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에 목마른 소녀, 건담에 목마른 소년
2011.02.07
장미에 목마른 소녀에게 건담을 선물하는 소년.
건담에 목마른 소녀에게 장미를 선물하는 소녀.
소년과 소녀는 언제까지나 목마를 거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사랑한다면
상대가 원하는 걸 줄 수 없다면
둘은 영원히 상처받고 목만 마르겠지.
딸아,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사랑의 언어를 가지고 태어난단다.
인정하는 말, 함께하는 시간, 봉사, 선물, 스킨십..
혹자는 이것을 위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전 세계의 인구가 70억 명이 있다면
실은 70억 개의 사랑의 언어가 존재하는 거야.
우리의 얼굴이 모두 다르듯 사랑의 언어도
개인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모두 조금씩 다르거든.
그러나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는 건,
나의 사랑의 언어뿐이야.
그것은 받는 즉시 좋거나 싫음을
너 스스로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몇몇 불쌍한 사람들은
자신의 사랑의 언어도 모르는 사람이 있단다.
그래서 남들의 사랑의 언어를 흉내 내며
만족 없는 삶을 지루하게 살아가고 있지.
무엇보다 자신의 사랑의 언어를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한 거야.
그래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언어를 알려 줄 수 있지 않겠니?
그것은 외국어를 가르치는 것만큼 힘든 일이기도 해.
생각해 보렴. 네가 언어를 처음 배우던 때를 말이야.
아무것도 알아들을 수 없고
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사랑의 언어도 마찬가지야.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너의 언어를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이 시작되어버린 거야.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뉴욕 시내 한복판에 떨어진 사람처럼 말이야.
우리는 그저 뉴욕이라는 도시에 매혹되어 그 땅에 내렸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들을 수도 없는 사람처럼
서로를 대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야.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프러포즈하는 거란다.
‘우리 사귀어 볼래?’
사귐이란 상대의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이지.
또한 나의 언어를 상대에게 가르쳐 주는 과정이야.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학생인 거야.
얼마나 열심히 해야겠니?
네가 외국어를 현지인처럼 능숙하게 하기 위해서
투자한 시간과 노력만큼,
사랑하는 상대의 언어를 배우는 데에도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 거야.
그것이 ‘사귐’이란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하니?
아마도 우리는 바벨탑 아래의 사람들처럼
자신의 언어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서로의 언어는 배울 생각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언어로만 말하고 있는 거지.
그래서 수도 없이 이런 한계에 부딪히는 거야.
‘아휴, 답답해 말이 통해야 같이 살지..’
그런 거야.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온 부부들조차도
서로의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면,
늘 담벼락과 대화하는 듯한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지.
운이 좋아서 사랑의 언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났다면
좀 더 소통하기 쉬울 수는 있겠다.
하지만 얼굴이 다른 것처럼 서로의 사랑의 언어가 다르니
우리는 어디에선가 담벼락을 만나는 답답함을 경험할 수밖에 없지.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조차도
억양과 뉘앙스, 사투리가 모두 다르니 말이야.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고 배우려는 자세가 없이는
진정 서로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는 거란다.
그것은 그저 매혹일 뿐이야.
호감과 관심이 있을 뿐이지
상대를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거지.
안타깝게도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도 쉽게 사용하는 듯하다.
그저 호감과 관심일 뿐인데
쉽게 사랑한다 말하고 기대하지.
상대와 나의 싱크로율이 100%일 거라는
환상에 젖어서 말이야.
그리고는 참혹하게 떨어지는 싱크로율을 목격하며
우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지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 않나 봐..’
여기에는 사실 무서운 이데올로기가 숨어있어.
음.. 세상의 많은 대중문화와 매스컴, 예술 속에
사랑의 언어에 대한 편견이 숨어 있거든.
마치 영어가 전 세계 공용어처럼 되면서
영어를 하지 않고는 세계를 돌아다니기 힘들게 된 것처럼,
수많은 사랑의 언어 중 몇 가지만
공식어로 채택된 듯한 인상을 사람들이 갖게 되는 거야.
앞에서 얘기한 다섯 가지 언어 중 굳이 꼽으라면
함께하는 시간, 선물, 봉사 등이 아닐까?
주로 여성들의 사랑의 언어에 속하는 이런 덕목들이
마치 모든 사랑의 언어를 대표하는 듯 생각하게 되었지.
그래서 어쩌면 남성들이 더 선호하는
인정하는 말, 스킨십 등은 저속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쯤으로 취급되기도 해.
그러다 보니 일부의 사랑의 언어만이
사랑의 전부인 것인 양 포장되고
남성들도 스스로를 그러한 언어 속에 가두게 되는
부작용을 낳게 되었지.
사실 사랑의 언어란 남성과 여성을 떠나서
개인의 취향과 성향에 따라 천차만별일 텐데 말이야.
우리는 사회가, 대중문화가 만들어준 편견에 휩싸여
상대도 원하지 않고 스스로도 원하지 않는
소통할 수 없는 언어로만 이야기해 오고 있지.
그러다 보니 만남은 곧 헤어짐을 전제로 하는 듯
많은 이별을 양산하지.
외국어 중도 포기자만 양산되는 거야.
토익, 토플로 따지면 점수는 올라가지 않고 줄곧 시험만 봐대거나
원서만 사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는 거지.
어떻게 해야겠니?
너는 먼저 자신의 사랑의 언어를 알아야 해.
또한 그 사랑의 언어가 문화적 관습과 일치하지 않아도
스스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해.
여자가 스킨십을 사랑의 언어로 가지고 태어난 것이 잘못이니?
남자가 함께하는 시간을 사랑의 언어로 하는 것이 능력이 없는 거니?
먼저 자신의 사랑의 언어를 정확하게 알고
교제를 시작하는 상대에게
자신의 언어를 정확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그러면 서로서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겠지.
우리가 어떻게 서로의 언어를 배워가야 할지 말이야.
아쉽겠지만 언어의 차이가 너무 커서
만남을 계속 이어갈 수 없는 상대도 있겠지.
그러면 우리는 쓸데없이 관계를 깊이 가져가다
종국에는 심하게 상처받고
헤어질 필요가 없는 거야.
서로가 아쉽지만 지나치게 부담이 되는 관계는
일단 멈출 수 있을 테니까
또는 서로에게 시간과 노력을 얼마나 들여야 할지에 대한
이해와 부담을 견주어 볼 수도 있을 거야.
이렇게 서로 학습하고자 하는 태도 없이 시작된 관계는
도중에 엉망이 되기 일쑤야.
말이 안 통할 테니 말이야.
장미에 목마른 소녀에게는 꽃 장수가 어울릴 거야.
건담에 목마른 소년에게는 문구 집 딸이 어울릴 수도 있지.
목마르지 않다면 소녀가 한두 번쯤 건담을 조립해 볼 수도 있겠지
목마르지 않다면 소년이 몇 번쯤은 장미를 키워볼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지 않니?
목마른 자에게는 물을 줘야 한다는 걸..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태도란다.
상대가 무엇에 목말라 하는지 알고자 하는 것 말이야.
그리고 내가 그것을 줄 수 있는지 돌아보는 것 말이야.
내가 목이 마를 때에는 어떻게 해야겠니?
장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소년에게
장미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러야 할까?
건담에는 흥미가 없는 소녀에게
건담을 같이 조립해달라고 졸라야 할까?
상대가 내가 목마른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에는
우리는 상대에게 그것을 강요해서는 안 돼.
그것은 상대로 하여금 떨어져 나가달라고
강요하는 꼴이나 마찬가지이거든.
우리는 그것을 다른 곳에서 채울 수 있어야 해.
사랑한다고 해서 상대가 내가 원하는 모든 사랑의 언어를
다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세상 어디에도 나의 사랑의 언어를 모두 만족시키는 사람은 없단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이상형이라고 부르는 거야.
세상에는 없고 이상에만 존재하는 형님이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나는 그 향기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해.
그리고도 목마르거든 우리는 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법, 다른 상대를 찾을 수 있어야 하지.
‘나는 너만 사랑해’라고 사탕 잔뜩 발라서 말해놓고
‘그러니 너는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 줘’라고
상대를 꼭꼭 옭매는 사랑방식은
서로를 힘들게만 할 뿐이야.
그것은 일종의 착취란다.
사랑을 빙자한 착취..
딸아,
먼저 너의 사랑의 언어가 무언지 찬찬히 살펴 보렴.
그리고 상대를 만나면 먼저 너의 언어를 자신 있게 말하는 거야.
상대가 듣고 이해하며 또 좋아하거든
상대의 언어는 무엇인지 말해달라고 물어야 해.
그리고 너도 상대의 언어를 배울 마음이 있는지
신중하게 생각하고 선택하면 되는 거란다.
만일 상대가 너의 언어에 불쾌해 하거나 불편해한다면
너의 욕심과 조바심으로 상대를 성급하게 다루지 말고,
조용히 물러나 나의 사랑의 모국어를 바꿀 수 있는지
신중하게 고려해 보도록 해.
만일 너무도 마음이 흐르고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할 수 있겠거든
너는 마음을 모질게 먹고 너의 언어를 바꿔가야 하는 거야.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는 데
언어를 바꾸는 일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야.
하지만 이런 관계가 지속되려면 상대도
너의 언어를 배우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
누구도 평생 만족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 테니 말이야.
이것도 저것도 자신 없거든
너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찾으렴.
그런 상대와 안정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난 뒤에는
새로운 사랑의 언어에 도전해 볼 수 있을 거야.
물론 사랑의 언어는 이성과의 관계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지.
부모와 자녀 간, 동성친구 간, 선생님과 제자 사이…
모든 관계 속에서 우리는
풍성한 사랑의 언어를 발견하고 또 배울 수 있지.
그러니 우리는 먼저 모국어를 확실히 구사할 수 있어야 해.
그 뒤에는 제1외국어와 제2외국어, 제3외국어..
나아가서는 5개국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지 않겠니?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건 모국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너의 사랑의 언어가 무언지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상대에게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
이것이 건강한 관계의 시작이야.
자신의 사랑의 언어를 감추거나 숨겨 놓은 채,
상대의 언어에만 나를 종속시켜서도 안되고
너의 사랑의 언어만 상대에게 강요해서도 안 돼.
인격적인 만남이라면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을 명확히 밝힐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사기를 전제로 한 만남이 아니라면 말이야.
‘나 사실은 장미를 받고 싶었어’
‘나 사실은 건담이 필요했었거든’
모든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뒤에
이런 말을 백 번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어쩌면 네가 미리 너의 언어를 말해 주었더라면
상대도 기쁜 마음으로 너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입을 꾸욱 닫은 채 종국에 가서 그렇게 얘기한다면
상대는 너무 당황스럽겠지.
노력해 볼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갖지 못했으니까 말이야.
자신의 언어를 미처 몰랐다면
그것도 당황스러운 일이지.
관계가 발전되면서 알게 된 자신의 언어가
상대와 맞지 않는다면
그제라도 새롭게 알게 된 자신의 언어를
상대에게 일러주어야 해.
상대를 존중한다면 언제 어느 때든
자신의 언어를 명확히 해야 하는 거야.
그것이 사랑하는 일이지.
그러니 딸아.
너의 사랑의 언어는 무엇이니?
장미니? 건담이니?
물어보렴. 네 마음이 어떤 언어를 말하는지
주의 깊게 들어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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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딸들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