. 그것이 ‘생물’의 특징이야. 아무리 절제하고 다스려도 부족한 부분은 채워져야 해. 물이 흐르며 패인 곳에서 고이듯 너의 욕망은 너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들지. 그러므로 너는 너의 지극히 본능적이고 정상적인 욕구가 무엇인지, 어느 부분이 채워지지 않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파악해야 해. 그리고 그 부분을 어떤 식으로든 충족시켜야 하는 거야. 그런데 이미 너는 그러고 있다. 적어도 네가 조금이라도 생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바로 ‘욕’이 작용하고 있다는 방증이니까.

‘욕심’이 너를 생존케 하는 것이야. ‘욕’이 없는 사람은 생존의지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시름시름 죽어가거나 ‘의욕’ 없이 생을 마감하려 들게 되지. ‘우울증’이란 무엇이니? 바로 ‘욕’이 없는 상태가 아니겠니? 이 ‘욕’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결국 너는 살아 있으나 죽은 자가 되는 것이란다. 그러니 살려면 어떻게 해야겠니? 아니 아직 네 안에 ‘욕’이 생존하고 있어 네게 살라고 요동치고 있다면, 너는 어떻게 해야겠니? 너의 결핍을 찾아야 해. 너의 ‘욕을 쫓는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어느 부분에서 결핍이 일어나고 있는지 찾아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 거란다. 마치 엄마가 갓난아이의 울음소리만을 듣고도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이 부족한지 아는 것처럼, 너는 너 자신의 ‘결핍’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이게 배가 고픈 건지, 배가 아픈 건지, 게으른 건지, 에너지가 없는 건지 마음과 몸의 신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단 말이다.

‘욕’은 말이지 물론 대체할 수 있어. 밥 대신 빵, 물 대신 술로 ‘결핍’된 부분을 대체할 수 있어. 하지만, 반드시 채워져야 한다. ‘결핍’은 말이야. 무엇으로든 채워져야 하는 거야. 만족의 정도는 다르겠지만 이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충족되어야 하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중독’은 위험한 것이란다. ‘중독’이란 ‘충족되지 않은 상태’이니까. 단지 충족되었다고 느낄 뿐 여전히 ‘결핍’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상태이니까. ‘중독’은 ‘욕’을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결핍’된 ‘욕’에 마취를 유발할 뿐이지. 술이나 마약, 스트레스 상황에서 피우는 담배, 관계, 분노, 게임… ‘중독’되는 것은 수도 없이 많단다. 그 모든 것들의 공통점은 ‘욕’의 충족이 아니라 ‘결핍’된 상태를 망각시킨다는 거야. 배가 고파서 느끼는 ‘허기’는 음식을 먹으면 해결이 되지. 그러나 마음이 고파서 느껴지는 마음의 ‘허기’를 먹는 것으로 채워봐야 비만이 될 뿐이야. 술에 중독 되고 음식에 탐닉하지. 마음의 ‘허기’는 충족되지 못한 채 ‘허기’를 느끼는 감각만을 마비시키는 거야. 매우 위험하고 아주 무서운 일이다. ‘결핍’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는 내게 어떤 ‘욕’이 부족한지 알아챌 수 없기 때문이야. 아이가 배고프고 아플 때 울어대는 것처럼 말을 할 수 없는 우리의 몸이, 마음이 보내오는 신호가 바로 ‘욕’이고 ‘결핍’인데, ‘결핍’ 상태를 망각시키는 ‘중독’들은 너의 삶을 가만히 앉아서 썩어들게 만들어 버리지. 자신의 삶을 증상이 없어 병든 줄도 모르는 상태로 방치시키게 되는 거야.

자, ‘욕심’, ‘결핍’, ‘중독’, ‘충족’.. 이런 말들의 올바른 의미를 이해 하겠니? 우리의 관념은 이런 단어들을 이상하게 혼용하면서 필요한 것들은 채우지 않고 엉뚱한 것들로 자위하며 삶을 병들어 가게 하고 있단다. 사회와 시스템의 세뇌를 탓하기 이전에 일단 자신부터 알아야 해. 인간의 기본적 욕구, ‘나’라는 개인의 독특한 욕구와 필요.. 이런 전제들이 먼저 충족되고 해결되어야 다양성을 기반으로 한 개성들이 만발하게 되어 있는 거야. 기초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 사회에서는 어떤 창의적 시도도 발생되지 않는단다. 그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야. ‘금강산도 식후경’이고 내 배가 불러야 주위도 돌아볼 수 있지 않겠니? 욕망의 충족이 없는 절제는 고상한 척, 아는 척, 안 배고픈 척.. ‘척’일 뿐이야. 꼬르륵꼬르륵 울어대는 배를 움켜쥐고 다이어트하는 중이라 너스레를 떨어봐야 비참해질 뿐인 거야. 그럼 ‘절제’는 무엇이겠니? ‘충족’된 존재가 ‘결핍’된 존재를 위해 베푸는 아량이고 양보이지. ‘충족’되었기에 컨트롤이 가능한 지극히 여유로운 사람만이 ‘절제’할 수 있는 거야. 갈급한 사람의 ‘절제’는 시한폭탄 같아. 주위 시선과 잘못된 관념, 눈치 때문에 ‘절제하는 척’ 하고 있지만 언제 폭발할지 모르지. ‘결핍’의 한계상황에 다다르면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게 되는 거야. 그래서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지. 그리고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부르게 되는 거야.

죽을 때까지 다 써도 남아돌 거대한 부를 소유한 부자가 계속 돈에 욕심을 낼 때 우리는 ‘탐욕’스럽다고 말하지. 이때의 ‘탐욕’의 의미는 무엇일까? ‘결핍’인 거야. 그는 돈으로 채울 수 없는 결핍된 영역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거야. 그리고 더욱더 갈망하는 것이지. 그 ‘결핍’이 막대한 부로도 ‘마취’되지 않고 ‘욕’을 발하기에 더욱 고통스러운 거야. 방법을 모르는 거지. 아니 어떤 부분이 ‘결핍’되었는지 깨닫지 못하는 거야. 그래서 ‘조금 더’, ‘더욱더’ 부를 쟁취하면 충족될까 미친 듯 돈에 달려드는 것이지.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에 돈을 쏟아붓는 것이지. 좀 더 움켜쥐었을 때의 쾌감에 중독되어 ‘더 더’를 외치지만 그의 마른 샘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고 있는 거야. 그의 마른 샘을 충족시키는 그것은 어쩌면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 마디일지도 몰라. 그의 ‘돈’이 아닌, 존재에 대해 ‘사랑한다’말해주는 단 한 사람일지도 몰라. 많은 사람들이 정작 채워야 할 그 ‘결핍’이 무엇인지 몰라서, 엉뚱한 것들로 꾸역꾸역 자신을 채워대다가, 종국에는 과도한 압력을 준 풍선처럼 ‘뻥’하고 터져 버리고 마는 거야.

너는 무엇에 목마르니? 네 마음이 간절히 ‘욕’하고 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가열차게 거절해대고 있는 그 ‘욕’은 무엇이니? 살펴보렴. 너의 그 ‘결핍’이 충족되지 않으면 너는 아무런 꿈도 꿀 수 없어. 꿈은 충족된 존재의 ‘욕망’이야. ‘결핍’된 존재의 ‘욕망’은 꿈이 아니라, 그저 생.존.본.능.일 뿐인 거야. 꿈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너. 꿈이 없다고 말하는 너는 아직 충족된 인간이 아닌 것이다. 아직 꿈꿀 수 있는 ‘충족된 인간’이 아닌 것이다. 꿈꾸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너는 어쩌면, 내 꿈은 이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너는 어쩌면, 그것을 이루어 본 뒤에 깨닫게 될 거야. 이것은 꿈이 아니라 ‘결핍의 충족’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겨우 오랜 ‘결핍’을 충족시키고 꿈꿀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러므로 무언가 도전하는 일은 그것이 ‘결핍’에 관한 것이든, ‘꿈’에 관한 것이든 바람직한 일이다. 어쨌든 충족된 후에야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물론 이것이 ‘꿈’인지 ‘결핍’에 대한 갈망인지 구분해낼 방법은 있단다. 거울을 바라보고, 거울 속 너 자신에게 묻는 거야.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이것을 계속 갈망할 것인가?’  
‘모든 것을 다 걸고도, 이것을 이루어내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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