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태어나 처음 만나게 되는 부모는

 

인생 최초의 친구이자 라이벌입니다. 신적 존재이며 영웅이지만, 성장할수록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차별화해야 할 라이벌입니다. 아들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극복하려 듭니다. 아버지처럼 힘도 세져야 하고, 키도 커져야 하고, 무슨 일이든 척척해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딸도 끊임없이 어머니를 극복하려 듭니다. 어머니처럼 아이도 잘 보살피고, 음식도 맛있게 만들고, 집안일도 척척해내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하면, 아들은 평생 아버지의 그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 세상을 뒤집어엎으려 들고,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을 무자비하게 채찍질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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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아버지를 극복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사랑의 매를 든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무심코 매를 쳐든 아버지의 손을 붙들어 버렸을 때, 나도 모르게 아버지보다 강한 자신의 힘을 경험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도 아들도 모두 순간 당황하고, 우주는 무너져 내립니다. 아버지를 그토록 극복하고 싶어 했던 아들이지만, 아버지를 넘어선 자신을 발견하는 순간, 아들은 서글퍼지고 한없이 가슴이 무너져 내립니다. 영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평생 극복의 대상으로 삼았던 그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 붙들린 손을 부끄럽게 내리고 돌아서는 아버지는, 초라하고 작아진 자신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야 책임이라는 자리에서 물러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습관처럼 반복해 오던 아니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가장이라는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게 되었음에도, 쏟아지는 현실감은 자신의 인생이 황혼에 접어들었음을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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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어머니를 극복하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자신도 어머니가 되는 그 순간입니다. 이해 못할 답답한 인생을 사는 어머니와 불화하고, 자신은 어머니와 다른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어버린 딸은 역시나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같은 인생을 반복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딸이 어머니가 되었다고 초라해지지 않습니다. 딸의 어머니는 대모(大母)가 되어, 딸과 그의 자녀를 품습니다. 그래서 평생 딸은 어머니를 극복하지 못합니다. 지나간 어머니들의 발자취를 이어받을 뿐,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가 한 것처럼, 딸의 딸을 품고 기르고 성장시켜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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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해버린 아들과 반복해버린 딸은 서로 다른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라이벌이 사라진 아들은, 냉혹한 현실의 광야에 홀로 던져지고 전사로 자라납니다. 라이벌이 아닌 대모(大母)를 얻게 된 딸은, 어머니를 이어 또 다른 대모(大母)가 되어 갑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 삼은 아들은, 무서운 현실에 떨어질까 두려워 평생을 아버지의 그늘에 숨어들고, 어머니를 라이벌의 자리에서 내려놓지 못한 딸은,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어머니와 차별화하느라, 거친 인생 속으로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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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건 모두입니다.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들을 둔 아버지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으며, 자신을 라이벌로 여기며 평생을 반목하고 갈등하는 딸을 둔 어머니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평생을 그렇게 우리는 부모와 싸우고 아파하고, 또한 따르고 배우고 극복하며 인생을 채워 갑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누가 그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우리는 대대로 부모, 자식 간의 역할놀이를 멈추지 못하고, 끝도 없는 네버엔딩스토리를 써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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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할 놀이를 멈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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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느 대에 어느 용기 있는 부모가, 어느 지혜로운 자녀가, 부모, 자식의 관계가 아닌 사람 대 사람, 온전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 관계를 전환한다면, 그는 아버지도 아들도, 그녀는 어머니도 딸도 아닌 내 인생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구가 되고 동반자가 됩니다. 우리가 불알친구의 잘잘못을 가리지 않고, 죽마고우의 실수를 이해하고 헤아리듯, 내 인생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해갈 부모와 자식을 친구로 맞아들이면,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고 용납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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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좌절을 비난하지 않고, 아들의 실패를 질책하지 않으며, 어머니의 짜증을 이해하고 딸의 서툼을 너그러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의 역할놀이를 멈춤으로 가능합니다. 평생 끊을 수 없는, 죽는 순간까지 함께 해야 할 그들과, 불필요한 반목과 라이벌 의식으로 서로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그들의 몸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을 뿐입니다. 친구 따라가는 강남, 부모 따라 지구에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여전히 우리처럼, 성장하는 중입니다. 그들 각각의 인생 여정에, 충분히 성장할 여유와 지원을 받지 못해, 비록 어리숙하고 답답하더라도, 친구라면 받아주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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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통하는 개와 고양이와도 더불어 살아갑니다. 어쩌면 그들보다 더 소통하기 어려운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하지만, 역할놀이를 내려놓고 친구가 되면, 그와 그녀의 맞은편이 아니라, 그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바라보면, 가슴 아픈 과거를 살아낸 가여운 나의 친구이며, 슬픈 인생사에 지친 불쌍한 나의 또 다른 영혼입니다. 그러니 마주 앉아, 뻗어 내린 삿대를 거둬들이고, 옆에 앉아, 슬픈 그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세요. 그토록 짜증 나고 분노케 하던 그와 그녀의 손가락과 거친 눈빛을 옆에서 바라보면, 곁에서 바라보면, 두려워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의 긴장을 읽을 수 있고, 슬퍼서 쏟아 내리는, 속눈물의 흐느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 친구는, 나의 친구는,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가장 오래된 나의 친구는, 그렇게 내 곁에 있습니다. 끊어내지 못하고, 품어 낼 수밖에 없는 나의 친구는, 나보다 늙은 얼굴을 한 채, 나보다 더 어린 마음으로 내게 소리치고 있고, 나보다 어린 얼굴을 한 채, 나보다 더 늙어버린 마음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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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그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나의 아들과 딸, 그들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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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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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소년 Ridiculous 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