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행 하루카 열차와 에이전트 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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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행 하루카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지친 마법사는 허망한 마음을 안고 기차에 오릅니다. 떠들썩했던 <미니스트릿>이 끝난 지 겨우 열흘이 지났을 뿐입니다.
‘아.. 어쩌다 이런 일이.. 왜 또 이런 일이..’
차창 밖으로는 검은 구름이 잔뜩 비를 머금고 있습니다. 당장 울음을 터뜨릴 듯 찌푸린 하늘은, 마치 마법사의 애간장 같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지. 늘상 이런 식이야. 언제나 중단되고, 언제나 단절되었어. 이놈의 마법사의 인생이 늘 가다서다를 반복하니, 이거 참.. 허.. 나 이거 참..’
마법사는 연신 한숨만 쉬어댑니다. 마법사의 한숨을 출발신호로 읽었는지 기차는 덜컹하고 레일을 나서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이럴 줄 알았어. 그 때 닭 먹고 딱 빠져나갔어야 되는데, 왜 휘말려가지고서는..’
“휘말리다니요. 아무도 시킨 일이 아니었잖아요. 괜한 말씀을.. 후회하는 모습은 마법사답지 않네요.”
“네? 누구.. 누구시죠?”
“우리 구면인데. 잊으셨나 보네요. 에이전트 세븐이에요. 25세기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요. 5세기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텅 빈 기차 객실에 승객이라곤 마법사와 맨 뒷열에 잠들어 있는 회사원뿐입니다. 레일을 달리는 덜컹거리는 소리와 다음 정착역을 알리는 안내멘트를 제외하고, 아무런 인기척이 없는, 정적 속을 달리고 있는 기차 안. 한숨을 쉬며 차창 밖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던 마법사의 옆자리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매우 세련되어 보이는 여성이 앉으며 말을 걸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아시다시피, 마법사는 레테의 강을 건너, 시간을 넘어오면 지난 기억을 다 잊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억이.. 25세기에 뵀다구요?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 25세기에서는 무슨 관계였죠?”
“흠.. 그런 얘기는 오늘 할 건 아닌 것 같네요. 암튼 수고하셨어요. [스팀시티]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답니다. 어려운 일을 하셨더라구요.”
“네, 그래요. 어려운 일이었어요. 다시 하고 싶지 않았던 결과로 또 이어졌지만요.”
“상심이 크신 가봐요.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잖아요. 너무 낙심하시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은데..”
“끝나지 않은 일인가요? 모르겠어요. 늘 이런 순간이 오면 모든 걸 끝내버리고 싶어져요. 물론 미련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왜 마법사를 이렇게 대하죠? 다들.. 손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네, 그렇죠. 우리들의 역할이 다 그렇죠. 하지만, 그것이 또한 마법사의 존재 이유가 아니겠어요. 결정적일지라도, 대신 선택할 수 없는 안타까움 말이에요. 이미 다 감수하시기로 서원하셨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죠. 안타깝지만..”
“네 그랬죠. 서원했죠. 예언하되 대신 선택하지 않기로, 길을 보여주되 선택한 길을 따라가 주기로.. 근데 이제 좀 지겨워요. 사람들 하는 짓이 다 똑같고 넘어지는 지점도 다 비슷하니까요. 그걸 매번 반복하는 일도 못 할 짓이에요. 이런 거면 마법사 따위 하지 말 걸 그랬어요.”
“좋아하셨어요. 늘.. 사람들에게 미래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일. 세상에 이렇게 보람된 일이 없고 즐거운 일이 없다고 하셨었죠. 그래서 자꾸 과거로, 지난 시간으로, 돌아오고 돌아오고 하셨잖아요. 제게도 그렇고..”
“네? 제가요? 제가 에이전트님에게도 무언가를 했나요?”
“흠.. 기억하지 못하실 테지만.. 아무튼, 오늘은 그런 얘기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니니, 그 얘긴 다음 생에 하기로 하죠. 다들 멀린님을 기다리고 있어요.”
“아.. 저를 마중 나오신 거군요. 저는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항공편만 전달받았을 뿐 아무런 정보도 오지 않아서, 혹 문책을 당하러 가는 건가 걱정하고만 있었습니다.”
“어떤 일이 있을지는 저도 알지 못해요. 다만 저는 멀린님을 회의장까지 모시고 가는 역할만을 지시받았을 뿐이에요. 덕분에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뵐 수 있어 감사하지만요.”
기차는 간사이 공항을 떠나 작은 간이역들을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자신을 에이전트라고 소개하는 이 여인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마법사는 기억하지는 못하나, 익히 잘 알고 있는 듯 당황하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허망한 마음을 다스리고 있지 못한 듯합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아.. 규정상 에이전트는 질문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본원에 고발하시지 않아 주신다면 감히 질문을 좀 드리고 싶은데요.”
“네? 고발이라니요. 저도 고발당할 처지일지도 모르는데, 무엇이든 편히 질문하셔도 돼요. 저도 이 사고의 고리에서 좀 빠져나오고 싶..”
“왜 돌아오셨죠? 왜 돌아오신 거예요?”
마법사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에이전트 세븐의 질문이 급작스럽게 튀어나왔습니다. 마치 뺨이라도 한 대 갈기려는 듯,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톤으로.
“아, 저기 왜 화가.. 저, 저하고 무슨 사연이 있는 거죠? 아.. 물론 기억이 잠금 되어 있어,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떠올릴 수는 없지만.. 제가 뭘 잘못 했던 거죠?”
“아.. 아닙니다. 제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만.. 죄송해요. 무슨 사연이 있어 그러는 것은 아니에요. 양해해 주세요. 실은 마법사님 에스코트 미션을 받고 좀 당황했어요. 왜 내게 이런 미션이 주어졌는지, 적합하지 못한 사람일 텐데, 이것도 물론 운명의 작용이겠지만..”
순간, 마법사의 사고회로가 다시 정렬되기 시작했습니다. 마법사는 분명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을, 이 에이전트와의 운명의 고리를 기억해 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금지되어 있습니다. 미래기억은 오로지 직관을 통해서만 연결되고 해석이 가능합니다. 때가 이르지 않은 연결은 혼란을 가중시키고, 타인의 선택을 침범해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금단의 구역에 잠겨 있습니다. 그것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죄송해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아마도 이생에는 접근금지가 내려져 있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사과를 해야 한다면 사과를 드리죠. 어쨌든 이번 생에는 초면일 텐데, 무례한 일이 있으면 안되죠.”
“아니에요. 아닙니다. 이건 제 문제예요. 아.. 알겠네요. 결국 제 문제를 해결하라고 이 미션이 주어졌나 보네요. 그렇다면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 없네요.”
“네, 말씀해 보세요. 제가 기억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 답해 볼게요.”
“질문.. 질문 이미 드렸는데..”
“네? 질문을.. 아.. 아~ 왜 돌아왔냐구요. 아, 그 질문 말씀하시는 거구나. 아.. 그러니까 왜 돌아왔냐면..”
마법사 멀린은 10년 전 교토의 가모가와 바다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강릉 앞바다에서 사라져, 교토의 가모가와 바다로 돌아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30세기에 다녀왔다고 말했습니다. 30세기, 30세기의 인류를 위해 1,000년을 거슬러 돌아왔다고 말했습니다.
“전 21세기의 인류를 위해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30세기의 인류를 위해 21세기에 돌아왔죠. 21세기는 위대한 선택의 시기이거든요. 이때의 선택이 30세기 인류의 삶을 결정했죠. 그런데 30세기의 인류가..”
“위기에 빠졌나요? 25세기에서 살고 있는 저는, 그렇게 위험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요. 30세기에는 인류가 멸망하나요?”
“아니요. 아닙니다. 그건 모릅니다. 세계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요. 그리고 세계는 각자의 선택에 의해 분기되지요. 제가 떠나 온 30세기는 수많은 세계로 나누어져 있어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취향과 꿈에 따라, 삶의 방식과 존재의 형식이 모두 다르죠. 그게 분기되기 시작한 게 21세기예요. 이 21세기의 초입에서 우주는 매우 빠르게 분기되기 시작해요. 아.. 제 기억은 여기까지예요. 나머지는 현상과 조우하면서 하나씩 돌아오겠지만, 제 뇌는 여기까지를 기억하고 있어요.”
“돌아오신 건, 혼자뿐인가요?”
“아니요. 아닐 겁니다. 저 혼자 돌아오지 않았어요. 제가 알기로는 여러 세기, 여러 세계에서, 많은 마법사들이 21세기에 들어와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아, 물론 원래 21세기에서 활동하는 마법사들 말고도, 미래세기에서 돌아온 마법사들 역시, 많은 수가 각지에서, 각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군요. 제가 듣기로는, 이번 마스터 회의에 7천명이 참가한다는데, 그분들이 모두 세기를 건너온 마법사들이신가 보네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세기를 건너온 마법사들과 현 세기의 마법사들이 섞여 있을 텐데.. 아, 회의! 마스터 회의에서는 무슨 행사가 열리죠?”
“마법사님의 청문회가 열린다고 들었어요. [스팀시티]가 이번 회의에 메인 의제라고..”
“아, 그렇군요. 제가 청문회에 서야 하는 거군요. 뭘 잘못했다고..”
“아니에요. 잘잘못을 가리는 청문회는 아닐 거예요. 다만 이번 청문회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열리는 마스터 회의라고 하니, 매우 중요한 의제임은 틀림이 없는 것 같아요. [스팀시티] 말이죠.”
“네 그렇군요..”
마법사 멀린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며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Everything이 아니면 이번 생은 여기까지라며, 폭탄 같은 메시지를 던져놓고 잠적해 버린 마법사를,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총수들은? 위즈덤 러너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면서도, 매번 같은 식인 이런 패턴에 마법사도 지쳐 있습니다. 왜 운명을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 직관에 의해 전개되는 일이, 언제나 모함을 사고 굴절되며 고비를 만나게 되는 걸까요?
“답변이 미흡하죠. 제가 왜 돌아왔는지.. 그런데 기억나는 건, 그게 전부니.. 죄송합니다. 그런데 왜 제가 돌아온 사실을 궁금해하시죠?”
“실은.. 저 그때 그 강릉 바다에 제가 있었거든요.”
“네? 정말요? 그 강릉 바다에 계셨었다구요?”
“네.. 맞아요. 아.. 물론 21세기의 강릉 바다는 아니구요. 저는 25세기의 강릉 바다에 있었던 거죠.”
“아.. 아, 그렇겠군요. 25세기에서 오셨다고 했죠. 그런데 어떻게 저를 보셨죠?”
에이전트 세븐은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마법사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쥐고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아.. 이런 제가 괜한 질문을..”
마법사 멀린은 당황하여 상황을 수습해 보려 하지만,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한 에이전트 세븐은,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계속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마법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하다가, 갑자기 나지막한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고 오겠네..
“흑흑.. 기억하고 계시군요. 그 노래.. 제게 그 노래를 불러 주셨죠.”
“네.. 그랬나 봐요. 제가 그 노래를 모두에게 가르쳐 주었죠. 우리가, 함께, 부르자고..”
노래가 계속 반복되고 마법사 멀린과 에이전트 세븐은 무시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노래의 선율에 기억을 싣고, 사실이 아닌 약속과, 다짐이 아닌 연대를 기약하던, 그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사라진 대기 속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온 세상 어린이가 하하호호 웃으면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네.. 맞아요.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났네요. 이 둥근 지구를 걷고 또 걸어,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났네요.”
“네.. 멀린님.. 돌아오신다고 꼭 돌아오신다고 하더니 정말 돌아오셨네요.”
어느새 하늘은 어두워지고, 객실에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회사원과,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는 에이전트 세븐, 그리고 갑자기 기억을 소환시킨 마법사 멀린의 노래가 나지막이 공기를 채우고 있습니다. 레일 위를 내달리던 교토행 하루카 열차는 점점 가벼워지더니, 마침내 레일 위로 두둥실 떠올라, 쏟아져 내리는 빗속을 뚫고 구름 위로 나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차창 밖으로는 다른 기차가 지나가고, 그 기차에는 엄마를 찾아 끝없는 여행을 하고 있는 아이와 검은 모자를 쓴 여인이 따뜻한 눈빛으로 차창 너머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습니다. 기차 위로는, 바다 건너 강릉 바다 백사장에서 쏘아 올린 아이들의 폭죽이 교통행 하루카 열차의 앞길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마법사 멀린에게는 어떤 기억이 되살아났을까요?
에이전트 세븐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요?
레일을 벗어나 구름 위로 떠오른 교토행 하루카 열차는 은하철도의 궤도 위로 안착하고, 밤새도록 달려 [스팀시티]의 소식을 기다리는 모든 마법사들에게로 멀린을 데려다줄 것입니다. 혼란스럽고 허탈한 마음을 채우려는 듯 마법사 멀린의 노래는 끝날 줄 모르고 반복되고 있고,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있던 에이전트 세븐은 반복되는 노래 속으로 점점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그 소리 들리겠네 달나라까지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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