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100] 사보나, 안 사보나
[CITY 100] Jun 19. 2023 l M.멀린

사보나에서 마법사는 흔들렸다. 50만원짜리 캐리어가 20만원에 염가 대방출을 해대고 있으니,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지갑을 만지작거리지 않을 수 없는 이곳은 이탈리아의 항구도시 사보나Savona 이다.
여행 중에는 유독 가방이 눈에 들어온다. 명품백이 아니라 여행자의 집, 캐리어, 백팩 말이다. 그건 참 눈에 밟히고 발길을 잡아끌고 자꾸 들어보게 한다. 집 없이 세상을 떠도는 여행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줄 캐리어는 움직이는 집이 아닌가. 그것에는 묵은 빨래와 세면도구, 여행지 여기저기서 구입한 진기한 아이템들, 고향의 기억나는 이들에게 전해줄 선물들. 기억과 추억들을 항공사 규정을 아슬아슬하게 넘겨가며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아놓았으니 여행자에게 캐리어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것이다.
마법사는 코로나가 끝나고 다시 여정을 시작하면서 적당한 크기의 단단한 캐리어를 하나 장만했다. 나름 고가의 그것은 해머로 이단옆차기를 날려도 부서지지 않을 만큼 탄탄해 보였다. 그건 누구의 눈에도 그랬나 보다. 이스탄불의 입국장, 외부인은 들어올 수도 없는 짐 찾는 곳에서 그것은 사라졌다. 아뿔싸! 이거 분실이구나. 일찍이 악명 높은 델타항공에서 수화물 분실을 경험한 적이 있기에 슬픈 예감이 정확히 밀려왔다. 내 눈에 좋은 건 남의 눈에도 좋은 거지. 사라질 만하다. 누가 혹해서 그냥 들고 가버릴 만하다. 이런 터키 새.. 로운 이름은 튀르키예란다. 잘도 튀었네.
사라진 집, 마음 한쪽이 쿵 내려앉고 그 안에 뭐가 들었지? 기억 속 이미지를 검색해 본다. 다행히 여정을 이어갈 꼭 필요한 것들은 들고 탄 기내 캐리어에 그대로 있다. 그러나 선물들.. 괜찮아, 여정은 계속되니까. 집은 다시 사면 그만이지. 선물은 못 주는 거고.
그런데 그것은 분실물 오피스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 뭐랄까? 누군가 버리고 간 걸 오피스 직원들이 가져다 놓은 듯 말이다. 그러면 그렇지. 마법사가 주문을 걸어 놓았거든. 단단히 잠긴 열쇠를 풀 재간이 없었던 게다. 짧은 순간 밀려온 유혹에 넘어간 어떤 새.. 누군가는 마법사의 캐리어를 슬며시 들고 가려다 단단히 잠긴 자물쇠를 건드려 보고는, 자신의 짐으로도 이미 무거운 양손이 마법사의 캐리어를 그냥 놓고 가라고 체념을 시킨 것이다. 그래, 여긴 짐 찾는 곳이지 남의 집 훔치는 곳이 아니야. 암스테르담의 그 유명한 차량털이범들도 못 가져갔단다. 뒷 유리창을 벽돌로 박살을 내놓고서도, 단단히 주문을 걸어놓은 마법사의 가방을 잔뜩 헤쳐놓기만 하고는 가져가지 못했단 말이다. 그러니 순간의 유혹쯤이야.
그렇다. 마법사의 가방 보는 안목은 참으로 높은 것이다.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만큼 유혹적이다. 그건 집이기 때문이다. 머리 둘 곳 없는 마법사의 물건들을 모두 담고 있는 이 땅의 유일한 ‘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법사는 사보나에서 집 한 채를 더 구입했다. 이제 양손에 캐리어를 두 개나 끌고 가야 할 말 그대로 ‘인간 캐리어’ 신세가 되기로 자처한 것이다. 집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이고 자는 집.
두 개의 집은 버겁지만, 구름성이 좋아 이동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순간 이것은 말 그대로 ‘충동구매’가 아닌가 싶어 번민했으나 집이 아닌가! 마음에 드는 그것을 사기 위해 온 세상 사람들이 고군분투하는 그것. 마법사는 그것을 마음먹으면 언제든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들어가 잘 수는 없어도, 이고 지고 들고 메고 갈 수 있는 그것. 움직이는 나의 집. 그것은 여행자만의 특권이 아닌가. 집을 사는 일에 충동이란 있을 수 없지.
또한 사보나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작은 항구도시일 거라 무시하며 크루즈에서 내릴 생각도 없었는데, 산책이나 할까 하고 내린 이곳 사보나에는 마법사의 물욕을 유혹하는 싸고 아름다운 취향 저격의 물건들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리고 그 초입에 위치한 가방 가게는 마치 사보나 시의 전폭적인 지원과 지령이라도 받은 듯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캐리어와 백팩을 팔고 있었다. 담으라고, 여기 사보나의 좋은 것들을 사서 담으라고. 사보나 안 사보나 얇은 여행자의 지갑 거기서 거기니, 일단 집 하나는 새로 장만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담아야 할 기억과 추억은 물건에 새겨 넣어야 하니 근사한 집 하나 더 산다고 죽기야 하겠냐고 말이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머니 말이다.

사보나에서는 심장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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