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협박은 없다
Dec 26. 2023 l Izmir
총독은 86세의 노인을 협박했다. 너의 신을 버리고 황제를 섬기면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그러자 86세의 노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한 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요, 나의 구주이신 그 분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성이 난 것은 총독이 아니라 군중이었다. 노인의 꺾이지 않는 신념과 일관된 태도에 군중들은 잔뜩 성이 나, 노인을 맹수들에게 던져버리라고 요구했다.
“군중들을 보시오. 잔뜩 성이 나 있소. 만일 그대가 계속 거부하면 나는 그대를 맹수에게 내줄 수밖에 없소.”
“그렇다면 맹수를 부르십시오. 우리는 악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선한 것을 회개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악한 세상에서 의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게 참 좋은 일이오.”
이 말에 군중들은 더욱 분노했다. 아니 그들은 겁을 먹었다. 그들은 이미 선택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편에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것은 우상숭배라며 당장 멈추라고 지적질을 멈추지 않았다. 현실의 신은 자신을 숭배하지 않으면 맹수의 먹이가 되게 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내세(來世)의 신은 타협은 없다며 우상을 숭배하면 지옥에 처박아버릴 거라고 선포했다. 그러므로 군중은 선택을 해야 한다. 현실의 신을 섬기기로 한 이들은 이제 그들의 적, 그리스도인들이 굴복하는 모습을 봄으로써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안도를 얻어야 한다. 그래야 내세의 신이 거짓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들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을 지켰다.
그리스도인 젊은이는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는 걸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맹수와의 결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죽음은 두려움에 휩싸인 군중 심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그들의 수장인 듯 보이는 노인을 데려오라고 외쳐댄 것이다. “악인들을 제거하라. 폴리캅을 데려오라.”

누가 악인인가? 누가 선인가? 선택 전쟁에서 이미 입장을 정한 이들은 서로를 악으로 규정할 수밖에. 그렇다면 오히려 악은 선택하지 않은 이들일 것이다. 노인의 기세와 군중들의 분노 사이에서 갈등하던 총독은 이미 결투가 끝났기 때문에 맹수를 다시 풀어놓을 수는 없다고 한발 물러섰다. 그러자 군중들은 한목소리로 “그렇다면 그를 불에 태워 죽여라!”고 외쳐댔다. 이러한 위협에도 노인 역시 기세를 꺾지 않고 답하는데,
“당신들은 타오르다가 잠시 후면 꺼져버릴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경건치 못한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소.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지체하고 있습니까? 그대들이 원하는 대로 속히 시행하시오!”
노인의 얼굴에는 확신과 기쁨이 가득 차 있었고 그의 안면에는 은혜가 충만했다. 예언이 비로소 성취되려고 하기 있기 때문이다. 그는 며칠 전 기도 중에 자신의 베개가 불타는 환상을 보았다. 그리고 신도들 앞에서 “나는 산채로 불에 타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예언을 했다.
그러므로 노인의 일갈은 군중의 협박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언의 성취, 운명의 실현에 대한 대담한 환영, 그리고 그의 대답에서처럼 잠시 잠깐의 고통과 영원한 안식을 혼동하지 않는 용기 있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노인은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다.

이번에도 그 스승의 그 제자였다. 아니 청출어람 제자는 스승은 가보지 못한 순교의 길을 제대로 걸어 들어갔다. 성서에서 책망 없이 칭찬만 받았던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많은 박해를 박고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해 냈다. 폴리캅은 이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였고 이번에는 드디어 그의 차례가 된 것이다. 집행관들이 화형대를 만들고는 노인이 몸부림치다 떨어지지 않도록 화형대에 못을 박아 고정시키려 하자,
“나를 그대로 두시오. 불길을 참아 견디도록 내게 힘을 주신 그분께서, 그대들이 못으로 나를 고정시키지 않아도 내가 장작더미 위에서 꼼짝하지 않고 끝까지 있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_ 이즈미르(서머나)의 폴리캅 기념교회
노인의 기개에 눌린 집행관들은 그를 화형대에 고정시킬 수 없었다. 노인을 체포하러 왔던 군병들조차 그의 용모와 태도에 놀라 ‘이런 귀한 사람을 잡으러 이렇게 중무장을 하고 왔다니..’하고 애처로워했다고 한다. 노인은 오히려 군병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게 하고는 잠시만 기도할 시간을 달라고 청했다. 그러고는 선 채로 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의 기도 소리에 신도들이 감동하여 함께 기도하기 시작하자, 그를 체포하러 왔던 군병들은 이렇게 경건한 노인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에 큰 가책을 느꼈다. 화형대에 노인을 고정하려던 집행관들도 역시, 그럴 필요 없다는 노인의 당당함에 그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노인이 마지막 기도를 마치자, 화형대에는 불꽃이 거세게 피어올랐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화형대의 불꽃이 갑자기 아치 모양으로 흔들리더니, 노인의 몸을 비켜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인의 몸은 불에 타서 시커멓게 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용광로에서 달궈지는 금처럼 빛이 나고, 장작더미에서는 마치 몰약 냄새와 같은 향기로운 냄새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불로도 그의 몸을 태울 수 없다는 것을 안 군중들은 집행관을 시켜서 칼로 그의 몸을 찌르게 했다. 그러자 엄청나게 많은 피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화형대의 불을 꺼버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노인은 비로소 순교에 이를 수 있었다. 사도들의 12번째 순교였다.

아브라함으로부터 많은 이들이 화형대에 던져졌다. 그러나 매번 불은 그들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사그러들었다. 이 신앙과 믿음에 대한 모든 시도가 그러했다. 누군가는 결국 순교로 생을 마감하고, 누군가는 죽는 날까지 그러한 이들의 행적을 기록했다. 이것이 가능케 한 그 신념이 무엇인지는 믿는 이들만이 느낄 것이다. 그러나 2천 년이 흐르도록 압제는 사라지지 않고 불의 심판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다시 오겠다던 메시아도. 그럴수록 선은 더욱 강해지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악 역시 더욱 고도화되었다. 그리고 선과 악은 언제나 입장을 바꾸어 서로를 감당했다. 압제와 회유, 핍박과 유혹은 역할을 바꿔가며 사도와 제자, 신도와 성도들을 흔들어 댔고 그때마다 이들은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들의 소망이 이번 생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천국, 이어지는 생, 그게 무엇이든 이번 생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이들이라면, 눈앞의 어떤 시련과 고통도, 지나가고 말 계절 같은 것으로 여길 것이다. 하나의 생이 전부라고 믿는 이들조차도 그렇기 때문에 눈앞의 시련과 고통에 흔들리지 않는다. 기회가 더 없을 테니. 기회가 더 있거나, 기회가 더 없거나. 생이 연속되거나, 여기서 멈추거나, 눈앞의 그것이 내 소망을, 꿈을, 신념을 굴복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잠깐이기 때문이다.
잠깐의 그것에 목매지 않는 이들이 잠깐의 현실을 바꿔 낸다. 우리는 원대한 꿈을 꾸고 연속되는 생을 통해 이를 성취해 가고,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배역들은 우리의 신념, 믿음을 시험하는 시험관에 불과하다. 그리고 정답은 이것이다.
‘내 나이가 86세인데 이제 와서 배교가 뭔 말이요?’
‘드디어 영광스런 순교의 대열에 들어서는데 불타는 장작 위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하겠소?’
‘우리는 악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선한 것을 회개하는 그런 일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악한 세상에서 의로운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게 참 좋은 일이오.’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인에게 죽음의 형식은 중요치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죽음을 영광스럽게 해줄 시련과 고통의 장식이라면 그것은 멋진 세리모니가 되는 것이리라. 그의 세계가 하나의 생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것이 내세의 종교가 해온 역할이고, 이 시대의 종교인 과학은 이제 우리의 시공간이 무한히 펼쳐져 있다고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너의 번민은 대체 무엇이냐?
군중들은 하나의 생에 묶여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희생양이 필요하다. 연속되는 생을 꿈꾸는 이들은 화형대가 두렵지 않다. 하지만 번민하는 이는 그 사이에서 생이 무엇인지 모르는 총독이다. 그는 이번 생에 그칠 것을 소유해 버렸고, 노인의 말대로 다음 생이 있다면 허튼짓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것이다. 잃을 것을 가져버렸으니. 그칠 것에 마음을 묶어버렸으니. 그리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그런 이는 이번 생도, 다음 생도 살지 못하는 것이다. 가져 버린 그것 때문에 마음을 이번 생에도, 다음 생에도 둘 수 없는 것이다.

2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 이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혁명적인 시간 개념이 대두되었다. 사람은 죽으면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고, 천국에 가려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한다는. 매우 명확하고 분명한 조건을 내세운 새로운 시간 개념이 사람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그리 고민할 것 없이 현실을 살고 있는 2천 년 전 사람들에게 삶은 영원하고, 우리는 그 삶을 시작했으며, 이 삶의 결과에 따라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 둘 중 하나에 살게 된다는 매우 배타적인 시공간 개념을 선포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그전에는 잘 알지 못하거나, 이미 선택된 매우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주어진 줄 알았던 죽음 이후의 시공간이 실은 모든 이들에게 평등하게, 영원히, 주어져 있고, 어느 공간에 속할지는 이번 생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고, 영원의 시간을 반으로 뚝 잘라 선택을 요구한 것이다. 황제들은 이 이분법적 시간관과 싸워야 했다. 사람들이 이 종교에 귀의할수록 현실의 권력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천국에 갈 건데 말이다. 현실의 한정된 시간만을 지배하는 황제보다 영원의 시간을 관장하는 신의 뜻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생각과 관념을 현실에 붙잡아 두어야 했다. 결국 황제가 직접 신이 되어 ‘눈에 보이는 신’에게 복종을 강요하지 않고서야,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신과의 싸움을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믿음 외에는 증명할 것이 없는 이 새로운 시간 개념에 사람들은 너무도 강력하게 이끌렸다. 유한 VS 영원의 싸움. 결과는 뻔하다. 결국 황제들은 전쟁에서 지고 군중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는 내세(來世) 종교의 신도로 태세를 전환해 버렸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거기다 내세가, 심지어 현실이 하나, 둘이 아니라는 더 이해할 수 없는 시공간 개념을 드러내 버렸다.
현대 과학이 시공간의 개념을 혁명적으로 뒤집어 놓고 있는 이때에 우리는 시간이, 삶이, 내세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혼돈에 빠져들고 있다. 생은 연속되는지, 관념의 산물인지, 모든 생은 동시에 벌어지는 어떤 현상일 뿐인지. 기억은 무엇이고 어제와 내일은 무엇인지. 모든 것이 미지의 영역으로 빠져들어 버렸다. ‘양자역학’이라는 과학적 결과가 명확히 이 길을 가리키고 있으니 부정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애써 외면하면서 살던 방식의 생에만 집중하려 애를 쓴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대중의 종교는 관성이다. 그러나 개차반인 현실을 감당하기 힘든 일부 사람들은 빠르게 멀티버스로의 판타지에 빠져들고 현대과학은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연구 결과를 계속 쏟아내고 있다. 원래 그대로인 우주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점점 자라나 무한에 이르러버렸다. 세계와 나라는 인식까지도. 그리하여 풀 것 많은 이생의 무게도 무거운데, 전생과 미래 생의 어떤 카르마까지 풀어야 하는 더 엄청난 과업에 짓눌리게 되었으니… (그건 진짜 판타지일 뿐일까?)

_ 이즈미르 시내 한복판에서 발굴된 서머나 고대도시 유적. 2천 년의 세월이 공존하고 있다. 발굴되기 전에는 알지 못했던 카르마를 안고.
이 새로운 시공간 개념에 매료된 신교도들은 뻔한 과거와, 불안한 미래에서 관심을 거두고, 끝없이 확장되어 버린 우주를 이해해 보려고 호기심을 발동하지만, 이 길에는 구세주도 창조주도 없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식의 단순 명쾌한 답도 없다. 인간의 인식을 넘어설 뿐이라며 삼위일체의 신비 속에만 그 비밀을 놓아두고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안다. 그것은 죽음도 탄생도 모두 하나인 시공간 속에서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거라 걸. 그러므로 꿈에서는 무엇도 가능하고, 그렇기에 우리는 이미 살고 싶은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그 무엇도 가능한 이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가 필요한 이유는 여전히 한 번의 생, 제한된 시간을 신으로 섬기는 군중들이 깨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그들은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 한 채 사도들에게 돌을 던진다. ‘너 그러다 늙어서 어쩔려고 그래?’라며. 그러나 순교가 무엇이 두려우랴. 한잠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신기루 같은 생인데. 오히려 두려운 것은 수만 생을 죽었다 깨어나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카르마인 것을.
어떤 믿음이, 어떤 신념이 사람들을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이끌었고 지배계층에게 위협을 가했다. 존재만으로. 그리고 그 신념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아끼지 않았고 그 신념은 세상을 지배했다. 그 신념은 새로운 시간 개념으로부터 나왔다. 내세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도출되었다. 그러한 도전이 지금, 이 시대에 다시 시작되고 있다.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까지 해체하고 있는 현대 과학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선택하도록 압박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황제 VS 사도, 모든 신 VS 유일신 식의 이분법적 압박이 아니다. 무한히 펼쳐진 생의 모든 가능성을 속에서 나의 운명을 찾는 고난도의 퍼즐게임인 것이다. 이 새로운 시공간 개념의 어떤 제자들도, 신도들도, 너에게 어떤 믿음을 선택할지 고백하라고 강요하지 않은 채, 삶의 방식을 차별화하고 개별화함으로써 전혀 다른 세상, 다른 세계의 라이프스타일을 새로운 표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이해도 해석도 못한 채, 이상하게 흉내 내다가 미로에 빠져버리고 말겠지. 그것은 셀럽도, 인플루언서도, 욜로도, 디지털 노마드도 아닌, 연속되는 생의 비밀을 쫓는 사도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30세기에서 21세기로 다시 25세기로, 사람으로 유니콘으로 공룡으로, 지구에서 시리우스에서 안드로메다에서, 마법사로 천사로 여신으로, 운명과 직관의 물줄기를 따라 생과 생의 바다로 끝없는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노인을 위한 협박은 없었다. 협박을 당하는 이들은 이 혁명적인 시간 개념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군중들일 뿐이다. 사도들이 신도들이 정말 천국에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지난 2천 년간 그들의 신념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믿음의 형제들조차 무한히 쪼개지는 시공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선택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천국이면서 동시에 지옥인, 지옥이면서 함께 천국인, 관측하기 전에는 천국도 지옥도 아닌 중첩되어 있는 영원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 복락을 누릴지에 대한 답을 너에게는 가르쳐주지 않겠다. 돌을 던질 테니까.

돈을 던진다면야..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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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적 순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