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의 수

by M.멀린

[멀린’s 100] Dec 05. 2022 l M.멀린

 

 

농경시대에는 시간의 누적을 통해 자산을 축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부모님 재산 물려받고, 시간에 따라 씨를 뿌리고 열매를 추수했으니 성실과 기다림이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 들어와서는 시간의 자리를 선택이 대신하기 시작했는데, 산업사회가 가져다준 수많은 기회와 다양성으로 말미암아 자산은 시간이 아닌 선택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시간의 누적으로 얻는 것은 없습니다. 선택의 축적이 자산의 규모를 결정하고 심지어 생사를 결정하는, 무한 자유와 그로 인한 불확실성의 사회에 진입한 지 오래입니다.

농경시대에는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결혼 상대조차 부모님이 정해준 이와 하는 것이 불문율이었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머리모양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하는 지가 관습과 도덕, 종교와 신념에 따라 모두 결정되어 있으니, 개인이 선택의 뇌를 사용할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교육제도 역시 농경시대의 방식으로 세팅되어 있습니다. 주입된 대로 출력할 수 있으면 되는. 그러므로 의사, 판검사, 변리사 등 라이센스업의 변별력은 주입된 것을 얼마나 정확하고 (요즘은 빠르게) 출력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시험이란 다 그런 식이죠.

산업이 다양하고 기회가 무한하니 선택지가 너무도 많습니다. 복잡다단해진 사회현실에서 개인은 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택의 뇌는 써본 일이 없는데 갑자기 사막 한복판에 내던져진, 정글 속으로 내팽개쳐진 개인은 한 발짝도 어디로 디뎌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선택은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걸까요?

그건 아직까지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마법사는 가르쳐 줍니다.) 세상에 온갖 자기계발서와 동기부여에 관한 말과 글들이 넘쳐나지만, 모두 하나같이 하는 말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해라’ 입니다. 그렇게 퉁치면 그만입니까?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가슴 떨리는 일, 관심이 가는 일, 설레는 일을 하라고 하는데 그런 것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시간을 누적시켜 왔을 뿐입니다. 학교에서, 학원에서 누적한 경험 속에서 가슴 떨림과 설렘, 관심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시간을 누적하느라 쌓아 온 건 스트레스와 이를 방어하기 위해 장착한 무관심, 무심, 무념, 게으름 같은 것들뿐이죠.

그런데 성인이 되어 맞닥뜨린 세상은 갑자기 경우의 수에 대해 말하기 시작합니다. 네가 이걸 선택하면 이런 일이, 저런 일이. 저걸 선택하면 저런 일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도 해 봐야 알 수 있고 시도해 보기 전에는 예측하기 어렵다. 뭐 이러는 겁니다. 이건 하란 말입니까? 하지 말란 말입니까?

4년마다 펼쳐지는 월드컵 조별 예선의 ‘경우의 수’가 지겹다고, 우리는 언제까지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가 생각이 들지만, 그건 얼마나 명확합니까? 16강 진출, 8강 진출, 4강 진출, 우승까지 목표도 명확하고 경로도 분명합니다. 경우의 수는 조별리그까지고 그 뒤로는 모 아니면 도인 토너먼트가 시작되니 복잡성은 4팀 간의 조별 경쟁으로 제한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한 현실은 세상은 넓고 경쟁도 무한하다 입니다. 내가 생각한 것은 이미 누군가 하고 있고 내가 시작한 일은 곧 누군가 시작할 일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이루기 위하여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산처럼 많고, 그것들이 매 스테이지마다 가봐야 아는 불확실로, 해봐야 하는 운의 영역에 들어 있으니, 시간의 누적으로 무언가를 획득할 수 있던 시절은 차라리 천국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나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선택해 온 사람이라면 자신만의 맥락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 맥락의 일관성을 따른다면 선택은 쉽습니다. 어제 한 선택을 따라 오늘도, 내일도 선택을 이어가면 되는 일이니까요. 혹 첫 단추를 잘못 꿰었더라도 다시 다 풀고 처음부터 제대로 꿰어가면 됩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단추가 매달려 있고 구멍이 나 있으니까요. 불확실성의 현대사회를 살아가려면 ‘해 온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경우의 수는 ‘해 온 선택’ 앞에 단순해집니다. ‘해 온 선택’을 따르자면 이것은 이래서 제외, 저것은 저래서 채택할 수 있으니까요. 수많은 갈랫길이 있어도 내가 걸어 온 길은 한 길뿐이니 이어질 길도 역시 그 길 위에 있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걸어 온 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길이 틀린 길인지, 아닌 길인지 훈련된 선택 경험을 통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건 ‘해 온 선택’입니다. 그리고 축적된 선택은 앞길을 환히 비쳐 보여줍니다.

그래서 선택을 축적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무얼 먹을지, 무얼 입을지, 누구를 만날지 선택을 반복해 보는 일로 유년 시절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그걸 합니다. 그걸 하고 싶어 합니다. (내가 할래, 내가 할게, 내가 내가, 아이들이 주로 쓰는 말이죠) 그러나 아이들의 선택의지를 굴복시키는 건 시간의 누적에만 전문가인 어른들이고 부모들입니다. 물론 성인이라면 어른들을 원망하며 시간만 죽이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지 어른들이 대신 살아주는 게 아니잖아요? 이제라도 선택을 축적해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는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선택의 축적, 이것의 중요성은 축적에 있습니다. 잘못된 선택이어도 좋습니다. 축적해 가다 보면 잘잘못이 드러나고 방향성을 저절로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반복 축적해 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무얼 선택하는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축적하고 있느냐만 중요합니다. 정확도는 반복할수록 증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아마츄어일수록 원샷, 원킬에 목을 맵니다. 그리고 자꾸 점쟁이가 되려 합니다. (점쟁이만 찾아다닙니다.) 하지만 그런 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초심자의 행운은 얼마나 잔인한지)

시간의 누적에 익숙한 사람은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 불리한 3차전 극적인 역전승은 그들의 시나리오에 없으므로 경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기량 차이는 시간의 누적이라고 믿으니까요. 그러나 선택을 축적해 온 이들은 수많은 선택이 결국 운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운은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다는 진리 역시. 누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집중할까요? 승리의 여신은 누구의 손을 들어 줄까요?

공은 둥글고 지구도 둥급니다. 사람의 미래 역시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를 둥근 운명의 수레바퀴 위에 놓여 있으므로 할 수 있는 것은 선택뿐입니다.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 온 선택’을 가진 이들은 주체적인 반복 선택으로 선택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적된 선택은 수동적으로 시간만 누적시켜 온 이들은 열지 못할 기적의 문 앞으로 인도해 줍니다. 그리고 이제 남는 것은 반복해 온 그 ‘선택’입니다.

‘해 온 선택’에게 경우의 수는 하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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