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사이

2009.11.27 

 

딸아, 세상에는 세 가지 사랑이 있단다.
열정적인 사랑 에로스,
수용과 희생의 사랑 아가페,
그리고 시간과 추억의 사랑 필리아.

남자와 여자는 에로스로 만나 서로 사랑이 시작되지.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눈에서 콩깍지가 떨어져 나가면,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야.
이렇게 에로스, 아가페를 넘어
오랜 시간을 함께 한 두 사람 사이에는,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필리아의 사랑이 자리를 잡게 되는 거란다.

사람들은 흔히 에로스로 시작했다가
아가페의 국면에서 사랑을 다시 생각해 보기 마련이야.
과연 이 사람을 위해 내가 희생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 때문이지.
그래서 이쯤에 이별을 생각하거나
더 좋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는 거야.

아가페의 사랑을 하려면
여자는 남자의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남자는 여자의 아버지가 되어야 해.
연인, 남편, 아내로는
아가페의 높은 산을 넘을 수가 없단다.

네가 사랑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면
내가 이 사람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보렴.
그저 기대고 의지하고 사랑받기만을 원한다면
끝없이 남자들을 바꿔가며
에로스의 사랑만 하는 것이 더 나을 게다.
하지만 그 사람을 죽어도 포기할 수 없겠거든
그 죽을 것 같은 사랑을 꽉 움켜쥔 채로
아가페의 산을 넘어가 보렴.
넘어가는 도중 후회가 되고
남자를 죽여버리고 싶더라도,
포기하는 것은 현명치 않은 일이야.
내가 달려간 길만큼 다시 돌아가
다른 누군가와 새로 시작하는 일이
더욱 까마득해 보일 테니 말이다.

그렇게 아가페의 산을 내려오고 나면
어느새 상대를 온전히,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너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란다.
그때부턴 그저 가을 단풍산을 노닐듯이,
너의 동반자와 함께
여생의 추억을 쌓아가면 되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에로스는 연인의 사랑,
아가페는 부부의 사랑,
필리아는 동반자의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에로스로 시작해 아가페의 산을 거쳐
필리아의 땅에 정착해
시간과 추억을 공유하는 사랑이라 말하고 싶다.

온 세상을 녹여버릴 듯 불같은 에로스의 사랑도,
온돌바닥처럼 따뜻하고 가마솥 아궁이처럼 그윽한
필리아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오로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이생,
3차원 세계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의 사랑이란다.
神도, 천사도, 죽은 사람도 누릴 수 없는
오직 산사람만의 특권이지.
네가 파트너와 함께 차곡차곡 쌓아 올린 추억과 기억은,
어느 날 혜성같이 등장한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지.

친구 사이의 우정도 마찬가지이다.
필리아만 있는 관계를 우리는
그냥 아는 사이라고 부르지.
함께 한 시간이 오래였을지라도
상대의 흉, 허물을 모두 공유하고 있지 않으면,
진정한 친구라 부를 수 없는 거야.
그러니 아가페와 필로스로 이루어진 사이야말로
우정이라 부를 수 있겠다.
에로스로 시작하진 않았지만
코 흘리며 만난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들이야말로,
서로의 역사를 모두 공유하고 있는 산증인들이 아니겠니.

그래서 때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갈등은
에로스와 필리아의 갈등에서 촉발된단다.
여자는 끝없는 열정을 요구하고,
남자는 오랜 추억과 기억의 편안함을 갈망할 때,
두 사람은 아가페의 산에서 만나
장미의 전쟁을 감행하게 되는 거야.
싸울 필요는 없어.
그저 이 산을 오를지 말지를 결정하면 되는 것이지.

딸아, 에로스의 사랑 때문에 힘이 드니?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몸의 언어이다.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힘이 드니?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삶의 언어인 거야.
필리아의 사랑 때문에 힘이 드니?
그렇다면 아무 말도 필요가 없다.
필리아의 사랑은 더 이상 말이 필요가 없는 거야.
오로지 시간이 모든 것을 덮어 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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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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