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쟁이 라이언 킹의 비상
Oct 24. 2022
고양이가 들어 온 거야. 난 무슨 소린가 했어. 거실 소파에 누워 있는데 무슨 우는 소리가 자꾸 들려서 보니, 고양이가 침실에 들어와 있는 거 아니겠어. 아마도 욕실 환기를 시키려고 열어 놓은 창문으로 들어왔나 봐. 욕실 창문이 천장 근처에 있는데 용케 뛰어내렸네. 뭐 고양이니까. 몸집이 큰 걸 보니 아기는 아닌데 눈빛이나 울음소리는 앳되니, 청소년 고양이쯤이라고 할까? 암튼 처음에는 빤히 나를 바라보며 몇 걸음 오길래, 이리 오렴 했더니 눈치를 보는 거야. 그래서 일어나 다가가려니까 후다닥 침대 밑 공간으로 숨어버리는 거 아니겠어. 고양아, 아가야, 나오렴. 괜찮아 나가게 해줄게. 바닥에 엎드려 핸드폰 손전등으로 여러 번 싸인을 보내도 잔뜩 겁을 먹었는지 꼼짝도 않고 웅크리고 있는 거야. 난 몇 번 싸인을 보내다가 그냥 두기로 했어. 사람 어른의 큰 동작이 위협적으로 느껴질 테니까. 다시 소파에 누워있는데 애가 슬며시 또 기어 나오는 거야. 그리고는 가만히 서 있길래 나가라고 현관문을 열어주려고 일어나는 순간, 또 후다닥. 이크, 너 나가라고 도워주는 건데, 쩝. 이번엔 방문과 현관문을 모두 열어놓고 반대편 욕실 쪽에서 지켜보기로 했어. 내가 보이지 않으면 편안하게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욕실문 뒤로 숨어서 지켜보았지. 아니나 다를까 내 인기척이 사라지자 녀석이 빠꼼 얼굴을 내밀고 주변을 살피더니 슬금슬금 방문 쪽으로 걸어가는 거 아니겠어. 그래 고양아 너의 길로 가렴. 그리고 녀석은 거실 어둠 속으로 사라졌어. 잘 나갔을까? 녀석이 혹시 다시 방으로 돌아올까 싶어 방문을 닫으려 다가서는 순간, 인기척을 느낀 녀석이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후다닥 침대 밑으로 또 숨어 버린 거야. 아차! 이런 내 기다림이 모자랐나. 쩝. 그래 네 맘대로 하렴. 나는 포기하고 그대로 소파에 누워서 죽은 척했어. 불도 다 끄고 방문과 현관을 열어놓으면 지가 나가고 싶을 때 나가겠지. 조금 시간이 흐르자 녀석이 안정을 찾았는지 다시 탈출을 시도하려고 방문 밖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어. 나는 인기척에 놀라지 말라고 숨도 멈춘 채로 가만히 있었어. 어둠 속에 비친 녀석의 모습은 마치 초원의 젊은 사자처럼 위풍당당하며 힘차고 조심스러워 보였어. 나는 녀석의 실루엣에 감동하며 어서 제 갈 길을 가기를, 그리고 나는 편안한 잠에 빠져들기를 기원하며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어. 마침내 현관문 앞에 도착한 녀석은 늠름한 자태로 서서 현관 밖을 바라보고 섰어. 그 모습은 마치 라이언 킹 같았지. 그런데 그 순간 나는 녀석의 눈빛과 태도에서 어둠 속 현관 밖 세상으로 다시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마음을 느껴버렸어. 분명 저 속에서 뛰놀다 들어 온 녀석에겐 이곳이 낯선 곳일 텐데. 그에게는 어둠 속 현관 밖 세상 역시 낯설게 느껴졌나 봐. 아니면 어떤 사정이 있나? 아니나 다를까 녀석은 제가 뛰놀던 현관 밖 세상으로 탈출하기는커녕 슬슬 뒷걸음질을 치더니 다시 거실 쪽으로 물러나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는 다시 쭈그려 앉으려고 폼을 잡는 거야. 나는 갑자기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어. ‘이 자식아 네가 탈출해야 나도 잘 거 아냐!’ 어땠겠어. 이 겁쟁이 라이언 킹 자식은 후다닥 방으로 달려가 침대 밑으로 숨어버렸어. 동작은 얼마나 빠른지. 나는 화가 나서 욕실과 방의 불을 끄고 욕실문과 방문을 모두 닫아버렸어. 에라 모르겠다. 너는 감금이다. 알아서 해. 해가 뜨기 전까지 그곳에서 쿨쿨 잠이나 자든지. 그러고 난 소파에 벌렁 누워버렸어. 나도 자야지. 오늘도 마법사는 이만보를 걸었단 말이다. 누워서 잠을 청해보는데 이 녀석이 답답한지 무서운지 계속 낑낑대는 거야. 나 좀 꺼내 주세요. 나 좀 빼내 주세요. 이 녀석아 내가 다가가면 도망가고, 기껏 나가라고, 탈출하라고 문도 다 열어 줬는데 도로 들어온 건 너잖니. 내가 어떻게 도와주니. 그래 너는 어쩌면 여기를 새 보금자리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나는 해줄 게 없어. 외면하며 돌아눕는데 불현듯 방 창문이 생각나는 거야. 아, 창문을 열어주면 되겠구나. 그걸 생각 못했네. 방 창문이 뛰어오르기엔 높아 보여도 뛰어내린 욕실 창문보다야 낮으니 녀석이 창문으로 탈출할 수도 있겠네.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네. 나는 후다닥 일어나 방으로 가서 창문을 열어 놓았어. 마땅한 디딤대가 없어, 청소년 고양이에겐 창문의 높이가 뛰어오르기에 애매해 보였지만 그래도 고양이니까. 새도 잡아 먹는 놈들이니 이쯤은 도전해볼 만한 높이가 아니겠어. 그리고 다시 방문을 닫았어. 탈출구는 창문 뿐이라는 걸. 그리고 밤새 공포에 떨며 밤을 지새울지. 용기를 내어 창문으로 날아오를지는 너의 선택이라는 걸. 누구도 너를 구원해 줄 수는 없다는걸. 이제는 홀로 직면해야 할 순간이라는 걸. 비상, 비상이야. 녀석에겐 비상 상황이 펼쳐진 거야. 이 비상非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창을 향해 비상飛上하는 방법 뿐. 다시 거실 소파로 돌아와 누우며 나는 여기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단다. 이제는 이 일에서 벗어나는 거야. 이대로 피곤한 몸을 재우면 되는 거야. 주문을 외우며 잠을 청했어. 그런데 잠이 들만하면 이 녀석의 울음소리가, 징징거림이 계속 들려 오는 거야. 이 놈아, 어쩌라는 거니. 창문이 활짝 열려 있잖아. 그리고 너는 고양이라고. 쥐새끼도 넘나드는 창문을 날아가는 새도 잡는 고양이가 왜 못 뛰어넘는 거야. 답답하고 한심스런 마음과 칭얼대는 겁쟁이 라이언 킹의 울음이 교차하며 밤새 계속되었어. 자다깨다 들리다말다. 칭얼칭얼 뒤척뒤척.. 그러다 깬 거야. 하늘이 밝았더라고. 아, 이젠 녀석이 나갈 수 있겠지? 날이 밝았으니 현관 밖 세상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겠지? 더 이상 무섭지 않겠지? 제가 뛰놀던 원래 세상이니. 나는 벌떡 일어나 녀석을 탈출시켜주려고 현관문과 거실 창문까지 활짝 열고 방으로 다가가 방문을 힘차게 열었어. 녀석아! 자유다!! 앗, 그런데 녀석의 인기척, 아니 묘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거야. 방 창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고. 앗, 혹시 녀석이. 침대 밑을 샅샅이 훑어보았어. 액체 동물인 녀석이 혹시 엉뚱한 곳에 흘러들어 고여 있지 않은지 방 여기저기를 살펴보았어. 그리고 마침내 방 창문 아래에서 도약의 흔적으로 보이는 녀석의 발자취를 발견하게 되었지. 그렇구나! 녀석은 창문으로 날아올랐구나. 몇 번의 시도를 했을까? 몇 번의 실패를 거듭했을까? 불가능해 보이는 창문을 보며 얼마나 절망했을까? 그리고 어느 순간 용기를 내었겠지. 이대로, 이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공간에서 밤을 지새울 수는 없다며, 멋모르고 뛰어내릴 때는 알지 못했으나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새로운 세상. 그리고 겁에 질린 마음으로 바라본 현관 밖 세상은 내가 뛰놀던 그 세상이었어도 공포로 덧입혀져 자신감을 빼앗아 가버렸지. 그리고 마법사는 문을 닫아버렸어. 이제 남은 건 나 혼자뿐.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지. 그리고 용기를 낸 거야. 나는 고양이니까. 나는 세상을 호령하는 라이언 킹이니까. 점프!! 도약과 비상. 녀석의 흔적은 가슴 뭉클한 광경으로 남아 있었어. 나는 녀석이 떠나간 창문을 바라보며 마음으로 손을 흔들었지. 가거라. 너의 세계야. 그리고 이 밤의 번뇌와 절망을 잊지 말아라. 어둠 속에서 끄집어낸 너의 용기, 그것을 놓지 말아라. 그리고 마법사는 이제야 편안한 잠을. 평안한 밤을.

“심바, 너는 네가 누군지 잊고 있다.
너 자신을 들여다봐라.
너는 네가 아는 너보다 훨씬 훌륭하다.”
_ 뮤지컬 <라이언 킹>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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