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는 누구인가?

Dec 24. 2023 l Selcuk

어떤 사도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고, 누군가는 X자 십자가에, 누군가는 칼에, 죽창에 찔려, 불에 타, 톱에 몸이 절반을 잘려, 심지어 어떤 사도는 살가죽이 벗겨지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이렇게 예수의 제자들이 모두 순교했으나, 사도 요한만큼은 순교하지 않고 100세까지 살며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예수가 십자가형에 처하자 순교한 제자들은 모두 도망을 갔으나 요한만이 남아 스승의 곁을 지켰다. 스승의 죽음을 지킨 공로로 순교를 면했을까? 그러나 전승에 따르면 그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졌다고 한다. 하지만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고. 이 불사조 사도의 기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으니, 도끼로 그의 목을 내리치면 도끼날이 쪼개지고, 기름 솥에 내던져도 상처 하나 입지 않자, 황제는 그를 세 번이나 연거푸 기름 솥에 담갔으나 소용없었다고 한다. 이는 스승에 의해 예언된 바 있으니,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요한복음 21장 21절~23절)

여기서 죽지 않겠다 한 제자가 사도 요한이다. 물론 이 복음서의 저자 역시 사도 요한이니 자기에 대해 자기가 쓴 말이긴 하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이 모두 순교로 영광스러운 죽음에 이르는 가운데 홀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이 사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_ Saint John the Evangelist, Peter Paul Rubens. 꽃보다 사도??

순교의 행렬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한 뒤 에베소 교회는 그의 충성스런 제자 디모데에게 맡겨졌다. 청출어람 디모데는 스승처럼 군중들에게 우상숭배를 금하라고 선포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한다. 결국 에베소 교회는 다시 사도 요한에게 맡겨졌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VS 로마 황제의 대결은 점점 불타올랐는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아예 살아있는 신의 자리에 등극한다.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주인이자 신)’라고 선포한 황제는 자신의 신전을 세우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동상 앞에 경배하기를 강요했다. 황제숭배를 거부하면 ‘너 이 새끼 그리스도인이지’하고 박해를 해댔다고. 그의 탄압은 유명한 폭군 네로보다 한발 더 나아가, 더 잔인한 방법의 취조와 고문법을 개발했는데, 심지어 항문에 불붙은 막대기를 삽입하는 고문을 가하기도 했단다. 물론 사도 요한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예수의 직속 제자 체면이 있지, 우상숭배를 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당연히 그 역시 온갖 방법으로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예수께서 인정한 슈퍼히어로답게 매번 살아났으니, 전술했듯이 끓는 솥에 세 번이나 던져졌음은 물론이고, 독배를 마셔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머리를 도끼로 내리치면 오히려 도끼가 쪼개졌단다. 이 정도면 마블에서 ‘슈퍼 사도 요한 Super Apostle John’시리즈 하나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_ 에페수스, 도미티아누스 신전의 아치.

결국 포기한 황제는 그를 밧모섬에 유배시켜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시켰다는데, 사도는 여기서 연일 계속되는 중노동에 꿀잠을 자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그 꿀잠 속에서 환상을 보는데. 그리하여 기록된 것이 인류의 종말을 예언했다는 그 유명한 666과 아마겟돈의 <요한 계시록(묵시록)>인 것이다.

_ 도미티아누스 신전 복원도

남겨진 자의 마음은 어땠을까? 모두 순교의 대열에 들어서고 있을 때, 자신과 함께 복음을 증거하던 사도들, 신도들, 제자들이 모두 순교의 영광 속으로, 주님의 품으로 떠나는데, 구차한 목숨을 계속 붙들고 살아가야 했던 남겨진 사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나는야, 불사조 슈퍼히어로! 죽어도 죽지 않는 남자’라고 기세등등했을까? 그러나 남겨진 자의 마음은 늘 허망한 것이다.

_ 무너진 도미티아누스 신전. 남은 것은 옛 영화요 돌더미뿐이니.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압제하에 있다면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닐 테니, 죽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이 압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질 순교를 마다할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의 기개는 언제나 살아있는 권력이자 신神인 황제와 VS를 뜰만큼 강력하게 자라나고, 그것은 결국 제국의 제도와 시스템을 전복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런 힘이 세상을 지배하고 시스템을 장악한다. 그러나 불평과 불만으로 눈치만 보는 이들의 힘은 참으로 미약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돌을 던지지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지켜낸 신념은 도리어 그들에게 국교로 주어지니. 이 자연법칙, 신념칙은 언제나 역사에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히브리 청년의 죽음은 어떻게 이러한 기개를 불러일으킬수 있었을까? 그리고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걸까?

그것은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요한복음 21장 24절~25절)

사도 요한은 남겨졌다. 그리고 어떠한 고문과 처형 시도에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이 주어졌다. 예언이 계시되었다. 그는 기록하는 자였다. 제자들 중 가장 어렸던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순교도, 목양도, 선교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기록하는 사명이 주어졌다. 그는 기록했다. 100세까지. 그는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기록에는 인류의 미래와 구원, 멸망이 담겨 있다. 사람들은 이를 해석하려 들었고 그 해석의 시도가 역사를 만들어 갔다. 어떤 이들은 계시록의 기록을 해석해, 몇 년, 몇 월, 며칠에 지구가 멸망하거나 휴거가 일어날 거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행에 옮김으로써 역사를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계시록의 상징들은 온갖 음모론의 기본 텍스트가 되어 사람들의 인식에 자리를 잡고, 많은 역사적 사건의 해석틀로 작용했다.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증명된 사실은 없지만, 매번 역사의 방향을 이끄는 지표처럼 받아들여지고 해석에 활용되었다. 666표를 받는 이들과 14만 4천의 선택받은 이들이 미래에 등장하지 않으리라 누구도 단정 지을 수 없으니, 그의 묵시가 시간의 경계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기록하고 기록한 그것의 핵심은 인류의 종말도, 천년왕국의 도래도 아닌 바로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에게서 나서 하나님을 알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7~8절)

사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스승의 가르침에서 멀어져 온갖 해석과 주장, 그로 인한 다툼과 상처로 분열해 가기 시작하는 교회들에게 사랑을 강조했다. 그가 하도 강단에서 사랑만을 강조하자 신도들이 불평을 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사도는 “형제들이여,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한 다음,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고, 이것만 지켜도 족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지독한 사랑주의자다. 그러나 그가 사역하던 에베소 교회는 첫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을 받았다. 다시 첫사랑의 마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경고를 받기까지 했다. 사랑, 사랑의 사도 요한. 그러므로 그 무시무시하고 엄혹한 묵시와 계시, 예언의 모든 말들도 저자의 의도에 따라 해석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고린도전서 13장 2절)

그러니 사랑, 사랑 그것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 VS 황제의 전쟁에서 패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측근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그 악행으로 말미암아 일명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 기록말살형

고대 로마에서 담나티오 메모리아이(Damnatio Memoriae)라고 불린 형벌로 로마 엘리트에게는 가장 치욕스러운 처벌이었다. 현세에 세운 모든 공적들이 박탈됐고, 형벌이 통과될 당시 죽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형벌에 처해져 당사자가 기소 전 자살하더라도 이 형벌로 기소되는 순간 이를 피할 수 없었다.

기록말살형은 현세와 명예를 소중히 하는 로마인에게는 조선의 부관참시와 마찬가지로, 사형을 능가하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따라서 이 형벌에 처해지면, 대상자만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고 해도, 해당 가문까지 살아생전 명예와 사후 명예, 업적까지 모조리 부정되는 조치와 똑같았다. 그래서 살아남은 가족들에게도 그 내상이 심각했다. 왜냐하면 기록말살형 대상자의 이름은 사회에서 인간쓰레기, 존재 자체가 혐오스러운 자와 똑같은 의미를 가진 욕설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복권 자체가 무척 어려웠다.

로마인들의 관습상 ‘집=모든 영혼의 공간”이기 때문에 이 형벌에 처해진 순간, 로마인들에게는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조각상은 파괴되고, 조상들의 조각상은 후손, 친척들의 집에서 강제 회수되고 파괴됐다. 따라서 바닥, 벽면에 설치된 해당 인물에 대한 모든 기억까지 지워지고 철거됐다. 황제, 원로원 의원, 선출직 공직자, 관료, 장교라면 공문서나 각종 기록에 남겨진 대상자의 이름을 지우고 건물에 새겨진 대상자의 초상 등을 파괴하거나 긁어내 없애버렸다. 이들의 파괴된 조각상이나 비문은 가축들이 밟고 다니는 도로 재료 등으로 쓰여 모욕당하게 만들었고, 심할 경우에는 해당 인물이 살던 집도 완전히 철거됐다. (나무위키)

_ 고대 3대 도서관이던 에페수스 셀수스 도서관. 2만 권의 장서가 있었으나 건물은 부서져버렸다.

사람의 존재를 말살하는 것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세상에 뒤집히면 악인의 기록이 어떻게 윤색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므로 기록 자체를 삭제해 존재 자체를 말살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문화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들의 형벌은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것이었다.

_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시편 69편 28절)

_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 (출애굽기 32장 33절)

_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0장 15절)

_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요한계시록 21장 27절)

_ 세상의 기초가 놓인 이래로 죽임당한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그들의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땅에 사는 모든 자는 그에게 경배할 것이라. (요한계시록 13장 8절)

존재가 부정되는 것만큼 큰 형벌이 있을까? 죽임을 당하거나 지옥에 가거나, 뭐든 구원의 희망이 일말도 없는 것은 아닐 테다. 그리고 비록 구원이 없을지라도, 영원 형벌 속에 거하더라도, 존재, 존재가 남아 있다면. 그것 자체로 의미가 희망이 있는 것일 텐데. 존재를 부정당하면 말이야. ‘차라리 나를 때려줘라.’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이지. 왕따 함 당해봐라. 차라리 내 욕을 하는 게 낫지. 관계 속에서 투명인간 취급받는 것만큼 가혹한 형벌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러나 ‘기록말살형’으로 존재가 사라진다는 건, 해탈해서 공空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른 것이리라. 그건 출구도 입구도 없는 까만 방안에 나의 의식만 남아 깜빡 깜빡거리는 것과 같다. 영원히. 이것이 고대인들에게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으니. 또한 사랑도 역시 기록되어야 비로소 의미가 생겨나는 것이다. 네가 나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비로소 내가 세상에 존재하게 되듯이.

_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은 불에 타 없어졌는데 방화범인 헤로스트라투스는 범죄 동기를 아르테미스 신전의 파괴자로서 역사에 영원히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 때문에 에페수스에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으나, 역사가 테오폼푸스가 이걸 책에 적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소원대로 그는 영원히 그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나무위키)

사도에게 사랑은 기록이었다. 구원은 사랑으로 말미암고 형벌은 기록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기록을 남기고 있는가? 생이 연속된다면 우리는 다음 생에서 지난 생의 나에 대해 알게 된다. 그것은 기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긍정하든 부정하겠지. 자신인 줄도 모르면서. 누구도 다음 생에 부정당하는 인생을 살고픈 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기록되는 일이다. 어떤 삶으로 기록되고 싶은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역사는 진실을 밝혀줄 것이다. 그리고 또 그다음 생은 그를 거짓을 기록한 자로 기록하겠지. 우주의 도서관인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에는 우리의 모든 생에 관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기록되는 것은 주로 행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축복된 권리를 부여받는데 생각을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적으로 기록되는 일은 영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기록할 수 있다면, 남기지 못한 행적으로 아쉬울 수는 있어도 부정당하지는 않겠지. 생각의 흔적을 남길 수 있으니 우리의 생각은 연속될 것이다.

 _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 <성서>. 지금도 여전히, 연 1억권 이상 판매되고 있으며, 여전히, 사람들이 읽고 따른다. 2천 년간 가장 대중적으로 읽혀 온 이 책은 언제까지 읽힐까? 이 책의 메시지는 언제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까?

우리는 매번의 생에 지난 생의 텍스트와 만나게 된다. 그것은 끌림으로, 매력으로, 운명적인 어떤 조우로 반드시 연결되게 되어 있다. 과제를 마쳐야 하니까. 그리고 그것에서 다음 생으로 이어질 지표를 얻게 된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사도들이, 그 기록을 지표 삼고 2천 년간 스승의 복된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해 왔다. 그리고 인류는 좋든, 싫든, 그 메시지를 바탕으로 건설된 문명 위에 살고 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이 너무도 강력하므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기록으로 남아 그들의 다음 생, 다음 생으로 이어졌으니. 그러므로 이 기록 전쟁의 승자는 당연히 기록말살형을 받은 황제가 아니라, 홀로 남겨져 온갖 죽음의 위협에도 살아남아 기록을 마친 사도의 것이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요한계시록 22장 18~21절. 성서의 엔딩)

_ 셀추크(Selcuk) 언덕에 있는 사도 요한의 묘. 그는 죽었으나 그의 기록과 ‘서로 사랑하라’는 메시지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대는 그대의 사랑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그대는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소멸시키고 있는가? 그러나 이 시대의 위대한 황제, ‘Google 신神’은 자신의 클라우드에 남김없이 그대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으니, 뭔가 변명이라도 늘어놓아야 할 것이 아닌가? 후대와 다음 생의 자신을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이렇게, 여전히,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위대한 블록체인, 스팀잇에 말이다. 그리하여 이 마법사는 끊임없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미래도시를 건설하는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 쫄보, 멍청이, 비겁한 도망자들의 이야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같기도’ 신도들의 이야기, 그리고 너의 이야기.

긴장해라. 마법사는 기록을 마칠 때까지 죽을 수도 없으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라, 기록하는 자가 승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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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적 순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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