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홀에서 아브라카다브라
Dec 12. 2023 l Bergama

새는 알에서 나오기 위해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누구든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여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_ 데미안, 헤르만 헤세
파괴하지 않고는 신에게 날아갈 수 없다. 버가모 교회의 터는 원래 이집트 세라피스(Serapis)의 신전이었다. 그 신전을 지키고 서 있는 이는 파괴와 재생의 신 ‘세크메트(Sekhmet)’이다. 이집트의 신 라(Ra)는 인간들이 반항하다 도망치자 세크메트에게 자신의 힘이 담긴 눈을 주며 인간을 벌하라고 명했다. 그러자 이 파괴의 신은 제대로 대학살을 벌이는데. 당황한 신은 제지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세크메트는 “인간들을 죽이면 당신(라)의 기운이 담긴 그들의 피가 나의 심장에 환희를 줍니다.”라면서 대학살 파티를 멈추지 않았다. 이에 라는 세크마트를 취해 잠들게 하고는 둘로 나눠버리는데, 하나는 파괴의 신 세크마트와 다른 하나는 사랑의 신 하토르(Hathor)이다.

이렇듯 세크메트는 신이 인간의 죄악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본능을 상징한다. 인간을 질병으로 고통스럽게 벌하지만 동시에 숭배자들에게는 병마를 피하게 해주는 치료의 신이란 면모도 있다.
태양신 라의 힘의 현현이자 전염병과 자연재해를 지배하는 권능을 지녔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병과 전염병에 대한 해독제를 지니고 인류에게 닥쳐오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힘을 지닌 것으로 여기고 숨을 쉴 때마다 불길이 나왔다. _ 나무위키
한마디로 병 주고 약 주는 신이다. 성서의 신은 선善 그 자체이지만, 그래서는 악惡을 처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탄은, 악은, 누가 창조했느냐? 신이 창조했다면 왜 창조했느냐고 의문을 갖는다. 사탄을 신이 창조했으면 없애면 그만일 것이다. 없애지 않고 놓아둔 채로 사람을 약 올리니 신은 악마인가? 돌고 도는 이 물음에 신학적 주장을 늘어놓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언젠가 깨달음에 이르면 ‘그렇게 깊은 뜻이!’ 하게 될지는 모르겠다만, 우리는 그저 피조물로써 알고리즘을 따라야 하겠지.)
그런데 데미안의 신은 성서의 신을 초월한다. 아브락사스, 그는 자신 안에 선과 악을 모두 품고 있다.
칼 융은 1961년 <죽은 자들에게 주어진 7강의들>이라는 짧은 영지주의적인 글을 썼다. 여기에서 칼 융은 모든 대립물이 한 존재속으로 결합된 신이 아브락사스이며, 아브락사스는 기독교의 신이나 사탄보다 더 고차적인 개념의 신이라고 하였다.
_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아브락사스 / @isis-lee

여러분들이 전혀 알고 있지 못한 신이 하나 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그에 대해서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아브락사스라고 부르며 이것이 그의 이름이다. 아브락사스는 헬리오스나 사탄보다 더 불분명한 신이다.
아브락사스는 활동이다. 비실재를 제외하고는 그 아무것도 아브락사스에게 대항할 수 없다. 아브락사스는 태양 위에 있으며 사탄 위에 있다. 태양신의 말씀은 생명이다. 사탄의 말씀은 죽음이다. 아브락사스는 거룩한 말씀과 저주의 말씀을 모두 말하는데 이는 생명과 죽음이 동시에 함께 있는 것이다. 아브락사스는 같은 말, 같은 행위 속에서 진실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을 함께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락사스는 경외로운 존재다.
_ 칼 융
그렇다면 여호와는 사탄의 그림자이고 무의식일 것이다. 물론 그 역으로도. 그리고 그 둘이 통합된 존재가 아브락사스일 것이다. 그러면 파괴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브락사스에게 날아가기 위해 파괴해야 할 알은 대체 무엇인가?
사람은 초월된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을 날 받아놓은 늙은이처럼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며 좋은 일이 있으니 곧 나쁜 일이 있을 거야, 나쁜 일이 있었으니 곧 좋은 일이 있겠지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건 인생이 아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은 어떤 때는 기쁨이었다가 어떤 때는 슬픔이고, 어떤 때는 환희였다가 어떤 때는 절망인 것이지, 평지 위를 슬슬 기어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해탈일 텐데, 해탈하고자 하는 욕망은 태어남을 저주하는 행위와 같다. 그건 부모에게 왜 나를 낳았냐고 원망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런다고 생生이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나무아미타불 한다고 세크메트의 대학살에 태연자약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가 뿜어내는 불길은 無의 깊은 잠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를 화들짝 일깨운다. ‘이런 씨발’ 하고 참선에 든 수행자에게 알을 깰 동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잠들지 말고 날아오르라고. 분열과 융합을 반복하며 동력을 생산하는 원자력처럼 이원론이야말로 삶의 동력인 것이다.
버가모와 에베소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속칭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원론이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_ 요한계시록 2장 14~16절

영지주의는 온갖 다양한 교리와 입장을 하나로 퉁친 것이라, 대표되는 어떤 하나의 집단이 있는 것이 아닌데, 공통된 것은 육체와 물질은 타락한 것이라고 믿는 이원론이다. 한쪽 극단은 육체를 경멸하며 금욕에 빠져 들었고, 다른 한쪽은 구원은 영혼에 관한 것이니 육체적인 어떤 것도 죄가 되지 않는다며 쾌락과 음행에 빠져들었다. 기독교는 전자의 영지주의적 흐름을 계승하고, 버가모 교회와 에베소 교회를 혼란스럽게 한 발람과 니골라당의 흐름은 후자에 속한다. 금욕파와 욜로족의 대결 같다고나 할까?
아브락사스는 결국 이원성의 통합을 의미한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 즉 성과 속이 하나이며 시작이 곧 끝이 씨앗이고 곧 열매이며 어둠이 곧 빛인 것이다. 이 양극성이 통합이 되면 이는 공0이 된다. 공의 속성은 반야심경에 잘 묘사되어있다.
“모든 법의 모양은 공으로서 태어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_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아브락사스 / @isis-lee
이러한 세계는 빅뱅 이전의 세계다. 모두가 하나의 점에 잠들어 있던 세계. 우리는 그 세계를 깨고 날아올랐다. 그런데 금욕주의자들은 생로병사의 인생고(人生苦)만 주장하며 그 점으로 돌아가려 한다. 쾌락주의자들은 한 번뿐인 인생이라며 그 점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인생은 멈추지 않는 고(苦)만이 아니며, 끝날 줄 모르는 락(樂)의 연속도 아니다. 인생은 고(苦)의 순간과 락(樂)의 순간이 생사(生死)와 함께하는 찰나의 연속이다. 시작과 끝이 있는. 그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나으니까. 살아 있으나 죽은 자는 어떤 선택도 하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것은 알을 깨려는 노력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알을 깨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쾌락주의자들의 반대편에 서서 금욕으로 중세의 소빙하기를 견뎌냈고, 자원과 기술이 폭발하기 시작한 산업혁명기에 이르러서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극한까지 탐욕하고 정복하고 지배했다. 순교자들이 인간사냥꾼이 되어 세크메트의 대학살을 자행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들이 세운 문명 위에 살아간다. 금욕과 탐욕의 이 이율배반적인 양극성을 모두 품어낸 이들이야 말로 알을 깨고 나온 참된 아브락사스의 데미안들일 것이다. 모두가 선망해 마지않으며 모두가 지탄해 마지않는.

_ 붉은 벽돌로 지어져 ‘레드홀’이라 불리는 페르가몬의 세라피스 신전은 교회로도 사용되었다.
인생의 어떤 때에는 알이 악으로 뎊여 있고, 어떤 때에는 악이 선으로 덮여 있다. 그리고 우리는 신을 경험하기 위해 매번 그 선과 악을 대면하고 뚫어내야 한다. 그 껍질은 어떤 때는 하토스로, 또 어떤 때는 세크메트로 우리에게 현현하지만, 어떤 이는 하토스만을 숭배하느라 언제나 세크메트에게 쫓기나, 세크메트에게 영혼을 판 어떤 이는 오히려 하토스로 충만해진다. 세크메트가 하토스에게 되팔아버렸기 때문이다. 이 양극성 순환의 경험을 포기해선 안된다.(되지도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확장해야 할 존재이지, 그것을 종결지으러 세상에 내려온 터미네이터가 아니니까. 그러므로 여호와와 사탄은 지금도 전쟁을 벌이고 그 전쟁의 전사가 되겠다고 신도들은 성전(聖戰)을 이어가고 있다. ‘마귀들과 싸울지라, 죄악 벗은 형제여!’를 외치며.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적이 필요하다. 교인인 주제에 쾌락에 젖을 수는 없으니 (그 진영은 이미 니므롯과 세미라미스가 점령해 버렸으니까) 스스로를 죄책감의 감옥에 가두어버리는 것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러나 정작 예수는 십자가에서 그 두 세계를 통합해 버렸다. 죄 없는 자가 죗값을 치름으로써. 복음은 그것이다. 인간으로서 신을 경험하고 신성의 부분으로써 인간의 삶을 경험하는 것. 일상과 기적을 동주하도록 나의 시공간을 아브락사스에게 내어주는 것. 그리고 기쁘고 슬프고, 놀랍고 지겨운 일상으로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 그것만이 진실이다.
그러므로 금욕하겠다는 너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자위하다 들켜서 쪽팔리는 일은 감수해라. 그래야 금욕의 욕구가 더 강해질 테니. 쾌락에 자신을 팔아버리려는 너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자극의 끝은 무욕임을 최대한 천천히 깨닫게 되기를 기도하마. 그러나 아브락사스의 신에게 가려면 반대의 것들이 만나 합을 이루어야 하니, 금욕주의자가 쾌락을 수용하고 쾌락주의자가 욕망을 금하는 순간이 신에게 가는 순간이고, 그것은 하나의 생이 끝났다는 선언이다. 생은, 인생은, 하나의 극단과 다른 극단을 모두 경험하기 위해 선사된 선물이다. 신은 친히 피조물이 됨으로써 두 세계를 경험하고 통합했다. 그게 예수다.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신.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하나의 삶에 두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아브락사스의 신이 내린 선물을 누려야 할 것이다. (이 정도 말하면 이단 선언이 되겠지. 하지만 따르는 이가 없어 당을 짓지 못하니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만.)
마법사는 세라피스 신전의 레드홀 앞에 우뚝 선 세크메트 신에게 기도했다. 청컨대, 이제 대학살의 파티를 시작해 달라고, 마법사의 등골을 빼먹어 달디 단 그들의 피와 절망으로 성만찬을 즐겨달라고, 그래야 희생과 헌신, 관대함과 긍휼로 점철된 마법사의 삶에 균형이 찾아올 테니, 그래야 마법사도 알을 깨고 아브락사스의 신에게 한 걸음 더 나아갈 테니. ‘아브라카다브라(Abracadabra)’ 주문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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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적 순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