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연애는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다가 도카이 씨와 다니무라 씨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어 보았습니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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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 : 제 친구들은 대부분 결혼을 했어요. 몇 번 그들의 집을 방문하기는 했지만 부럽다고 느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아이들은 아직 어릴 때는 나름대로 사랑스럽지만,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거의 예외 없이 어른들을 증오하고 경멸하게 되면서, 마치 보복이라도 하듯이 말썽을 일으키며 부모의 신경과 위장을 사정없이 들볶으니까요. 한편 부모들의 머릿속에는 아이를 명문학교에 보낼 생각뿐이라 노상 학교 성적에 안달복달 하고 그 책임을 서로에게 떠넘기느라 부부간에 말다툼도 끊이지 않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집에서는 변변히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제 방에 틀어박혀 반 친구들과 끝도 없이 채팅을 하거나 정체 모를 포르노 게임에 골몰하죠. 저런 아이들을 나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아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식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야.” 친구들은 입을 모아 말하지만 그런 허울좋은 소리는 결코 믿을 게 못 됩니다. 그들은 필시 자신들이 짊어진 무거운 짐을 저도 똑같이 지기를 바라는 것뿐이죠. 온 세상 인간들이 자신들과 똑같은 고통을 겪을 의미가 있다고 멋대로 믿고 있을 뿐입니다. 안타깝기는 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저와는 영 맞지 않지만, 결혼이라는 제도는 역시 그 나름대로 신성한 것이니까요.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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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무라 : 저는 젊은 나이에 결혼했고, 그 이후로 쭉 결혼생활을 유지해 왔지만, 어쩌다 보니 아이가 없기 때문에, 도카이 씨의 견해가 어느 정도 이해가 돼요. 거의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런 비참한 케이스만 있는 건 아니에요. 이 넓은 세상에는 자식과 부모가 시종 양호한 관계를 유지해나가는 아름답고 행복한 가정도 – 대략 축구 경기에서 해트트릭이 나오는 빈도로 – 존재하기도 해요. 하지만 내가 그런 소수의 행복한 부모 축에 낄 수 있겠는가 하면 절대 그럴 자신이 없어요.
멀린 :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요. 결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결국 행복의 문제가 아닌가요. 형식이 행복을 담보해 줄 수 없는 것처럼, 행복도 형식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죠.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신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간다면, 결혼을 하고 안 하고가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가꿔가는 일에 결혼이 필요하다면 할 수도 있고, 부담스럽다면 하지 않을 자유도 있죠. 그리고 주체적인 선택의 과정 속에서 이혼도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행복하지도 않은 데, 억지로 결혼생활을 유지해가는 것도 서로에게 못할 짓이죠. 억압은 깊어질수록 엉뚱한 데서 튀어나오거든요. 그때에는 대처가 불가능해져요. 충격을 그대로 감수해야 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 다들 그렇게 참고 견디기만 하면, 언젠가는 해트트릭이 나올 거라는 환상 속에 살아가는 것 같아요. 결국 문제는 자신이에요. 도카이 씨는 자신에게 만족하나요?
도카이 : 사생활에도 불만이 없어요. 친구도 많고, 몸도 아직 별 탈 없이 건강해요. 나름대로 내 생활을 즐기고 있지요. 하지만 나는 대체 무엇인가? 요즘 들어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것도 상당히 진지하게 말이죠. 내게서 성형외과 의사의 능력이나 경력을 걷어낸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쾌적한 생활환경을 잃는다면, 그리고 아무 설명도 없이 한낱 맨몸뚱이 인간으로 세상에 툭 내던져진다면, 그때 나는 대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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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무라 :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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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 : 어쩌면 얼마 전 나치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을 읽은 탓도 있을 겁니다. 전쟁 중 아우슈비츠에 보내진 내과의사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베를린에서 개업의로 일하던 유대인이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보내집니다. 그때까지 그는 가족의 사랑과 주위 사람들의 존경, 환자의 믿음 속에 근사한 저택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해왔어요. 개도 몇 마리 기르고, 첼로가 취미라 주말이면 친구들과 함께 슈베르트나 멘델스존의 실내악을 연주했죠. 평화롭고 풍요롭게 인생을 즐기며 살아온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바뀌고 생지옥 같은 장소에 갇힙니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풍족한 베를린 시민도, 존경받는 의사도 아니고 하물며 인간이라고 하기도 어려워요. 가족과 떨어져 들개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하고, 먹을 것도 제대로 제공받지 못합니다. 고명한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수용소 소장이 어디 쓸모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일단 가스실에 끌려가는 건 면했지만,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에요. 간수의 기분에 따라 어이없이 곤봉에 맞아 죽을 수도 있어요. 다른 가족들은 이미 살해됐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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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읽고 나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이 의사에게 닥친 끔찍한 운명은 장소와 시대만 바꾸면 그대로 내 운명이 될 수도 있다고. 만일 내가 어떤 이유로든-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의 생활에서 어느 날 갑자기 끌어내려져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고 그저 번호뿐인 존재로 전락한다면, 나는 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책을 덮자 깊은 고민에 빠져버렸어요. 성형외과 의사의 기술과 신용을 빼면 나는 아무 장점도 없고 아무 특기도 갖지 못한 그냥 쉰두 살 남자입니다. 아직 건강한 편이지만 체력은 젊은 시절보다 못해요. 거친 육체노동은 오래 버텨내지 못하겠죠. 내가 자신 있는 것이라고는 맛있는 피노누아를 고를 줄 안다거나, 단골 레스토랑이나 초밥집이나 바가 몇 군데 있다거나, 여자에게 선물할 세련된 액세서리를 잘 고른다거나, 피아노를 조금 칠 줄 안다거나, 고작해야 그런 정도예요.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그런 건 아무 쓸모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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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례지만 다니무라 씨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없습니까? 글 쓰는 능력을 빼버린다면 대체 나는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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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무라 : 나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닌 한낱 인간’이라는 출발점에서 맨몸뚱이나 다름없이 인생을 시작했어요. 우연한 계기로 글을 쓰기 시작해 다행히 그럭저럭 먹고 살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내가 아무 장점도 특기도 없는 일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위해 굳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같은 거창한 가정을 들고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멀린 : 저는 따져보니 3년, 5년에 한 번씩 인생을 제로베이스로 만들었던 것 같네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대략 주기가 그렇고, 어쩌다 보니 삶이 원점으로 회귀하는 터닝포인트들이 생겨나곤 했어요. 무일푼으로 시작한 결혼생활이 그렇고, 이후 상승세에 오를만하면 다시 원점으로 곤두박질치는 일들이 몇 년을 주기로 반복된 것 같습니다. 그때마다 매우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웠지만, 적어도 무언가에 기대어져 내 인생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지는 않아 좋았어요. 적어도 원점은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가장 많은 지점이니까요. 무언가와 연결되어있거나 종속되어있으면 선택의 폭이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정감이 주는 한계이죠. 처음에는 편안하다가 곧 갑갑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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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에 맞는 첫 제로베이스는 좀 더 특별한 것 같습니다. 정말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원점이 되었거든요. 안정된 직장도 퇴사하고, 하던 공부도 중단했으며, 가구와 가재도구 역시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는 제자의 게스트하우스에 모두 넘겨 버렸어요. 이제 가진 것이라고는 가방 2개와 여행경비로 쓰일 남은 보증금뿐입니다.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여행을 할 생각이에요. 집이 없으니 보관이 담보되지 않아 새로운 물건을 사고픈 마음도 들지 않는군요. 대신 갓 태어난 아이처럼 뭐든 할 수 있는 가능성만은 무궁무진하게 제 손에 들려 있어요.
도카이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심각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런 사고방식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래도 그에게는 금시초문인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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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 : 그렇군요. 그 편이 어쩌면 편한 인생일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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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무라 :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맨몸뚱이로 인생을 스타트한다는 건 그다지 편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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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 : 물론 맞는 말씀이에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인생을 시작한다는 건 당연히 무척 힘든 일이겠지요. 그런 면에서 나는 남들보다 큰 혜택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저 나름대로 라이프스타일이 몸에 배고, 웬만한 사회적 지위가 생기고 그런 다음에야 나 자신이라는 인간의 가치에 대해 깊은 의심을 품는다는 건 또 다른 의미에서 무척 힘든 일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인생이 완전히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젊을 때라면 그나마 변혁의 가능성이 있고 희망을 가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이 나이가 되면 과거의 무게가 짓누르는 힘이 너무 큽니다. 쉽사리 다시 시작할 수가 없어요.
멀린 : 라이프스타일이 몸에 배고, 웬만한 사회적 지위가 생기고.. 이건 매우 위험한 순간이에요. 익숙해진다는 건 그만큼 몸과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의미이니까요. 매달린 추처럼 일상이 우리를 옥죄게 되죠. 잘 흔들리지 않게 되지만 그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구명보트를 가진 것과는 달라요. 한 곳에 정착한 채로 온갖 풍랑을 다 맞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익숙한 라이프스타일과 사회적 지위가 인생의 예기치 않은 풍랑을 막아주진 않거든요. 저는 그럴 때마다 여행을 떠나요. 익숙한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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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에서 벗어나 매일매일 새로운 문화와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여행의 과정이 저의 잠들어 있던 모험심과 도전의 욕구를 자극시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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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벗어버리기 어려운 유혹은 사회적지위인 것 같기도 해요. 그건 성취에 대한 인정이고 또한 보상의 일종이라 도취되어버리기 쉽죠. 그런데 지위에 도취되어 버리면 자신을 그 지위까지 올려 주었던 초심을 잃기 마련이에요. 어느새 새로운 도전자들에게 치워버려야 할 퇴물 취급을 받는 순간이 다가오죠. 자신도 한때는 한심하게 여겼을 꼰대가 되어가는 거예요. 지위는 얻는 즉시 내려놓는 것이 가장 현명한 듯해요. 자신의 능력은 충분히 증명되었으니, 새로운 도전에 임하는 것이 우리가 매일같이 살아있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죠. 다만 피곤하죠. 다니무라 씨 말마따나 맨몸뚱이로 인생을 스타트하는 건 매번 두렵고 힘든 일이죠. 스트레스의 총량은 비슷해요. 지위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 스트레스를 감당하는 것이나 지위를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는 두려움이나 말이죠. 선택의 문제일 뿐이죠.
다니무라 : 나치 강제수용소에 대한 책을 계기로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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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 : 네, 책의 내용에 기묘할 만큼 개인적인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녀와의 앞일이 불투명한 것도 있어서 한동안 가벼운 중년 우울증 같은 상태에 빠졌어요. 나는 대체 무엇인가, 내내 그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출구가 찾아지질 않아요. 같은 자리를 빙빙 맴돌 뿐이죠. 지금까지 즐겁게 해왔던 일들이 이젠 하나같이 재미가 없어요. 운동할 기분도 옷을 살 기분도 나지 않고, 피아노 뚜껑을 여는 것조차 귀찮아요. 밥 먹을 생각도 들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떠오른 건 그녀 생각뿐 이에요. 클리닉에서 환자를 대할 때조차 그녀가 떠올라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를 뻔할 정도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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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무라 : 그 여자분과는 얼마나 자주 만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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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 : 상황에 따라 완전히 달라요. 남편의 스케쥴에 따라서. 그것도 나를 괴롭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남편이 장기출장을 갈 때는 며칠을 연달아 만나요. 아이는 친정에 맡기거나 베이비시터를 쓰죠. 하지만 남편이 국내에 있으면 몇 주일씩 못 보기도 해요. 그런 시기는 무척 힘듭니다. 이대로 그녀를 두 번 다시 못 보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 진부한 표현이라 죄송하지만, 몸이 둘로 갈라지는 것만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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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사랑에 빠진 상대는 열여섯 살 연하, 결혼한 여자였다. 그녀보다 두 살 많은 남편은 외국계 IT회사에 다니고 아이도 하나 있었다. 다섯 살 먹은 여자애다. 도카이가 그녀를 만난 지는 일 년 반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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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 : 나에게는 거의 항상 걸 프렌드가 여럿 있었어요. 어이없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많을 때는 네다섯 명까지 있었습니다. 누구 하나를 만나기 힘들 때는 다른 여자를 만났죠. 별문제 없이 그렇게 지내왔어요. 하지만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긴 뒤로는 다른 여자들에게선 신기할 만큼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합니다. 다른 여자를 만나도 내 머릿속 어딘가에는 항상 그녀의 모습이 있어요. 그걸 몰아낼 수가 없어요. 정말이지 중증입니다. 한가지 큰 문제는 그녀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그녀가 좋아진다는 겁니다. 일 년 반을 사귀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보다 휠씬 더 깊이 그녀에게 빠져 있어요. 이젠 그녀의 마음과 내 마음이 뭔가로 단단히 묶여버린 느낌이에요.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면 내 마음도 따라서 당겨집니다. 로프로 이어진 두 척의 보트처럼, 줄을 끊으려 해도 그걸 끊어낼 칼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어요. 이런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감정입니다. 그게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요. 이대로 점점 그리움이 깊어지면 나는 대체 어떻게 될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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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무라 :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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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 :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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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무라 : 어떻게 해야 할 지 구체적인 대책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본 바로는 지금 당신이 느끼는 감정은 비교적 정상적이고 이치에 맞아 보여요. 사랑한다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니겠어요? 자기 마음을 컨트롤할 수 없고, 그래서 불합리한 힘에 휘둘리는 기분이 드는 것. 즉, 당신은 딱히 일반상식에서 벗어나 이상한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한 여자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일 뿐.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 언제까지고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만일 못 만나게 된다면 그대로 세상이 끝나버릴 것만 같다. 그런 것은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죠. 이상할 것도 특이할 것도 없는 지극히 일반적인 인생의 한 컷 말이에요.
멀린 : 지극히 일반적이죠. 너무나도 보편화되어서 일상이 되어버린.. 그러나 원래는 부작용이었던 것들 말이죠.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일정한 슬픔 없이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까?
지금은 잃어버린 꿈,
호기심,
미래에 대한 희망,
언제부터 장래희망을 이야기하지 않게 된 걸까?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드라마 ‘연애시대’ Ep.9 동진
어른들의 연애란 하루하루를 견뎌내기 위한 아편 같은 게 아닐까요? 표현이 넘 심했나요? 그럼 진통제쯤으로 해둘까요?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그걸 대신할 만한 것 중에 연애만 한 것이 없죠.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사랑에 빠지죠. 정확히 말하면 그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꿈을 대신하는 사랑, 미래를 꿈꾸고, 가슴 설레는 감정을 대신 느껴보려고 대상화하는 것이라면 상대는 기분이 어떨까요? 도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매번 신기루 같을 수밖에 없어요. 상대 역시 그런 대상으로써 나를 이용하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도카이 씨의 감정이란 것, 지극히 일반적인 인생의 한 컷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병들어 있어요. 안정적인 생활이 주는 권태를 대신할, 마약 같은 것이죠. 지루한 삶을 잊게 해 주고 점점 꼰대 같아지는 자신에게서 청춘을 되살리고픈 어설픈 시도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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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미안.. 진짜 로맨스일 수도 있는데 제가 너무 폄하했나요? 하지만 도카이 씨의 설레임이 미래를 담보해 주지 않아서, 도카이 씨는 빠져들수록 더 절망적일 거예요. 그래서 병들었다고 말하는 거예요. 꿈이든 연애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없다면, 그것은 절망을 향해 달려갈 뿐이죠. 파괴적 사랑도 사랑이니, 감히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다만 이 설레임이 미래를 향해 있느냔 말이죠. 사랑도 꿈도 모두 주체적이어야 하죠. ‘아무것도 아닌 한낱 인간’ 그러나 맨몸뚱이여서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 주체적인 나의 결정이어야 해요. 익숙한 라이프스타일과 안정된 사회적 지위는 그대로 둔 채, 공허한 가슴만 달래려고 사랑에 빠져든다면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치명적이죠. 그 감정이 더더욱 도카이 씨를 파괴할 테니, 저는 감히 추천해 드릴 수가 없네요.
도카이 : 내가 지금 가장 두려운 건, 그리고 나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건, 내 안에 있는 일종의 분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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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무라 : 분노? 무엇에 대한 분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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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카이 : 나도 모르겠어요. 그녀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는 건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지 않을 때, 만날 수 없을 때, 내 안에서 그런 분노가 고조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게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 스스로도 잘 파악이 안 돼요.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을 만큼 격한 분노입니다. 방안에 있는 것을 손 닿는 대로 모조리 창 밖으로 내던지고 싶어져요. 의자든 텔레비젼이든 책이든 접시든 그림 액자든, 모든 것을 그게 길 가던 사람 머리에 떨어져서 누가 죽건 말건 알 바 아니다 싶은 거예요. 어처구니없는 얘기지만 그 순간에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아직까진 그런 분노를 컨트롤할 수 있어요. 실제로 행동에 옮기지는 않아요. 하지만 언젠가 더는 컨트롤할 수 없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 바람에 누군가를 정말로 다치게 할 수도 있어요. 나는 그게 너무나 두렵습니다. 그러느니 차라리 나 자신이 다치는 쪽을 택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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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스쿼시 라켓 케이스를 들고 택시에 올라 차 안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것이 마지막으로 본 도카이 의사의 모습이었다. 아직 늦더위가 남아있는 9월 말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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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카이 씨의 이후에 일에 대해서는 저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책을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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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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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소년 Ridiculous Boy
[1]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문학동네
[2]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문학동네, p117~p1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