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멀린의 동방견문록
다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하와이입니다. 이번 여행은 미래로 가는 여행, 그래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해가 뜨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여행은 미래로 가는 여행이 되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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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분계선을 넘자마자 처음 만나는 도시는 하와이입니다. 하와이는 우리나라보다 19시간이 느리고 날짜 상으로는 하루가 느리지만 같은 일을 동시에 경험해도 하루 먼저 경험한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래서 또한 미래로 가는 여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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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로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시애틀-밴쿠버-토론토-뉴욕 이런 순으로 여행을 할 생각입니다. 북미대륙을 횡단하는 셈인데, 2차로 런던-암스테르담(스칸디나비아3국)-베를린-스페인-그리스-터키 정도까지 돌아볼 계획입니다. 내년 봄쯤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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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는 서양인의 입장에서 위의 나라들을 여행하고,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혔다는 <동방견문록>을 남겼다는데, 저는 동양인의 시각에서, 아니 한국인 미래학도의 시각에서 서양을, 아니 우리를 기준으로 ‘동방’을 디벼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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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에서 1년 정도 순차적으로 이어질 본 여행은 일종의 순례 여행이기도 합니다. 인생의 절반쯤 산 청춘도 어른도 아닌, 어정쩡한 남자 사람이 이 별에서 더 살아 볼 가치가 있는지, 이 별은 내게 무엇을 전해주려는지, 이 별은 내게 무얼 원하는지, 가늠해 보기 위해, 훌쩍, 이 별의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녀 보아야겠다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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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마치고 나면 남은 삶이 알아지리라 기대합니다. 어디서 무얼 하고, 무얼 남길지.. 그때에는 지난 40년의 삶처럼, 타의에 의한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더더욱 당당하고 뚜렷하게 ‘나’를 살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하며, ‘나’자신과의 깊은 대화를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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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일단 시작해 버렸으니 현재에만 집중해 볼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남자 혼자 하와이라니.. 시작부터 비참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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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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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뿔사, 2차 여행을 갔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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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을 미룬 동안 글을 열어 보지 않고 있었는데.. 3년여 만에 다시 열어본 이 글에서 2차 여행에 대한 기록을 확인하고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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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봄’.. 그 ‘내년 봄’에 고독한 여행에 지친 저는 2차 여행을 가야 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 완연한 ‘내년 봄’의 말미에 ‘괴생명체’의 습격을 받고는 모든 것을 잃은 채로 근 1년여간을(아마도 2차 여행기간이었을) 집 없이 떠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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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런던, 우주의 표지는 떠나야 한다고 여러 차례 강력한 메시지를 주었건만, 지친 영혼을 추스르지 못한 저는 넋을 놓은 채 방심하다 맨몸으로 집 없이 떠돌았습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헤매다 다음해 6월, 브렉시트가 결정되던 그 시점에 우연인지, 운명인지 런던을 다녀오고 난 뒤에야 마법의 저주에서 풀려나 근 1년여 만에 편안한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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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모든 것을 잃었으니 여행 비용 핑계를 댈 수는 없겠군요. 어차피 집 없이 떠돌 거였으면 여행이 낫지요. ‘5월에 런던’ 그건 분명 2차 여행에 대한 우주의 싸인이었을 텐데.. 아무리 마법사라지만 너무 가혹합니다. 직관을 무시한 대가가 정말 혹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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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만큼.. 2차 여행이 우주의 예정대로 진행되었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지금은, 가보지 못한 다른 평행우주에서 그 2차 여행은 어떤 결과를 나의 삶에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삶에 가져왔을까요?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얻어야 할 것을 얻지 못하게도 하지만 피해야 할 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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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에 나오는 고난 끝판왕 ‘욥’의 환란에 비유할 만큼 혹독했던 그 시간들을 돌아보며, 방심하고 잊고 있던 2차 여행에 관한 본문을 발견하고는 아찔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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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뱉었으면 하고 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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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15일
*이 여정은 2023년 이단적 순례를 마친 뒤에야 끝이 났다. 종착지는 튀르키예 샨르우르파의 욥의 우물이었다. 10년이 걸렸다. 마크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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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새끼소년 Ridiculous Bo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