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유감
Nov 09. 2022

10년 만에 찾은 <테이트 모던>은 여전했다. 주변 건물들조차, 그때는 매우 미래지향적으로 보였는데 그사이에도 한국 사회가 압축성장을 지대로 한지라, 이제는 더 새로워 보이진 않았다.
그건 전시도 그랬다.
이번 관람 기간의 주제는 ‘식민지’였나보다. 여기저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들의 무엇을 반영한 작품들이 전시관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영국은 제국주의의 최선봉에 있던 앞잡이였으니 할 말이 없을 텐데, 그들의 매우 세련되고 교묘한 지배방식은 형식적으로나마 여전히 영연방으로 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식민적 패러다임의 고착 말이다.
한마디로 그 패러다임은 낡았다. 식민과 지배의 이분법은 피해자는 가해자를 고발하는 척 피해 포르노를 팔고, 가해자는 그걸 또 적당히 받아주며 때로는 역이용하고 때로는 면죄부로 대신한다. 그건 참 낡았다.
영국과 일본을 비교하며 왜 영국의 식민지들에 비해 일본의 식민지들은 일본의 식민 지배에 울분과 원한을 풀지 못하는가? 왜 영국의 식민지들은 심지어 여전히 연방의 울타리에 남아있기까지 한가? 라는 질문을 누구나 해보게 된다. 특히 이번 엘리자베스 여왕의 죽음은 더더욱 이 식민과 지배의 문제를 생각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건 어쩜 ‘역린’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보게도 된다. 그러니까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 또는 염치. 그런 걸 건드리지 않는 건 예의와 매너라기보다 영리하고 때론 교활하고 그런 게 아닌가? 사실 영국이 이제까지 살아남은 건, 무식하게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빠져나와야 할 때, 발을 빼야 할 때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영리한 직관력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다 놓고 나온 것도 아닌.
지배자가 코너에 몰리면 강제력을 동원하고 결국 연약한 상대의 ‘역린’마저 건드리게 되는데, 이걸 통제할 줄 알면 굉장히 상대를 ‘그루밍’할 수 있게 된다. 이런 통제력을 보이는 상대는 좀처럼 등을 보이지 않고 눈을 맞추지 않은 채 계속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인 그것에 피지배자들은 자신이 배려받고 있다고 까지 느끼고 때로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런 걸 잘했다. 이 나라는.
그런데 그런 건 이제 낡았다.
자신들이 자랑하는 <내셔널 갤러리>와 <대영 박물관>에 지배의 역사를 통으로 채우고 또 템즈강 건너 <테이트 모던>에는 식민지들의 항변의 역사를 또 한가득 채우고. 어쨌거나 누가 지배하고 누가 지배당했는지, 아무리 항변한들 힘은 누가 가졌는지 계속 증명해 대고 있으니. 그것참 저 일진이 제일 쎘다고 광고해대는 고문관의 하소연이란. 게다가 공짜다. 그래 자꾸 와서 봐라. 누가 제국이었는지.
지나간 역사를 바로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기록된 역사는 흔한 말처럼 승자의 역사니까. 그 현장에서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한들 누가 천사고 누가 악마인지, 누가 착한 놈이고 누가 나쁜 놈인지는 모두의 입장에 따라 다르고 신념에 따라 다르다. 그러니 알아야 할 것은 힘의 역학관계이다. 그리고 그것의 해석은 입장과 신념에 따라 각자 알아서 하면 된다. 그러면 남는 것은 ‘설득’이다. 누가 자기 입장에 더 많은 이들이 동조하도록 설득할 것인가? 그래서 저마다의 입장을 유리하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 놀음에는 온갖 캠페인과 무브먼트가 동원된다. 그리고 방향성은 힘과 자본이 결정한다.
그러나 송곳처럼 뚫고 나오는 누군가,
전봇대처럼 굴복하지 않는 누군가,
누군가 나타나서 그런 모든 흐름을 꺾고 부수고 새로운 이념과 논리를 세상에 전파하면 그건 ‘사상’이 되고 ‘혁명’이 된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결국 힘과 권력에 흡수되지만, 그 힘과 권력조차 몇 도씩 방향을 틀게 되는 거다. 그 사이에서 자유와 인권이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그러니 계속 부딪히는 수밖에.
그런 걸 예술이 하는 거고 사상이 하는 거다.
그런데 지금, <테이트 모던>을 채우고 있는 그것들은 낡았다. 실망스러울 정도로 낡았다. 그것에는 새로움이 없고 낡아빠진 패러다임의 반복만 있었다. 도대체 교황청의 음모론과 독일, 영국, 일본 제국주의를 미국이 대신하고 있다고 하면 그걸로 끝인가? 지배와 식민의 이분법이 얼마나 교묘하게 대중의 심리를 파고들며 자본과 인정욕구, 꿈과 생존 욕구, 사랑과 지배 욕구를 이간질해대고 있는지, 그런 낡은 제국주의적 야만이 ‘Political Correctness’라는 가면을 쓰고, ‘ESG’라는 포장을 두르고 유혹하고 협박하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지. 그런 얘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원주민의 인권이라니. 미제국주의의 약탈이라니.
이미 자본 권력은 국가의 경계를 넘어선 지 오래고, 정치적 식민은 온라인 포탈과 디지털 플랫폼에 주권을 넘긴지 오래인데, 도대체 자기 땅을 빼앗긴 원주민의 이야기가 모던에 어울리긴 한가? 그것도 중요한 문제라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인가? 50년 전, 100년 전의 문제가 눈앞에 닥친 인류의 정체성 위기와 100년 뒤, 1000년 뒤 다가올 인류의 미래보다 중요한가? 것도 힘의 매커니즘에 대한 고찰이 아닌 고작 현상의 고발에 치우친.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의 교묘한 선전선동은 우리의 시선을 100년 전 문제에 붙들어 놓구선 눈앞에 당면한 현실은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런 건 어쩔 수 없으니 외면하게 만드는 데 있다. 100년 전 원주민들처럼, 총칼 앞에서 어쩌겠는가 하게 만드는 거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그럴듯한 뮤지엄에서 전시할 권리는 주는 것으로, 그들이 예술가라는 딱지를 붙여주는 것으로 바꿔 먹고, 자신의 통찰과 감각으로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지 못하도록 잘라먹고 있는 것이다. 매우 망실하게도.
도대체 환경의 위기는 인간이 어쩐다고 뭘 어쩔 수나 있나? 그게 되는 거면 뭐가 걱정인가 닥치면 하겠지. 아니 환경행사 한다며 도로 막아놓고 뜀박질이나 하고 전시나 하면서, 썩지도 않는 텀블러랑 에코백이나 잔뜩 팔아대면 환경보호는 다한 건가? 쓰레기 제로 한다며 현수막, 포스터, 전단은 왜 만드는 거야. 구전으로만 하던지. 최첨단의 바이럴 마케팅은 다 어쩌고.
마법사가 이해하는 모던은 바로 ‘나’다. 나에 대한 이해. 나를 이해하기 위한 타인에 대한 이해. 나를 주장하기 위한 타인에 대한 존중. 뭉뚱그려진 봉건 제국사회의 ‘전체’가 아닌 개체이자 전체로서의 ‘나’, ‘개인’의 발현. 그것이 16세기로부터 비롯한 르네상스의 실체이고, ‘나’를 넘어선 개인의 확장으로서의 공동체와 커뮤니티, 개인과 개인이 자기의 확장을 위해 연대하고 연결하여 만들어가는 새로운 ‘나’, 심지어 포스트 휴먼, 사이보그 트랜스 휴먼과의 결합에까지 자기를 확장해 가는 것이 모던을 넘어 ‘포스트 모던’의 발현일 것이다. 그런데 전근대적 식민 패러다임은 뭔가? 아직도 증식해야 할 ‘전체’가 남아있는가? 암 덩어리를 키워봐야 모체를 잠식해갈 뿐일 식민적 이분법으로 ‘모던’은 커녕 끊임없이 연결되고 분리되는 ‘포스트 모던’의 대양을 헤쳐 나갈 수 있겠는가?
마법사의 이런 따끔한 잔소리를 감지했는지, 영국은 마법사가 이 포스팅을 작성해 놓고 딴짓하는 동안 총리를 바꿔 치워버렸다. 식민지 출신 이민자의 후손을 데려다가 말이다. 빠르다 빨라. 그러나 이것도 한낱 세련된 정치쇼가 아닐지 모르지만, 파운드화 폭락에 외환위기 직전까지 치닫고 있다는 영국의 당면한 현실을 보면 급하긴 급했나보다 싶기도 하다. 조만장자에다가 피부색만 이민자의 후손인 신임 총리의 프로필을 보면 그게 뭐 변화인가 싶을 수도 있다만, 여전히 계급구조가 국민들의 인식 속에서 작동되고 있고, 아직도 왕을 섬기고 있는 영국의 내밀한 현실을 보면 단순한 정치쇼라고 보기에는 좀 놀랍기는 하다.
고통 분담 싫다며 브렉시트 할 때는 언제고, 자기들 죽게 생겼으니 이제 도리어 떠오르는 동방의 인구 대국에 머리 숙이고 의탁이라도 해볼 요량인가? 총리 자리를 턱 하니 내주고 뭘 가져가려는 걸까? 어쨌거나 낡아빠진 식민적 이분법으로 얼마나 버티는지 두고 보자. 다시 십 년 뒤의 <테이트 모던>에는 ‘전체’가 아닌 발현된 ‘개인’들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을지. 그때에는 진정 ‘모던’ 할는지. 마구 분리되고 이리저리 연결되는 ‘포스트 모던’의 사회가 박차를 가하고 있을 즈음에 여기 이곳 <테이트 모던>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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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