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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우스펜스키는 스스로의 결정에 따라 구르지예프와 절교하기로 결심했던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다른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오히려 그것은 구르지예프의 결정이었던 것 같고, 구르지예프가 우스펜스키를 그렇게 떠나보낸 것은 달을 보지 못하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을 고집스럽게 들여다보는 지나치게 이지적이기만 했던 우스펜스키를 교정하기 위해, 우스펜스키로 하여금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의도였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스펜스키는 말년에 스승이었던 구르지예프를 그리워하며 그와 헤어지게 된 것을 눈물로 후회하면서도 그러한 자신을 끝내 돌이키지 못하고 쓸쓸히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_ 구르지예프의 길, 우스펜스키(역자 서문)

700페이지가 넘는 이 길고 긴 양사나이에 관한 글에서 정작 가장 좋았던 것은 바로 저 역자 서문이다. 이 양사나이는 마법사를 닮았다. 그리고 절교를 시전한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이 나를 몹시 놀라게 했다. 만약 구르지예프가 언급한 것이 진심이라면 애초에 왜 시작은 했는가? 이 기간 동안 새로운 어떤 것도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만약 구르지예프가 변변치 못한 우리와 함께 수련을 시작했다면 왜 지금에 와서 그만두려고 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구체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코카서스에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여전히 약간을 불확실했던 우리 모임의 다른 구성원들에게는 구르지예프의 갑작스러운 말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으며 어려움을 극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순간부터 구르지예프에 대한 나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특히 무엇이 나를 화나게 했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 순간부터 내 안에서 구르지예프라는 인간과 그의 생각 사이에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때까지 나는 그 둘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 있지 못한다. 왜 갑자기 양사나이가 춤을 멈추었는지. 그리고 신뢰가 흔들렸다고 말했다. 기대어져 있었다는 말이다. 자신의 춤을 추고 있었다면 흔들릴 신뢰 따위는 없다. 회전반경이 달라졌을 뿐. 모임은 해산되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모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를 뒤돌아보면 사람들은 개인으로 다루지 않고 집단으로 다루어 왔던 정치나 종교, 또는 여타의 조직적인 행동 모두 실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앞으로도 실패할 것이 뻔합니다. 인간 각자를 개별적으로 따로 다루어 성장시키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인간은 각자 자라난다. 숲의 어떤 나무도 각자 자라지 않는 것이 없다. 각자 자라나 숲을 이루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장은 개인의 몫이지 모임의 몫이 아니다. 그것이 개별자로서의 인간을 존중하는 예의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모임들은 참으로 무례하다.

집단의 유닛으로써 인간을 다루는 어떤 모임들도 괴랄하다. 그것은 참기 힘든 무례를 민주주의로 치장하고 개인을 착취해 댄다. 인간은 단독으로 우주를 이룬다. 그러기 위해 성장해 가는 것이다. 우주가 끝도 없이 팽창해 가듯. 그러므로 모임이 필요하다면 개인의 성장을 위해 그렇다. 그리고 개인의 성장을 위해 모임은 해산되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 우연이라 생각했던 어떤 이유와 우리들 소모임의 특정 구성원들 간의 마찰 때문에 구르지예프는 모임 전체를 해산하고 모든 수련을 정지하겠다고 선언했다. 처음에 우리는 그가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단순히 그를 믿지 않았다. 그가 Z와 함께 단둘이 흑해 연안으로 가려고 한다고 말했을 때 모스크바나 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가야 할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라가겠다고 하자 구르지예프는 이에 동의했으나 우리가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고 우리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생각하더라도 더 이상의 수련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임의 일원이라고 생각한 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성장이 아닌 소속을 필요로 하는 이라면 군대에 입대하면 될 것이다. 모임은 일시적이고 이벤트적이다. 성장은 각자의 몫이고 각자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모였으면 흩어져야 한다. 그것에는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인생의 레이스는 계속된다.

양사나이는 단호하다. 그의 삶이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타협이 없고 자신에게도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조직도, 모임도 순탄치 않았다. 남긴 저작도 거의 없으며 존재하다 사라졌다. 하지만 누군가 기억하고 찾아내게 만든다. 양사나이를 쫓는 춘자들처럼.

아마 도토리 한 개만이 자라 참나무가 되겠지. 아니면 한 개도 참나무가 안 될지도 몰라. 자연으로부터 배워야 해. 인간 역시 자라나는 유기체란다. 자연은 수많은 도토리를 만들어 내지만 참나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도토리는 몇 개 되지 않아. 인간도 마찬가지야.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지만 자라나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이것을 낭비라고 생각하고 자연이 낭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아. 참나무가 되지 않은 도토리들은 거름이 되어 땅으로 돌아가 장차 더 많은 도토리를 만들어 내는 가능성을 만들어 낸단다.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면 이따금 더 많은 나무 – 더 참된 사람 – 가 자라나게 된다. 자연은 항상 주기만 하지만 오로지 가능성만을 줄 뿐이란다. 진짜 참나무가 되려면, 즉 참다운 인간이 되려면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는 알고 있겠지. 이 강습소에서 사람들이 나와 더불어 수련하고 있는 것은 참다운 인간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지, 거름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영혼의 성장을 추구하는 어떤 모임도, 공동체도, 거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만, 결과물은 언제나 거름같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해산하는 공동체, 흩어지는 모임에는 성장하는 개인이 배출된다. 그리고 그것은 소수이다. 소수냐 다수냐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게 나냐 아니냐만 중요할 뿐.

양사나이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영혼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영혼의 씨앗을 가진 이들이 그것을 성장시켜서 영혼을 신에게까지 완성시켜 가는 것이 삶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거름으로 썩어진다. 누군가의 성장을 위한 경험의 비료로 말이다. 많은 비료를 흡수하여 마법사가 되었다. 영혼의 성장을 위한 고군분투는 나를 위한 것이지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생명을 가진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힘겹게 몸부림쳐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뒤돌아보면 이를 악물고 분투했던 고난의 날들이 기억에 선명하지만 어차피 우리의 삶은 투쟁입니다. 인생이란 양날을 가진 칼이고 인생에는 두 개의 강이 나란히 흐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생에서 오로지 행복과 즐거움만을 추구하는데 이는 인생을 오해한 것이며 행복은 아무것도 아니고 불행의 다른 면일 뿐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인간은 성장할 수 없지만 고통을 당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은 오직 고통스러운 자신만을 생각하고 고통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단일한 참된 ‘나’를 가진 사람은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의지로써 고통의 실체를 배워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과거의 즐거움이란 녹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작년에 내린 눈과 같아 현재의 인간에게는 소용없는 것이고, 어렵고 힘든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고 깨어나 힘써 노력하는 것만이 참된 것이며 미래의 수확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강은 세속의 강이 아닙니다. 나의 강은 깨달음으로 이끄는 강입니다. 나의 강을 따라 흐르는 사람들은 파리를 코끼리로 물을 포도주로 만듭니다. 세속의 강을 따라 흐르는 사람들은 코끼리를 파리로 포도주를 물로 만들어 버리지만 말입니다.

춘자는 단호하게 거름 따위는 필요 없다고, ‘노오옵!’을 시전한다. 춘자의 관심은 오로지 자라나려 애쓰는 도토리들뿐이다. 밟아도 가지를 뻗는 도토리들. 그러므로 모임을 기대하는 관중이 있다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며 자위의 성수를 뿜어주는 모임장들이나 찾아 나설지어다. 여기는 양사나이의 돌핀호텔, 고립을 통해 몰입으로 나아가라 채찍질하는 고문의 현장이다.

물론 공짜일 리 없다.

구르지예프가 모스크바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하기를, 그의 표현대로 하자면, ‘사람들의 준비 상태와 역량에 따라’ 각자 서로 연관이 없고 다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두 모임을 지도하고 있다고 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각자 일 년에 1천 루불의 수업료를 내고 있었으며, 그들 나름대로의 일상적인 활동을 추구하면서 그와 더불어 수련하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달리 생계 수단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 년에 1천 루불은 꽤 큰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구르지예프는 수련의 성격 때문에 많은 제자들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별다른 방법이 없었노라고 대답했다. 또 그는 수련하는 것을 조직하기 위해 자신의 돈을 쓰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그는 이 말을 강조했다) 말했다. 그가 이끌고 있는 일은 자선적인 성격의 것이 아닐뿐더러 그럴 수도 없고 그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모일 수 있는 아파트를 빌린다든지 실험을 실행할 수 있는 수단과 기타 수련에 필요한 수단들을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자신이 살펴보니 인생에서 약한 사람들이 수련하는 데도 약하더라고 덧붙였다.

“이러한 생각에는 몇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구르지예프가 말했다. “누구나 수련을 하자면 비용이 들기도 하고 여행을 떠나야 하거나 기타의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인생이 엉망으로 꼬여서 1천 루불이 놀라운 금액으로 여겨진다면 차라리 이 수련을 시도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누군가 수련 중에 카이로나 다른 장소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칩시다.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요구 사항을 통해 그가 우리와 함께 수련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게 됩니다.”

구르지예프는 계속 말했다. “더구나 그들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확신조차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희생할 여유 시간이 나에게는 거의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일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이전에 말했지만, 시간을 비생산적으로 쓸 수도 없고 그렇게 쓰고 싶지도 않기 때문에 내 시간을 아주 가치 있게 여깁니다. 또 한편 다음과 같은 측면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대가를 지불하지 않을 것에 대하여는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구르지예프가 하는 말 모두가 마음에 들었다. 그가 하는 말에 감정의 찌꺼기가 전혀 없다는 점, 그리고 ‘인류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등의 통상적인 ‘이타주의’ 적인 말들이 없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다른 한편으로는 돈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는데, 나로서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믿게 만들려는 구르지예프의 태도가 뚜렷해 놀라웠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구르지예프가 그가 말한 대로 충분한 돈을 모금할 수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내가 만나 본 그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일 년에 1천 루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인생에서 약한 사람들이 수련하는 데도 약하다고 양사나이는 말했다. 약한 자는 거름이 될 뿐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거름 따위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양사나이도 춘자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일 년에 1천 루불을 지불할 수 있어야 한다. 춘자는 멤버십을 모집하고 있고 남은 자리는 몇 개가 되지 않는다.

춘자 인사이드 멤버십 얼리버드 프로모션

춘자는 많은 비용을 지불했고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양사나이가 그랬던 것처럼 모임을 조직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성장을 위해, 영혼의 획득을 위해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을 지불했고, 그로써 그는 자신이 인생에 강하고 수련에 약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했다. 그러니 이 멤버십 역시 모임을 조직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양사나이의 돌핀호텔과 춘자의 친절한 채찍질을 당하기 위해 지불되는 비용임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환불 따위는 없다. 인생이 그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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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펜스키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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