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가몬에서 탄생한 두 개의 혁신

Dec 12. 2023 l Pergamon (Bergama)

이 도시에서 읽기의 방식이 바뀌었는데 그러니까 두루마리 형태의 스크롤 방식에서 옆으로 넘겨 읽는 페이지 방식으로의 전환이 일어났다. 그것은 고대 왕들의 지식 경쟁에서 비롯되었다.

고대의 3대 도서관이라고 하면 50만 권의 장서를 보유했던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과 여기 이 도시 페르가몬의 페르가마 도서관이 20만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었다. (3위는 에페수스의 셀수스 도서관으로 2만 권) 탑티어 라이벌 도서관의 장서 경쟁은 치열했는데 페르가몬 왕국의 에우메네스 2세가 장서를 집중적으로 불려 나가자, 위기감을 느낀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페르가몬에 아예 파피루스 수출을 전면 중단시켰다. (반도체 공급을 중단시킨 셈) 빡친 에우메네스 2세는 신하들에게 파피루스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재료를 찾으라고 명하고 신하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새로운 기록체를 개발하는데 그게 바로 ‘양피지’다.

곰팡이가 생기거나 손상되기 쉬운 파피루스에 반해 양피지는 내구성과 보존성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섬유 특성상 양쪽 면을 모두 사용할 수 없었던 파피루스에 비해 양쪽 면을 모두 사용할 수 있고 지우거나 고쳐 쓸 수도 있어 기록의 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 파피루스에서 양피지로의 변환은 마치 만화책에서 웹툰으로의 변화만큼 혁신적인 읽기 방식의 변화를 야기했는데, 기존 두루마리의 ‘내려 읽기’ 방식에서 구멍을 뚫어 낱장을 묶어 냄으로써 ‘넘겨 읽기’의 방식으로의 혁신을 일으켰다. 덕분에 책의 내용을 검색하는 데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을 현저히 절감시켰을 뿐만 아니라 보관과 전달의 방식에 현격한 용이성을 가져다주었다. 이런 이유에서 양피지를 양피지를 헬라어로 ‘페르가멘트(Pergament)’, 라틴어로 ‘페르가멘툼(pergamentum)’, 영어로 ‘파르츠먼트(parchment)’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독점의 폐해는 오히려 파괴적 혁신을 불러온다. 세상 무엇도 그렇다. 자기만 소유하려는 욕심은 오히려 대체제를 불러오고 그 대체제는 기존의 것보다 더 혁신적이기 마련이다. 목숨이 걸려 있으니까. 독점의 패러독스이다.

양피지가 초래한 읽기 방식의 변화는 지식 축적에 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져왔다. 축적과 검색의 용이성. 상상해 보라. 도서관의 그 많은 장서들이 모두 두루마리로 되어 있다면 원하는 내용을 어디서 어떻게 찾을 것인가? 지금의 파일 저장 방식도 종이책의 직관적 검색에 비해 편한 것 같지만 직관 연결성을 제한하는 좋지 못한 방식이다. 묶인 책은 책장을 후루룩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직관적 정보를 제공한다. 표지와 목차 페이지 구성에서 이미 책의 내용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파일은 말이지, 제목만 보고 그것의 무엇을 짐작해야 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만듦새만 보고도 낚시인지 아닌지를 가늠케 하는 물성의 그것에 비하면 낚일 가능성이 훨씬 농후한 것이다. 스크롤은 더 그렇지 않은가? 후루룩 넘겨보는 책장은 몇백 페이지여도 원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는데, 스크롤 방식은 휠을 두세 바퀴만 내려도 벌써 피곤해진다. 인간이 접할 수 있는 정보가 그만큼으로 한정되고 그 안에서 독자의 마음을 끌어야 하니 점점 자극적일 수밖에. 그러다 결국 귀찮아져서 ‘읽기 비서’를 만들어 낸 것 아닌가. 필요한 정보만 얻으면 예상되는 대응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묶인 책이 제공하는 정보 감수성은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것에서만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서점과 도서관에 들어서는 순간 쏟아져 들어오는 시각 정보들, 책장과 책장, 책과 책 사이에서 말을 걸어오는 수많은 메시지들. 그런 무의식적 정보 캐치의 방식이 평상시에 훈련되어 있지 않으면, 예기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을 때 어떻게 빠르게 정보를 직관하고 대응해야 할 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쳇, 지피티에게 물어보면 된다고? 일촉즉발의 급박한 상황에 언제 물어보고 있어? 휴대폰 배터리는 언제나 빨간 불이면서. 암튼 이 도시가 개발한 지식 축적의 방식은 실제로 수많은 생명을 구하게 되는데..

이 고대 도시에는 메디컬 센터가 있다. 종합 의료타운 ‘아스클레페이온(Asklepieion)’이 그것이다. 아스클레페이온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의 신전이자 종합 의료센터이다. 그리스 펠로폰네소스의 에피다우로스(Epidauros)와 코스(Kos) 섬의 아스클레페이온과 더불어 3대 아스클레페이온으로 소아시아 지역 최고의 의료센터였다고. 병원뿐만 아니라 신전, 도서관, 목욕탕, 원형 극장 등 각종 시설을 구비하고 있는 종합 의료타운으로 마사지, 진흙 목욕, 약초 등을 이용한 다양한 치료와 꿈 해몽을 통한 심리분석 등 정신과 진료까지 시술되었다고 한다.

_ 의신(醫神)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치유 공간이자 그를 숭배하는 공간을 말한다. 신격화된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숭배는 그의 고향인 테살리아의 트리카 지방에서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최초로 아스클레페이온이 건축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후 기원전 6세기 말에 더욱 확장되어 많은 수의 아스클레페이온이 건축되었다. 즉, 아스클레페이온은 고대 그리스에서 여러 지역에 조성된 육체적, 정신적 치유공간인 복합건강센터였다고 할 수 있다. 주로 숲과 온천 및 신성한 공기로 둘러싸인 장소에 설립되어 좋은 휴양지이자 경외감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당시 아스클레페이온은 치유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성별이나 재산, 권력에 관계없이 신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누구라도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_ 아스클레페이온에서는 뱀과 같은 동물이나 약초를 이용하여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고대인들은 뱀이 허물을 벗는 현상을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얻는 것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뱀은 치료의 기적을 달성하여 얻을 수 있는 영원한 젊음이나 새로운 삶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_ 연극치료를 위한 공연장. 동물이나 약초를 이용한 치료법 외에도 수면요법이 사용되었다. 아스클레페이온에서는 심리적 원인을 갖는 신체적 장애에 대해 효과적인 다양한 치료 방법, 즉 육체적 질병은 약용 치료와 외과적 치료를 통해 해결하고, 정신적 고통은 목욕, 음악, 손기술, 마사지, 체조, 일광용, 시와 노래의 작곡, 음식조절, 오락과 같은 요법으로 해소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르가몬의 아스클레페이온이 유명해진 것은 ‘갈레노스'(Galenos, AD 131~210)라는 의학자 때문이다. 페르가몬에서 태어난 갈레노스는 그리스, 알렉산드리아 등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는데 서양의학의 역사에서 해부학과 생리학, 진단법, 치료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학 분야에 걸쳐 천 년 이상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의사가 없었다고.

그는 고대 말기와 중세 시대를 지나 근대 초기까지 의학의 황제로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또한 의학뿐 아니라 과학, 철학, 윤리학, 종교 등에 대해서도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다. 그가 주치의로서 담당했던 로마제국의 황제 안토니우스도 갈레노스를 ‘의사 중에 으뜸이며, 철학자 가운데 제일’이라고 치켜세울 정도였다.

갈레노스의 저서들은 과학이 대중화되기 이전까지 누구도 그의 학문적 성과를 비판하거나 폄하하는 것을 꺼릴 정도로 신성시되었다. 그가 이루어 놓은 업적과 저서들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하고 방대한 범위를 다루고 있었지만, 가톨릭교회의 공인을 받아 수정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레노스의 절대 권위는 무려 1,300년 후 베살리우스의 ‘인체구조론’과 세르베투스의 ‘폐순환 발견’등의 혁신적인 논문이 발표되기 이전까지 무비판 적으로 신봉되어 왔던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스클레페이온에서 그는 검투사들 주치의로 수련했는데. 상처가 많은 검투사들인 만큼 상처 아래 근육, 신경, 인대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한쪽 뇌가 손상을 입으면 몸의 반대편이 마비된다는 것을 알아내기도 했단다) 덕분에 심장, 간 등 여러 장기를 직접 보고 연구할 수 있었는데. 그가 검투사 주치의로 일한 4년 동안 사망자가 단 5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전임자 시절 사망자가 60만이었다니 어마어마한 성과다.

검투사 주치의로 수련을 마친 갈레노스는 32살이 되던 161년에 큰물인 로마로 건너가는데, 이곳에서 아버지의 친구이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에우데무스의 병을 고친다. 로마의 수많은 의사들이 스승의 병을 고치려고 노력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는데, 그가 스승의 병을 고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갈레노스는 순식간에 명의로 소문이 나 결국 황제의 주치의로 픽업되는데. 경쟁자들이 이를 가만둘 리가 없으니, 자신을 질투하고 시기한 다른 의사들과의 갈등 때문에 5년 만에 돌연 고향으로 돌아와 버린다. 하지만 역병이 돌기 시작한 로마에서 그를 수소문하여 다시 황제의 주치의로 복권시켰다고.

이런 의학 천재의 관심은 좀 엉뚱한 데 있었는데, 현대에까지 그의 대표적 연구로 전해 내려오는 것은 바로 ‘4체액설’이다. 히포크라테스가 창시한 이 4체액설은 인간의 혈액이 담즙, 점액, 우울, 다혈의 4가지 성질을 가졌다는 이론으로 갈레노스에 의해 집대성되었는데. 그는 이 4가지 체액이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하다고 주장하며 병은 이 4가지 체액이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온다고 주장했다. 또한 인체의 기본 성분이 4체액이라는 관점하에서 네 가지 체액이 결합하여 조직들을 만들고, 조직들이 결합하여 기관들을 형성하며, 이 기관들이 엮어져서 신체를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이 ‘4체액설’은 엠페도클레스의 ‘4원소설’에 근원을 두고 있다.

4원소설은 우주는 흙, 공기, 물, 불의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으로 현재 일부분만 남아 있는 엠페도클레스의 시 <자연의 시(Poem on Nature)>에 해설돼 있다. 한편 4액체설은 그의 제자들이 처음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의 몸은 냉, 건, 습, 열의 성질을 가진 4가지 체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들이 균형 잡힌 상태일 때 건강하다는 학설이다. 4가지 체액은 피, 점액, 황담즙, 흑담즙이다. 피는 열하고 습하며, 점액은 차고 습하다. 황담즙은 열하고 건조하며 흑담즙은 차고 건조하다. 4체액설에 의하면 한 원소가 많을 때 반대가 되는 원소를 보충해 주는 것이 좋은 치료법이다. 또 각각의 사람은 어느 한 가지 체액을 중심으로 평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으로 개인의 체질을 구분할 수 있다는 일종의 의학 이론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론을 도입해 4체액설을 정리했는데, 이는 질병의 원인을 액체의 변화에서 찾는 일종의 액체병리학 이론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인간이 정액, 즉 체액에서 생겨나기 때문에 액체가 생명의 근원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_ 네이버 지식백과

마치 ‘사상체질’처럼 피의 성질에 따른 분류를 시도한 것이다.(사상체질은 장부의 대소를 기준으로 분류한다) 그것은 중요하다. 인간은 모두 같은 정신과 몸을 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 역시 이런 분류의 한 방식인데 그것의 과학성은 분류 자체에 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인간을 단 몇 개의 지표를 가지고 분류할 수 있냐며 비토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대분류, 중분류, 소분류가 있는 것이지 분류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말은 피부색이 같은 황색이어도 까무잡잡한 황색이 있고, 까무잡잡하면서 뽀얀 황색이 있고, 까무잡잡하지는 않은데 어두운 황색이 있고.. 그러니까 파운데이션 넘버만큼 많은 분류가 있는데 그냥 황인종으로 퉁치느냐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일단 황인종에서부터)

_ 4액체설에 따른 기질을 인물로 표현한 목판화.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점액질, 다혈질, 우울질, 담즙질.

분류는 중요하다. 차이를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근대적 인간 유형은 종교적, 윤리적 신념을 따른 스테레오 타입(Type)만이 전부였다. ‘말 잘 듣고, 착하며, 순종적인데, 공부 잘하고, 돈 잘 버는, 근면성실한 인간’ 말이다. 그것에는 차이가 없다. 통일과 복제만이 존재할 뿐이다. 동식물도 종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들은 푸들이니, 치와와니, 불독이니 열심히 분류하고 그 특성을 이해하려 들면서, (얘는 예민하니 뭘 먹이면 안 되고, 쟤는 활동적이어서 산책을 자주 시켜야 하고..) 사람을 분류하는 것에는 발끈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나는 너와 다른데 말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신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이라면 그 성향과 차이 역시 우주의 만물만큼 다양할 것이다.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처음 부여한 과업은 ‘이름 짓기’였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_ 창세기 2장 20절) 이름 짓기야말로 분류의 모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고 서로 다른 개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70억 개의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기껏해야 남자와 여자, 인종, 국적이 전부 아닌가? 그 이해를 더 세분해 들어가기 시작하는 개성화의 노력이 인간, 유형, 분류 작업이다. (심지어 혈액형 분류조차. 기초적일지언정.) 오히려 분류의 시도를 불경하게 여기는 이들이 자주 내뱉는 말은 ‘인간이 그러면 안 되지’이다. 그 인간이 왜 그러는지 이해하려고 들기보다, 관습과 전통, 전근대적 도덕과 윤리에 따라 스테레오 타입을 벗어나는 것 같아 보이면 ‘인간이 그러면 안 된다’고 단순하게 규정지으려 분류의 시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가? 차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분류를 거북해하는 것 아닌가? 그가 T여서, 그가 N이서, 그가 P여서.. 그게 핑계가 될지언정 이해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인간의 몸과 마음을 파고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4액체설, 사상체질, MBTI 같은 것들이 다 인간 이해의 도구인 것이다. 비록 아직 호미일지언정.

MBTI의 분류는 심리적이다. 그러니까 정신적 분류. 마법사는 아예 ‘영혼의 지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MBTI 검사의 공식 명칭은 ‘심리유형 검사’이다. 16개 지표로 사람을 다 설명할 수 없어 분류 자체를 거부하는 건, 도서관에서 철학/기술/예술로 내 책을 한정 지을 수 없으니 따로 책장을 내어달라는 것과 같다. 대분류일 뿐이다. 그리고 정신은 육체와 결합하는 것이니 MBTI 유형 16개에 갈레노스가 정리한 4체액설의 4개를 곱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에 또 다른 방식의 분류를 (인간 분류의 방식은 차고 넘친다) 곱하다 보면 고유한 네가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분류상 인간이고, 분류상 황인종이고, 분류상 한국인이고 직장인이거나 실업자일 뿐이다. 겨우 그 정도의 분류만으로 사람을 평가하니 세상에는 몹쓸 인간들뿐인 거다. 이해하자고 들면 세상의 어떤 악인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대응할 수 있다. 효과적이고 예방적으로. 아니면 미신적 마녀사냥이나 해댈 뿐이다. 바다에 던져 놓고 그가 마녀가 아니면 떠오르리라 주문을 외우는 것이다.

현재 사용되는 의학용어 중 다수는 그리스어로 돼 있다. 이는 그리스 의학이 현대의학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렇듯 고대 문명의 의료 중 그리스 의학은 현대의학과 가장 가까운 성격을 가졌다. 원시사회에서 질병을 고치는 일은 무당이나 주술사들이 담당했다. 이는 죄를 지었거나 좋지 않은 행위에 대해, 신이 벌을 내린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BC 7세기경부터 질병을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연적, 과학적, 논리적으로 파악하려고 애썼다. 이러한 그리스인의 자연철학을 바탕으로 질병이 생기는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최초의 이론이 4체액설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초다. 전부가 아니고. 그리고 후세인 우리들이 그 노력을 계속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개인을 찾아 들어가기 위한 기본 맵 같은 걸 갈레노스가 정리한 것이다. 몸에 관하여. 몸의 성향에 관하여. 몸의 성향과 마음의 성향이 결합하면 개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니까 몸이 찬 ENTJ와 몸이 뜨거운 ISTP에 관한 차이 말이다. 그것은 그냥 ENTJ, ISTP로 분류된 이들의 차이를 한 꺼풀 더 벗겨서 드러내 준다. 우울질 ENTJ가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I와 E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다혈질 ISTP가 사람들 사이에 자주 출몰한다고 해서 E인데 I로 검사 결과가 잘못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 사주가 같은 쌍둥이가 왜 다른 인생을 사느냐에 대한 이해 말이다.

인간을, 개인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시도는 때론 미신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현상적으로는 인간 자체가 완전히 이해할 수도, 명확히 분류할 수도 없는 가변적 존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분류를 시도해야 하고 세분화해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가변성의 중심에 어떤 기본 속성이 있고, 그 기본 속성으로부터 어떤 요인들이 결합하여 가변적 행동이 드러났는지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 차이를 알 수 있고, 그 차이에 대한 이해를 더 세밀하게 할 수 있어야 타인을 더 깊이 수용할 수 있으니까.

마법사는 인간 분류의 시도를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하려는 시도에 반감을 느낀다. 마법사의 반감이 아니라 통제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 같아 불편한 꼰대들의 반감 같은 것 말이다. 대체로 그렇다. 오히려 열광하는 이들은 피지배계층인 젊은이들이다. 젊은이들이 MBTI와 같은 분류법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인간 개성화’의 한 흐름일 것이다.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는.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항변 말이다. 물론 부작용은 있다.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시대에도 그것이 전부라고 여겨 사혈과 구토, 이뇨, 설사 등 나쁜 피를 빼는 치료 행위들이 만연하기도 했단다. (지금도 있다) 심지어 구토제로 독극물인 비소가 애용되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치려다 죽어 나갔다고. 사혈은 특히 만병통치 치료법으로 각광을 받아 정신질환에도 사혈로 대응하는 바람에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단다. 뽑아낸 피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는 바람에 재감염되는 일이 흔해져서, 흑사병이 전 유럽에 퍼지게 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니. 오 마이 갓!

그러나 인류는 그러한 부작용을 넘어 진화해 왔다. 현재의 잣대로 당시의 의료 지식의 한계를 폄하할 수는 없다. 지금도 성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선입견이나 유형별 차별로 진격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T발 놈처럼. (진화론을 사회 우생학으로 자가 발전시켜 인종청소를 자행했던 역사도 있다) 그렇다고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 세상의 모든 자동차를 멈출 수는 없다. 그 모든 희생에도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검투사들의 상처로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 지식을 집대성할 수 있었던 갈레노스의 예와 같이, 우리는 상처와 시행착오를 통해 인간에 대한 이해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것이다.

페르가몬에서 태어난 ‘양피지’는 ‘묶인 책’을 발명함으로써, 지식의 분류에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페르가몬에서 태어난 ‘갈레노스’는 검투사들의 상처를 관찰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믿음과 교리를 넘어선 이론과 학문으로 체계화시켰다. 이 두 시작이 인류에게 공헌한 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갈레노스는 양피지에 엄청나게 많은 정보와 연구를 기록했다. 평생 400여 권 이상의 책을 쓴 그의 기록은 많은 책이 소실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118편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그리스, 로마 의학서적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한다. 무려 12명의 서기를 고용하여 밤낮으로 기록하게 했단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책들의 목록을 꼼꼼하게 정리해 놓아 후대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빌어 사기 치지 못하도록 했다고) 덕분에 인류는 질병으로부터 한층 자유로워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차이에 대한 이해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분류’이다. 너와 나의 다름에 대한 분류이고 그래서 우리 사이의 상처를 어떻게 이해하고 치유할 것인지에 대한 지혜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떻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안전거리를 유지할 것인지, 어떻게 곤경에 빠진 이웃을 도울 것인지 지표를 제공하고 방법을 모색케 해 준다. I 타입의 인간에게 에너지 충전의 시공간을 제공하는 E 타입의 인간처럼, 다혈질 성향의 사람과 함께 웃어주는 우울질 성향 사람의 배려처럼. 닥치고 짜장면으로 통일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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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적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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