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노동은 하지 않습니다
[01日] Jun 17, 2021
인생 미용실을 만났다. 아니다 미용사, 헤어디자이너 선생님이다. 이분은 까칠하기 그지없다. 눈길도 잘 마주치지 않고 말이라도 잘못했다간 한 대 쳐 맞을 것 같은 인상이다. 용모도 대충대충 헤어디자이너가 맞나 싶을 정도.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이래서 미용실 하겠나 싶었다. 그런데 잘 자른다. 정말 잘 자른다. 태어나 처음 만나 본 인생 헤어였다. 기왕 왔으니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머리를 자르고 미용실을 나오며 나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아, 이럴 수가 나는 여기를 평생 다녀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이 디자이너 슨상님의 뛰어난 실력을 나만 아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나 그의 스케줄은 꽉 차 있다. 게다가 커트는 예약도 받지 않는다. 복불복으로 운 좋게 머리를 자를 수 있으면 다행이다. 아무리 예약이 꽉 차 있고 바빠도 대부분은 ‘좀 기다리셔야 되는데 괜찮겠어요?’ 하던지, 일단 앉히고 틈나는 대로 돌아다니며 잘라주기도 하는데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됩니다. 오늘은 기다리셔도 못 잘라드립니다.’ 하는 것이다. 한 번은 오전 이른 시간에 갔는데도 안 된다고 하길래 빡쳐서 돌아오며 다신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고민해봐도 다른 선택지는 없다. 인생 헤어이기에.
이쯤이면 마법사가 어디 강남 고급 헤어 살롱에라도 다니는 줄 알겠다. 지극히 평범한 상가 2층 미용실, 게다가 인테리어는 분식집보다 좀 나은, 그냥 여기가 미용실이요 하는 수준의 평범한 곳이다. 원장님, 부원장님이 존재하는 대단한 헤어살롱이 아니고 서른이나 넘었을까 싶은 미용사 선생님과 그의 어머니인지 고용인인지 모르겠는 아주머니 미용사 한 분이 계신,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외관만 봐서는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그런 동네 미용실이다. 포인트 카드도 음료 서비스도 당연히 존재하지 않는. 어쩔 수 없다는 손길로 대충 머리를 휘휘 감겨주는 정도가 최선인 서비스. 그러나 실력만큼은 비교할 곳이 없는.
마법사는 그의 프로페셔널한 작태를 보며 비즈니스의 제1원칙을 상기했다. 서비스보다 실력, 감정노동보다 매력발산.
장충동 ’20세기소년 PUB’에서 펼쳐질 <20세기의 여름>을 앞두고 이 공간의 주인장인 20세기소년은 자신의 운영철학을 명쾌하게 밝혔다.
“20세기소년은 감정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팬임을 자처하면서도 무례한 감정노동을 강요하는 손님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안 오셔도 됩니다.”
이 말을 듣고 ‘쯔즛 저래서 장사하겠나’ 생각이 든다면 당신 말이 맞다. 20세기소년은 장사를 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이 공간에서 커뮤니티를 만들고 비즈니스를 하려고 하는 것이다. 노동이 아닌 소통, 서비스가 아닌 기회를 창출하려고 공간을 연 것이지 당신의 지갑을 조금이라도 뜯어먹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서비스와 비굴한 웃음을 팔자고 시작한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20세기소년의 이 명쾌한 선언에 격하게 동의하며 이것을 이 여름의 기본자세로 삼기로 했다. ‘아랑곳하지 않음’은 [스팀시티]와 춘자의 캐릭터 그 자체이기도 하니까.
산업사회는 인간을 모두 서비스맨, 예스맨으로 만들었지만, 인류는 언제나 환경과 자연에 도전하고 동족 간에 갈등하며 형제자매와 원수가 될지언정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아등바등을 통해 진화해 왔다. 그것에는 평화에 대한 노력과 예의와 매너를 갖춘 프로다움이 있을지언정 무례한 침범과 TPO를 가리지 않는 허튼소리에 굴복하며 알량한 생계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기는 비굴함을 기본자세로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굶어 죽을지언정.
그러려면 승부할 것은 실력과 매력뿐이다. 기댈 것은 탁월함 뿐이다. 그것이 없으면 이 무한 서비스와 값싼 감정노동의 홍수 속에서 춘자들이 살아낼 방법이 없다. 마음에도 없는 인삿말과 썩소가 듬뿍 담긴 서비스로는 장인의 그것, 달인의 그것을 흉내 낼 수도 없다. 우리는 감정을 팔아본 적이 없으니까.
서비스의 달인들이 있다. 감정노동이 아닌 친절과 배려로 단련된 진짜 서비스 장인들 말이다. 그들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품격을 느끼게 해주며 자부심을 경험하게 해준다. 그리고 그런 서비스 앞에서는 누구나 겸손하게 된다. 개망나니 진상짓은 개 같은 서비스에 동반될 뿐이다.
카페라는 공간, 펍이라는 공간을 마주하고 앉아 이곳에서 팔아야 할 것이 감정노동이라면, 명색이 창작자라는 사람들이 인위적인 감정을 팔아대며 어떠한 창의성을 발휘할 것이며, 평론가라는 사람이 감정에 휘둘리면서 어떻게 냉철한 분석과 비판을 내놓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결이 완전히 다른, 그렇다고 서비스 業의 본질에도 닿아 있지 않은 그저 호구지책일 뿐이리라.
그래서 우리는 이 여름에 진입하며 우리 스스로를 감정노동에 노출시키지 않겠다 다짐했다. 2달간의 매출이 우리의 생계를 혁신적으로 나아지게 할 수도 없고, 참고 참아낸 감정노동이 우리를 행복한 공동체로 묶어줄 리는 더더욱 만무하다. 그러니 우리가 이곳에서 서비스해야 할 것은 ‘이야기’. 이야기의 장인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끝도 없는 이야기들, 새로운 이야기들이 매일매일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글로써 세상에 드러내겠지.
그러니 모두들 어떤 각오로, 어떤 태도와 자세로 20세기소년에 방문해야 할지 잘 알겠지? 어디서 반말이냐구? 미안하다. 마법사가 싸가지는 없지만 커피는 기가 막히게 내린다니 와서 마시고 가라. 그리고 돈은 니가 내는 거다. 나는 너의 이야기를 기록 할 테니.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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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여름을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