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사랑

[02日] Jun 18, 2021 l M.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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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소년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차에서 내리자마자 반갑게 인사하며 외쳤다. “마법사님 저 사랑에 빠졌어요. 연애세포가 되살아 났다구요!” 이게 웬 말인가? 사랑이라니. 50대에도 사랑이 유효하단 말인가?

이 말은 마법사의 말이 아니다. 20세기소년 스스로가 자신은 이미 연애세포가 모두 죽어버린 것 같다며 자조하던 말이다. 무얼 봐도, 누굴 봐도 더이상 설레이지 않는다고. 가슴이 動하지 않는다고. 그래 그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사랑과 연애가 호르몬의 조작질이라면 연애세포 역시 연식에 따라 소멸되고 기능이 저하되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면 인간의 사랑이란 그저 물리적 화학작용에 불과하다는 과학자들의 말에 정신세계를 탐구하는 작가들이 굴복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유효하다. 그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또한 시기와 장소, 분위기와 타이밍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불쑥 등장해서 우리의 뒷통수를 작렬하고, 번쩍 정신이 든 두 눈은 이내 몽롱해져서 오로지 그와 그녀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호르몬의 장난질이 아니라 운명의 방망이질이다.

20세기소년은 그의 가슴을 두들겨 놓은 그녀에게 어떻게 어필한 것일까? 연애세포가 다 죽어버려 좀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그의 가슴은 어떻게 다시 뜨거워진 걸까?

“당신은 ‘Unique’ 해요. 그게 ‘Attractive’ 하죠.”

이런 단어들은 제비들의 상투적인 용어일 테니, 이런 말에 홀라당 넘어갈 그녀라면 20세기소년의 가슴을 흔들어 놓을 수 없었으리라. 생략된 맥락이 있는 것이다.

“왜 제 이름 밑에 ‘비굴’이라고 적으신 거죠?”

“아.. 그건, 보셨군요?”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그의 펍에 들렸다. 장충동에 아주 좋은 곳이 생겼다며 딸을 불러낸 어머니는 그의 말에 의하면 매우 ‘Typical’ 한 미인이라고 한다. 그의 말이 맞다면 아마도 그녀의 어머니는 모든 면에서 ‘Typical’ 했으리라. 그리고 그것이 딸인 그녀로 하여금 주눅이 들고 비굴하게 만든 원인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것이 눈에 바로 비쳐 보였다고. 그래서 그는 손님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적던 노트에 ‘비굴’이라고 그녀의 이름 아래 적어넣었다.

“하지만, 당신은 ‘Unique’ 해요.”

‘Typical’과 ‘Unique’. 그것은 20세기를 설명하는 모든 것이다. 20세기는 그 두 단어가 서로 경쟁했고 그래서 지구의 곳곳에서 수많은 도전과 갈등이 일어났다. 물론 그것으로 인류는 엄청난 진화를 이루었고.

그러나 21세기는 대놓고 ‘Typical’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듯하다. 과학기술의 발달과 산업의 성장은 인류에게 수많은 다양성의 기회를 열어주고 있는 듯 보이지만, 인간의 감성과 감정, 창의성과 독창성은 자본의 폭압 앞에 모두 굴복되어 하나같이 똑같은, 어디선가 본 듯한, 이거나 저거나 다를 게 없는 복제품들만을 잔뜩 쏟아내고 있다. 여기를 가도 저기를 가도, 온통 비슷하고 뻔하고 지루한 모든 것들이 잔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도토리 키재기를 해대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 잔뜩 지루해진 20세기소년은 팔자를 타고났는지 끝도 없이 이어지는 캣콜링에 심드렁하고 무심해졌다. 그는 도대체 가슴이 설레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며 연심 하품을 해댔다. 사랑 때문에 호텔 배관봉을 타고 오르다 떨어져 허리를 다친 적도 있는 사랑꾼이 말이다.

이건 비극이다. 20세기소년이 어른이 되려면 사랑을 잔뜩 먹고 자라나야 할 텐데. 그는 자라다만 어른아이처럼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가슴으로 지루한 생을 겨우 버텨내고 있으니 말이다. 마법사는 그런 그를 보자마자 같이 하품이 나버렸다. 안 피우던 담배를 한 대 달라고 하고선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도 사랑을 하셔야 할 텐데..”

“가능할까요..”

그런데 그에게 느닷없이 사랑이 찾아온 것이다. 마법처럼, 기적처럼 그녀가 나타나 그를 와락 껴안아 버린 것이다.

“그렇죠? 그렇죠! 제가 유니크하죠? 내가 이래서 작가님을 좋아한다니까요! 작가님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하하하”

그랬단다. 다 큰 처녀가 볼품없어진 50대 이혼남을 신이 나서 와락 끌어안았단다. 크크크. 그대 지금 나이 차를 가지고 손가락질할 셈인가? 신분 차이, 이혼 경력을 가지고 쑥덕쿵 할 셈인가? 어허~ 이러니 21세기가 이 모양인 것이다. 남자와 남자가, 여자와 여자가 결혼하는 세상에서 그대의 기준은 왜 그리 구려 터졌는가?

20세기의 사랑은 그랬다. 좋아하면 고백하고 퇴짜도 맞고 뺨도 맞았다. 그런 사연을 모두 하나쯤 간직하고 황장군처럼 눈 속에서 기다리다 돌이 되기도 하고, 모텔방에서 사랑을 나누다 배우자에게 들켜서 팬티 바람으로 줄행랑을 치면서도 우리는 사랑이었다고, 맞아 죽어도 사랑이었다고 지조(?)를 지켜내던 낭만도 있었다. 불륜이 범죄였던 그 시절에도.

그러나 간통죄도 사라진 21세기의 연애는, 사랑은, ‘당신을 좋아합니다.’ 했다가 ‘여보세요? 112죠? 여기 지금 성희롱 사건이 발생했는데요. 어서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제가 피해자거든요.’ 범죄자 취급을 받을까 두렵고, ‘저와 결혼해 주세요.’ 말했다가 ‘너 뭘 가졌니? 집은 있니? 직장은? 차는? 애 봐줄 부모는 있니? 유산은?’ 청문회에 준하는 자료를 준비해도 통과될까 말까 한 것이다. 물론 폭력에 그대로 노출되어 목숨을 걸고 연애와 사랑에 임해야 하는 21세기 여성들의 처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어쩌다 사랑이, 연애가, 목숨을 걸어야 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단 말인가? 서로의 꿈을 위해 행복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거래와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행위가 되었단 말인가? 이러니 인간은 사랑포기, 연애포기를 선언하고 전쟁을 선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초딩도 아닌 다 큰 어른들이 책상에 금을 딱 긋고 남녀전쟁을 선포하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아, 이제 이런 말도 지겹다. 마법사는 21세기의 사랑과 연애는 사전에서 삭제해버려야 한다고 한탄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21세기에 시작된 20세기소년의 사랑이야기, 연애이야기에 마음이 반가워졌다. 그것은 단순히 나이를 초월한 남녀 간의 사랑, 젊은 처자와 중년 남자의 스캔들 같은 것이 아니라, ‘Typical’을 넘어서려는 ‘Unique’의 발현이기에 더더욱 흥미로워졌다. 이 젊음의 ‘Unique’는 무엇으로 21세기의 ‘Typical’을 넘어서겠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 초다양성의 21세기를 장악해버린 ‘New Typical’을, 사랑과 연애에 언제나 ‘Unique’ 했던 20세기소년은 무엇으로 극복할 생각인가?

어쨌거나 그는 해낼 것이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는 낙상의 위험에도 21세기 러브호텔의 배관봉을 반드시 타고 오를 것이다. 잡아채는 것은 ‘Typical’ 한 구린 시선의 중력이겠지만, 20세기소년이 언제 그것에 굴한 적이 있었던가? 비합리적인 공공행정에 반발하며 윤봉길처럼 담배꽁초를 길가에 투척하던 그이다. 모두가 마스크를 사재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그때에 이건 다 정부와 언론의 조작질일지도 모른다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던 그이다. 우매한 대중은 그를 관종이라고, 공공질서의 위협자로 낙인찍으며 추방해 버렸지만, 무고한 그는 21세기의 드레퓌스가 되어 공동체에서 밀려나 방황하고 있었으나, 창작자들의 시오니즘을 선언하고 나선 [스팀시티]와 조우하며 새로운 사랑의 동력을 얻게 된 것이다.

나는 그의 연애가 성.공.적. 이길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Typical’ 한 결혼과 연애의 뻔한 결과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 21세기의 누구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기의 연애’일 것이며, 그의 사랑은 20세기의 낭만과 지조가 그대로 살아나 새롭게 진화한 21세기의 사랑을 발현 시켜 줄 것이다. 국경과 나이, 관습과 신념, 지루함과 따분함을 넘어선 그 무엇으로 말이다.

물론, 그의 상대가 ‘Unique’ 한 그녀만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어잌후, 몰려올라
휘리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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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여름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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