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편 마법사와 서편 마법사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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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탕탕! 조용, 조용! 많이 시끄럽군요. 다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건 알지만, 이제 곧 마법사 멀린이 도착할 예정이니 대화를 그만 줄여 주시기 바랍니다.”

마스터 회의가 열리는 움직이는 마법의 성은 교토 인근의 비와코 호수 상공에 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마스터 회의. 7천명의 마법사들은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끌벅적합니다. 75년 만의 만남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반갑습니다. 직관을 통해 전해 듣기만 했는데 서편 마법사 아이작이시죠? 전 오늘 마스터 회의의 청문위원을 맡은 동편 마법사 남준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남준님 반갑습니다. 남준님 활약상에 대해서는 우리 지역에서도 매우 유명합니다. 요즘도 말 타고 다니시나요?”

“하하 아니요. 요즘은 모빌리티가 워낙 발달해서, 자전거도 타고 오토바이도 탑니다. 아.. 저희 지역을 디스하신 건가요?”

“하하하 아닙니다. 디스라니요. 남준님이 어떤 분이신데 디스를 하겠어요. 어디서 듣기로 마법사 이미지 관리 때문에, 말 타고 다니는 마법사가 아직 있다고 하길래.. 혹시 아시나 하고 물어봤습니다.”

“아, 말 타고 다니는 마법사가 백두산 어딘가에 있다고는 들었는데 저도 본 적은 없습니다. 요즘 뭐 앱 하나면 어디든 데리러 와주고 모셔다 주니, 굳이 말똥까지 치워가면서 말 탈 일이 없죠. 아무리 전통 이미지 보존이 중요하다고 해도 말이죠. 우리 마법사들도 좀 변화해야 합니다. 시대가 어느 땐데 아직도 주문만 외우고 공중부양 연습하고 있습니까? 코딩도 좀 배우고, 코인 투자도 좀 해보고, 숲에서 나와 세상도 경험하고 좀 그래야 합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를 괴롭히던 율법사들 꼴 난다니까요. 보세요. 다들 법원 앞에서 공증이나 해주고 서류나 작성하고들 있지 않습니까? 뭣도 모르는 프로그래머들이 위자드 흉내를 내고 있고. 뭐 코드 세계에서야 자신들이 위자드 시늉을 할 수 있겠지만, 어디 세상이 그렇습니까? 밥 먹고 똥 싸는 걸 캐릭터가 대신해 줄 수는 없잖아요? 그런 면에서,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연동 세계를 구축하려는 [스팀시티]의 비전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래서 청문위원으로 나서셨군요. 저는 좀 생각이 다릅니다만. 서편 지역에서는 아직 코드가 일상을 침범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오프 세계의 비중이 코드 세계의 비중보다 아직은 절대적이죠. 아직 CD를 듣고 심지어 LP도 잘 유통이 되고 있으니까요. 남준님은 모빌리티 애용자라고 하시지만, 저희 지역 경찰들은 아직도 말을 타고 다닌답니다. 오프 세계의 비중이 아직 절대적이지만, 아무래도 미래가 동편에서부터 진격해 오니, 다들 불안해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서 저희도 [스팀시티]의 도전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간에 완충재 역할을 해주면 좋고, 나아가서 온오프가 효율적으로 연동되는 4차 세계를 구현해 준다면, 급작스런 코드 세계화로 인한 혼란을 잘 건너가게 도와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런데 그래서 걱정스러운 겁니다. 커뮤니티란 자고로 오프라인에서 지지고 볶고 얼굴 맞대고 호흡을 맞춰가는 시간이 절대적인데, 총수를 온라인에서 선발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게 미팅 한 번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일입니까? 스펙도 보고 테스트도 치르고 해야죠. 경솔했어요. 두 명의 총수가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누가 보증한단 말입니까? 다 본인의 말이지 않습니까?”

“뭐 그런 점이 있긴 하지만, 두 사람 다 어쨌든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조총수는 기사도 많이 있더군요. 라총수는 자신이 쓴 책이 이미 발간되어 있기도 하구요. 그 정도면 신분은 확실한 거 아닐까요?”

“사기 치는 사람들일수록 이력이 화려하죠. 그런 사람들일수록 기사와 자료들로 자신을 보증하려 들기 마련입니다. 그게 코드 세계의 한계란 말입니다. 오프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소통이 오히려 봉쇄되어 있어요. 암튼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오늘 청문위원을 자청했습니다. 저희 서편 지역에서는 [스팀시티]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문제도 많다고 지적들을 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어쨌거나 그런 것들은 멀린의 생각을 좀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럼 그레이트 마스터는 몇 분이나 오시는 거죠?”

“그레이트 마스터요? 그랜드 마스터 아닌가요?”

“아, 서편 지역에서는 그랜드 마스터라고 부르죠? 동편에서는 그레이트 마스터라고 부릅니다. 오늘 회의가 동편 지역인 교토에서 열리고 있으니 호칭은 그레이트 마스터로 통칭 될 것 같은데요?”

“그랜드와 그레이트.. 무슨 차이죠? 문화 차이인가요?”

“글쎄요. 아마도 그랜드 하면, 지역전쟁을 많이 치른 서편 세계의 문화를 반영한 게 아닐까요? 조금이라도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것이 서편 세계의 권력 목표였다면, 우리 동편 지역에서는 영토확보전은 이미 오래전에 정리가 되고, 업적 경쟁이 더 주요한 권력 목표였으니까요.”

“아.. 문화적 우수성을 어필하시려고요?”

“하하 아닙니다. 우리 동편 지역이야 일찌기 영토 경계가 확정되었고, 내전이나 세계대전으로 유발된 침략전이 있긴 했지만, 일찌감치 국가체계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봉건제를 기반한 영주제, 제후제가 근간이었던 서편 지역하고는 통치 조직의 성격과 역사가 많이 다르죠.”

“네네 그럴 수 있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기 때문에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도 다를 수밖에 없죠. 동편 지역이 절대왕정 국가를 토대로, 상명하복의 경직된 커뮤니티가 주류를 이루어 발전했다면, 우리 서편 지역에서는 아무래도 다 고만고만하고 이리저리 영토가 연결되어 있어, 끊임없이 경계를 넘는 소통을 해야 했던 게 사실입니다. 민주주의가 괜히 우리 지역에서 시작된 게 아니죠.”

“일리가 있는 말씀이십니다. 아무래도 서편 지역은 섞이고 나뉘고 서로 침범하고 동화될 일이 많았죠. 근대 이전까지는 동편 제국의 침략을 여러 차례 받기도 하지 않았나요? 훈족 덕분에 대이동을 하시기도 했고, 몽골제국 한테는 꼼짝없이 당하기도 하셨잖아요. 명나라 정화함대는 오히려 신사적이었죠. 청나라 때에는 신경도 쓰지 않던 오랑캐였는데.. 아 제국주의 시절에도 인도랑 남동 지역을 찝적대긴 했지만, 동편 지역 대부분은 자기 질서를 잃지 않았죠. 동편끼리의 갈등은 좀 있었지만.. 뭐 그것도 영토 경계의 큰 변화 없이 제자리로 모두 돌아갔으니, 그랜드 개념은 동편 지역에 어울리지 않긴 하네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니, 멀린님이 선출형 대표나 임기제 리더가 아닌, 굳이 총수를 추대하려고 했던 배경이 좀 이해가 가기도 하네요. “

“듣자 하니, 뭔가 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민주 사회를 위한 현대문명의 탄생은 아무래도 우리 서편 지역의 역할이 더 컸다고 볼 수 있겠지요. 동편의 경직된 리더십 문화로는 이 수평적인 코드 세계에 적응하기가 어려울 수 있어요. 우리 서편지역이 괜히 코드화를 늦추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한정된 오프라인의 영토와 달리 무한한 코드 세계의 영토에서는 절대권을 확보하는 게 어려운 일이죠. 어디든 자신들만의 제국을 새로 건설해버리면 되니까요. 한정된 영토에서 벌어지는 헤게모니 투쟁과 무한한 코드 세계에서 벌어지는 헤게모니 투쟁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죠. 우리 서편 마법사들은 이러한 점에서 [스팀시티]의 총수직에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마음에 안 든다고 [스팀시티] 2, 3 만들어 버리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구성원 없이 어떻게 커뮤니티가 존재하죠? 우리 서편 세계가 서로 마음에 들지 않고 늘상 갈등하는 사이였어도, 굳이 하나하나 설득해가면서 연합체를 구축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정된 영토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서로가 벗어날 수 없으니 손을 잡지 않으면 도태되거나 배제되죠. 그렇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동지가 아니면 적이 되니까요. 그런데 코드 세계에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굳이 커뮤니티를 구성할 필요가 없잖아요. 도메인 하나 사서 새로운 커뮤니티를 꾸리면 되니까요. 그러니까요.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단 말입니다. 구성원이 존재하지 않는 커뮤니티를 만들 수 없는데, 왜 한 명이라도 더 연결해서 구성원의 규모를 확장시킬 생각을 하지 않고, 올드비라고, 텃세 부린다고, 고래들을 배제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요? 재산도 없으면서..”

“그러게요. 그 부분은 저도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코드 세계의 한계를 극복하자고 시작한 [스팀시티]였는데 오프 세계에서라면 당연한 과정을 생략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긴 합니다. 동편 지역의 전통을 따른 것 같기도 하지만..”

“전통이요? 동편 지역에는 그런 전통이 있습니까?”

“아.. 그러니까 서편에서는, 이 지역에서 핍박을 받으면 저 지역으로 도망을 치기도 하고, 이 제후와 저 영주가 편을 먹고 정권을 뒤집기도 하지만, 비교적 절대국가 체제를 일찌감치 확립한 동편에서는 All or Nothing이라고 할까? 암튼 새로 전복한 질서는 새로운 인적구성 위에 설립되어야 한다는 전통 같은 게 있죠. 삼족을 멸하기도 하고, 산하 관리들을 능력 여하에 상관없이 싸그리 갈아치우기도 하고, 그래야 자리를 유지할 수 있거든요. 언제든 정권에 도전하는 세력들이 등장할 수 있으니까요.”

“아.. 그럴 수도 있군요. 우리야 전세가 불리해지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다시 세력을 구축하기도 하고, 다른 영지를 바탕으로 제후국을 만들 수도 있는데 말이죠.”

“네.. 그러시잖아요. 필요하면 왕도 꿔주고 서로 바꿔쓰고 하시던데 말이죠. 동편 지역은 배타성이 좀 강한 편입니다. 질서가 축적된 시간이 길고 오래되어서 사람들이 그 한계 밖을 잘 나서지 않죠. 전복보다 탈환의 개념이 강한 편이죠. 한반도 지역 정권의 역사는 심지어 500년, 1,000년 동안 유지되기도 했으니까요.”

“1,000년이요? 아니 천년 동안 정권이 바뀌지 않았단 말이에요? 이거 참 놀라운 일이로군요. 어떻게 한 체제가 1,000년을 갈 수가 있죠?”

“네 참 대단한 일이지만, 관점을 바꿔서 정치적인 영향력으로만 따진다면, 사실 서편지역의 권력은 교회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까? 교권을 중심으로 보자면 2,000년간의 권력이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긴 합니다. 우리 서편 지역의 헤게모니는 사실 종교성에서 기인한다고도 볼 수 있죠. 나라와 국적은 달라도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인종처럼 존재하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종교적 정체성이, 영토를 기반으로 한 국민 정체성보다 더 강력한 것 같기는 하네요. 종교적 정체성은 이 땅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천국 시민이라는 선민의식이 매우 강력한 결집력의 근본입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사이에서 개인의 선택의 여지는 없으니까요. 사후세계에까지 미치는 권력의 영향력이란 엄청난 것이죠. 게다가 영혼 심판과 연결된 개종의 정당성은 어떤 국가수호의 이념보다 강력할 수밖에 없죠. 마치 현실 세계의 고래가 되듯, 전도와 복음전파가 사후 세계의 신분을 확정해 주니까요.”

“그건 참으로 신비로운 것 같아요. 인간의 종교성 말이죠. 우리 동편 지역에서는 이 부분의 영향력이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념의 경계가 현실을 벗어나지 않죠. 기껏해야 저승으로 가지 못해 구천을 떠도는 귀신 정도의 영향력이라고 할까? 그건 저주지 축복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런 말도 있어요. 똥 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

“이승이 낫다라.. 우리 세계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목숨도 아낌없이 던지는 신념이 더 강한데, 참 엄청난 차이군요.”

“네 그런 면에서 우리 동편 지역의 세계관은 매우 현실적이죠. 지금 바로 이곳에서 부자가 되고 권력을 얻어야 해요. 다음 생은 기약할 수 없죠. 아.. 물론 착하게 살면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다음 생에 복을 얻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태어난 다음 생도 현실 세계이죠. 저 하늘나라 어디, 신이 다스리는 에덴동산이 아닌 거죠. 그러니 다시 태어나도 왕이 다스리고, 조정의 권력 암투가 끊이지 않는 현실 세계를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일찌감치 입신양명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거죠. 어느 생에도 마찬가지이니까요.”

“우리 서편 세계의 종교성에는 중간자가 없어요. 신과 나, 일대일의 관계가 주요한 관계이죠. 그래서 신 앞에 떳떳할 수 있으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개인주의가 발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해요. 그러나 그러한 신관에 따라 폭력도 명분을 갖게 되죠. 우열로 나뉘고 선민의식에 따라 인종을 쉽게 차별하기도 하죠. 그러나 끊임없이 영토전쟁을 치러야 했던 우리 사회의 지역적 특성에서, 종교성만큼 지속적으로 갈등을 유발하고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이 없어요. 민족적 차이나 언어적 차이보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피아구분이 훨씬 쉬운 명분이니까요.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활용하려면 수직적 갈등보다는 수평적 갈등을 유발시키는 것이 더 효과적이죠. 수직적 관계라고 해 봐야 신과 자신뿐이니, 개입해 들어갈 여지가 많지 않지만, 신 앞에서 무차별적으로 평가의 대상이 되는 인간군상은 왕이라고 해서, 종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없고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신 앞에 모두가 평등하고, 그러므로 신의 인정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고 더 큰 면류관을 얻으려면, 모든 개인이 노력해야 해요. 모두가 뜀박질을 해야 하죠. 가족이어서 봐주거나, 부모나 자식이어서 면제되는 것이 없죠. 심판자는 신뿐이고, 인간은 그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지만, 또한 모두가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해야 하니까요. 그건 대체될 수 없어요. 그 경계가 우리 지역 개인주의의 경계예요. 신 앞에서 받는 평가의 경계 말이에요.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죠. 동편 지역에서처럼 커뮤니티에 한 번 소속되면, 뭔 짓을 해도 단지 구성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면죄를 받거나 면제를 받는 것이 아니니까요.”

“듣고 보니 참 많이 다르군요. 각 문화의 특성이 모두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세상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고 음양이 있으니까요. 아.. 이건 동편 세계관인가요?”

“아닙니다. 이분법이라면 천국과 지옥으로 나뉜 우리 전통이 더 강하죠. 다만 그것에 선택적 우열을 부여했을 뿐이고, 동편 지역처럼 조화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양자역학의 발견 이후로는 우열의 개념도 많이 옅어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 우열 개념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조화를 중시하는 동편 지역도 결국 수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교류가 없던 시절에는 우리 질서에 따라 살면 그만이지만, 지구촌이 하나로 묶이고 있는 이 현세기에는, 다 달려가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신분과 소속에 따라 먹여 살려주는 세상이 더 이상 아니게 됐죠. 그게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며 서편 사회가 동편 사회를 압도하게 되는 크로스포인트이기도 한데, 그런데 보세요. 포스트 모던 사회로 진입한 이 시대는 절대성을 오히려 터부시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건 아직 모릅니다. 온 세상이 절대성을 버리고 상대적 세계로 들어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보세요. 코드 세계는 0과1의 2진법으로만 구성되어 있어요. 누가 설계한 거죠? 이 코드 세계는 어느 사회에서 출현한 건가요? 이게 0.1~0.9가 존재하지 않는, 그러니까 빨강과 파랑이 아닌, 한반도의 언어처럼 발그레, 푸르스름하다는 표현이 불가능한 시스템이란 말이에요. 마치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시스템으로 보여지는 이 코드 세계의 본질이, 실은 매우 강력한 이분법적 질서로 설계되어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오히려 오프 세계에서는 사라진 마녀사냥 같은 것이 더 횡행하게 된 것 아닙니까? 수평적 구조의 상징이라고 여겨지던 코드 세계의 커뮤니케이션 말이에요. 오히려 더욱 소수가 주도하잖아요. 우리가 멍청해서, 아직 전산화를 하지 않고 종이와 팩스 같은 구식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코드 세계의 이분법은 세상을 중세로 돌릴지도 모른다구요. 동편 세계는 어둠의 중세를 경험해 보지 않았잖아요?”

“네 맞아요. 그 부분은 요즘 우리 동편 사회에서 첨예하게 떠오르는 주제이죠. 이 이분법 세계에 대한 추종이, 현대 동편 사회에 있어서는 매우 강력한 추동력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어떻게 전개되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오히려 잘 모르는 듯해요. 무분별하게 신자유주의, 세계화, 정보화의 첨병에 나서고 있죠. 심지어 이 블록체인/디지털 화폐의 세계는 도대체 인류를 어디로 데리고 갈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아요.”

“자. 제가 경고하고 싶은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에요. 동편 사회는 돈에 환장해 있어요. 아.. 물론 돈의 화신들이 우리 서편 사회에 더 많고, 온갖 피해를 양산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신중한 거예요. 요즘의 동편 세계를 보고 있자면 자본의 십자군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제3세계 노동력에 대한 차별은 오히려 서구사회보다 더 심각해요. 우리는 이민의 역사도 길고, 인종 섞임의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동편 사회는 인종적, 지역적 동질성에 갇혀 있었잖아요. 그것을 넘어설 이념이나 신념도 없구요. 어쨌거나 악용되기는 했지만, 서편 사회의 크리스챠니티는 ‘신 앞의 모든 평등’이라는 절대성 역시 포함하고 있어요. 차별에 대응한 인권개념 확대의 근간이 되어주기도 했구요. 그런데 동편 사회의 신분제는 오히려 더 강력하죠. 인도의 카스트 제도 같은 것들이 현대 사회의 계급제로 전이되어, 더 강력한 자본 계급제로 강화되고 있잖아요. 마치 돈의 신, 맘몬의 교도들처럼 말이죠.”

“네 그래요. 심각하죠. 홍콩의 가사 도우미 숙소 같은 걸 보면, 이게 과연 사람 사는 사회인가 의문이 들기도 해요. 말씀해 주신 것 중에, 코드 세계의 본질적 특성인 이진법적 이분법이, 과연 어떻게 전개될지 공포스럽기도 하네요. 이건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가 아닐까요?”

“아니요. 우리 사회는 이미 많은 경험이 있어요. 중세와 제국주의를 거치며, 이분법적 힘의 동력이 사람을 어떻게 살리고 또 어떻게 죽이는지 이미 충분히 경험했죠. 그런데 그걸 배제할 수 없어요. 인류는 이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셈이니까요. 한번 드러나 버린 힘을 제거할 수는 없는 법이죠. 잘 다뤄가는 수밖에..”

“그런 면에서 멀린의 생각이 더 궁금해지네요. 한반도는 동편 지역 중 가장 절대성의 문화에 접근한 곳이기도 해요. 가장 종교적이죠. 특히 기독교는 동편 지역에서 유일하게 한반도에서만 받아들여졌어요.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자리를 잡지 못했죠. 조선시대에 발전했던 성리학은 세상을 이와 기로 나누고 매우 강력한 이분법적 질서를 발전시켜왔어요. 심지어 근대의 성리학자들은 제 발로 신부를 찾아가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요즘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한반도의 문화적 흐름인 ‘한류’도 그렇고. 유달리 발전해 있는 코드 세계의 인프라와 저변, 나아가 코인계에서도 독보적인 김치 프리미엄까지, 동편 지역 중에서는 서편 세계의 문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죠. 물론 분단이라는 역사가, 서편 사회로의 흡수를 생존의 조건처럼 받아들인 탓도 있겠지만 말이에요.”

“오.. 그렇군요. 그래서 멀린의 글에 종교적 관점이 자주 등장하는군요.”

“네 그래서 이름도 멀린이죠. 멀린은 영국 마법사 아닌가요?”

“네 서편 마법사들의 원조 격이죠. 가장 유명한 마법사이기도 하구요. 기독교 국가사회의 원형이기도 해요. 마법사 멀린과 아더왕, 원탁의 기사.. 독특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죠. 마법사 멀린에 대해서 처음 들었을 때 그래서 의아하기도 했어요. 동편에도 마법사들이 많잖아요? 다들 서편 이름을 사용하나요?”

“아닙니다. 저만 해도 남준이니까요. 오히려 멀린 마법사가 독특하죠.”

“아.. 남준이라면, 대마법사 백남준을 말하는 겁니까?”

“네. 제 상위자아를 공유하고 있죠.”

“아 그렇습니까? 반갑습니다. 백남준은 오히려 서편에서 더 유명하죠. 그의 넥타이 퍼포먼스는 아주 멋졌어요. 저도 그자리에 있었거든요.”

“아 그러시군요. 그 자리에 계셨었군요. 그렇다니 더 반갑네요. 그런데 아이작 이름을 쓰시는 걸 보니, 뉴턴 계열이신가 보네요?”

“아.. 네 뭐 그런 셈입니다. 우리 계열은 워낙 나툼이 많아서 큰 연관은 없습니다만.. 어쨌거나 백남준 같은 마법사가 고향에서보다 우리 지역에서 더 유명하다니, 참 우리 마법사들의 삶이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네, 그래요. 사실 동편 지역, 아니 전 세계에 코드 세계의 인프라를 구축하게 해 준 이가 백남준이죠. 그의 광대역 통신망 개념이 클린턴 행정부에 영향을 준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아요.”

“하하 맞아요. 자기 개념을 허락도 안 받고 카피했다고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바지를 내려 버렸죠. 암튼 기개가 대단한 마법사였습니다.”

“업적에 비하면 고향에서는 찬밥신세나 다름없죠. 원래 선지자는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요.”

“네.. 멀린도 그런 상황인 거죠. [스팀시티] 프로젝트는 인류 역사에 매우 중차대한 프로젝트가 될 텐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서편 사회에서는 [스팀시티] 프로젝트를 매우 주목하고 있어요. 동편 세계의 신자유주의적 폭주가 매우 불안해 보였거든요. 우리 사회가 수백년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들어 온 시스템을, 그렇게 무분별하게 접목시켰다가는 커뮤니티에 너무 큰 해를 입히게 돼요. 삶의 격차를 제어할 수가 없게 되고 엄청난 갈등이 반복되죠.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 해요. 이분법적 절대성의 권력, 게다가 종교화된 자본에 대한 신념은 매우 위험해요. 인간의 삶이란 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 사회가 그걸 쫓다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동편 사람들은 아직 그걸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네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미 열어 버린 판도라의 상자를 다시 닫을 수도 없죠. 게다가 서편 사회와의 격차를 좁히려면 우리로서도 표준화되어버린 세계 질서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어요. 많은 갈등과 피해가 있겠지만.. 그래서 우리가 이 새로 도래하는 질서, 블록체인/암호화폐와 [스팀시티] 프로젝트에 기대를 걸어보고 있는 것 아니겠어요. 멀린은 그 두 세계의 질서를 잘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그럴까요? 멀린은 그래서 [스팀시티]를 시작한 걸까요?”

[스팀시티] 청문회의 청문위원인 동편 마법사 남준과 서편 마법사 아이작의 대화는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회의장을 빼곡히 채운 7천명의 다른 마법사들도 저마다 자신의 견해와 직관을 놓고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영토에 원폭투하를 놓고 열린 마스터 회의 이후, 75년 만에 열린 마스터 회의가, 공교롭게도 일본 영토에서 다시 열리게 된 것은, 마법사 멀린이 이곳 교토의 가모가와 바다로부터 30세기에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마법사 멀린이 활동하는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시공간 포털이 교토 가모가와 바다에 있기도 합니다. 또한 이곳은 시의 마법사, 윤동주가 영원의 세계로 들어간 지역이기도 합니다. 마법사 멀린은 이곳에서 윤동주의 발자취를 발견하고 다시 21세기로 돌아올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十字架(십자가)가 許諾(허락)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어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읍니다.

_ 윤동주, [十字架(십자가)]

마법사 멀린의 십자가는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그를 30세기의 미래 사회에서 21세기의 인류에게로 돌아오게 했을까요?

이곳 움직이는 마법의 성은 고딕 양식을 지닌 외관과는 달리, 매우 미래적인 회의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7천명의 마법사가 둥근 돔형 객석에 빼곡히 둘러앉아 있고,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무대가 지면에서 살짝 떠올라 있습니다. 이곳 무대에서 곧이어 마법사 멀린의 청문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이미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는 마법사들과 함께 오늘 회의의 사회를 맡은 그랜드 마스터 찰스와 직관어의 해석자로서 최종 심리관 역할을 맡은 그레이트 마스터 이도가 막 무대에 올라, 마스터의 상징인 백색 의자에 착석하였습니다. 그때 회의장 왼편의 거대한 원형 문이 좌우로 벌어지며 마법사 멀린을 태운 하루카 열차가 회의장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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