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마법사만 생고생하는 이야기
[MOVIE 100] Dec 20, 2021 l M.멀린

함께 본 아이의 관람평은 단순명료했다.
‘마법사만 생고생하는 이야기.’
마법사는 속으로 그 말에 덧붙였다.
‘사회초년생의 오지랖 덕분에’
‘덕분에’라는 말을 붙이는 것이 옳다. 마법사의 생고생이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벤져스를 총동원하지 않더라도 진작에 우주의 경우의 수를 모두 가늠해 보았더라면 쉽게 끝났을 엔드게임이었지만, 그렇다면 역사는 다 뭣에 쓰겠는가, 드라마, 영화는 왜 보는가. 결말만 보면 되지. 그건 재미없잖아.
그 재미 때문에 마법사는 그랜드캐년에 거꾸로 매달려 있어야 했지만. 그쯤은 엔드게임에 함께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퉁칠 수 있다니 역시 마법사는 의리의 사나이.
그러나 사회초년생 피터 파커의 이상적인 직관은 너무도 폭력적이다. 아니 악당을 감화시키거나 정정당당한 대결을 통해 굴복시키고 참회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강제로 힘을 빼앗아 버리다니. 게다가 입장의 차이일 뿐인 하나의 힘과 다른 극단의 힘을 칩 하나로 무력화시키면 그건 사람인가, 기계인가.
이런 존재론적 함의를 다루기에는 ‘마블이자나, 그냥 재미로 보는 거지 뭐 그리 심각해.’ 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고생하는 마법사를 보는 게 남 일 같지 않으니 그 정도의 개연성 쯤은 장착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너무한 건 아니지 않은가.
평행우주가 평행인 것은 만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평행이 깨지고 그것이 뒤섞이면 본 것을 또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또 보고 또 봐야 한다. 그 데쟈뷔는 뭔가 있어 보이는 현상 같지만 우주의 레코드판이 오류를 일으켜 같은 구간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니 좋은 일이 아니다.
각자의 우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해가는 것이야. 그리고 언젠가 그것들이 모두 통합되는 블랙홀을 거쳐 새로운 창조와 탄생으로 거듭나면 우리는 우주의 진화에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것일 테다. 그런데 뭘 하겠다고 그 평행을 깨고 들어가 운명을 거스르고, 강제참회의 폭력을 저지르며 남의 우주를 훼방 놓을 텐가. 잊혀지면 그만인데.
그걸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피터 파커는 정작 온 우주에 자신을 기억하는 존재들을 다 불러들여 버렸다. 그냥 잊혀지면 모두가 행복한데. 모두가 덜 혼란스러웠을 텐데. 앗, 이쯤 쓰고 보니 내용이 심오해지네. 마블 무시하면 안 될 듯.
어쨌거나 누군가를 돕는 일은 모두를 돕는 일이라고, 죽어가던 큰엄마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그리고 그런 마음이 우주의 평행과 균형을 깨뜨려가면서도 지속되어야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불가한 지점에서는 잊혀지는 것조차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슈퍼 히어로가 갖춰야 할 태도이자 마음가짐이다.
세계가 우주가 영원히 평행해야 한다면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가 모두 결합되고 융합되고 폭발하여 산산이 흩어졌다가 다시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한다. 그것은 재회이고 영원한 만남이다.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다른 평행 우주의 나를 만나는 일은 감격스럽고 신비롭지만 잠시 잠깐이어야 하고. 그런 깨달음도, 용기도, 도발도 없이 잊혀져야 하는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 히어로는 고독과 외로움의 감옥에 갇혀 어느 날 빌런이 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잘 견디면 물론 마법사가 될 수도 있지만)
마법사의 아이는 마법사만 생고생한다고 안타까워하지만, 걱정 말렴 아이야. 그러라고 마법사가 있는 거란다. 우주가 마법사를 보낸 거란다. 다만 마법사가 마법을 걸기 시작했다면 주문은 간결하게, 머뭇대지 말고 확실하게.
P.S.
대학에 떨어진 아이와 마법사가 대학에 떨어진 동갑내기 히어로와 그의 소원을 들어주는 마법사의 영화를 함께 보았다. 스크린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우주가 나란히 흐르는데 다만, 영화 속 히어로는 다시 검정고시부터 봐야 하고 영화 밖 아이는 검정고시는 패스했으니 역시 같으면서도 다른 평행우주. 게다가 오지랖 따위는 질색인 ISTJ 아이는 마법사 귀찮게 할 일이 없으니, 아 그러고 보니 그랜드캐년에서 마법사 혼자 두고 언니오빠들 쫓아다니느라 마법사를 곤혹스럽게 한 건 아이나 히어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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