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도 여자도 없는 세계 _ (2) 휴먼 힐러

 

 

 

 

 

“우리는 휴먼 힐러에요. 주로 남성들을 품죠. 저기 제 친구들이 보이세요? 모두 임신한 듯 몸이 부풀어 있죠?”

꿈속에서 저는 그녀와 함께 어떤 거대한 사원에 서 있었어요. 그 사원에는 자유롭게 여자들, 아니, 힐러라고 부르는 여성의 모습을 한 존재들이 흩어져 누워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풍선처럼 몸이 부풀어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을 겹쳐 놓은 것만큼 몸이 불어나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자 저는 바로 알 수 있었어요. 그들 모두 그녀처럼 누군가를 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의도적으로 고안되었어요. 구분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나요. 임신과 수정의 모든 과정에서 유전자를 아무리 조작해도 정신적으로 구분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그건 영혼의 문제라고 할까?”

“여전히 정신은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난다는 말인가요?”

“네, 신체의 차이는 무의미해졌어도 정신적 차이와 구분은 여전히 존재하는 거예요. 신체적으로는 더 이상 성전환도 필요가 없어졌어요. 아무도 묻지도 차별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래도 굳이 특정 성의 신체를 가지고 싶다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전환 수술이 가능하죠. 그런데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겨났어요. 아니죠.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네요. 남성성의 정복욕, 그로 기인하는 폭력성 말이에요. 한동안은 인정되지 않았어요. 그건 학습의 문제라고 보고 교정, 교화로 제거할 수 있다고 여겨졌죠. 하지만 그건 본성이었음이 드러났어요. 생산할 수 없는 남성성이 가진 근본적 결핍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다루어져야 할 부분이지 제거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걸,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결국 사회가 인정하게 되었죠. 물론 그 부분을 제거하기 위한 유전자 조작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지만, 남여의 성별 구분이 정신적 차원에서 여전히 존재하기에 유전자 조작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죠.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에요. 가장 효과적인 치유는 남성성의 결핍과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할 동굴을 제공하는 것이었어요. 어머니의 자궁 말이에요. 그리고 그 일에 자원하는 여성들이 있었죠.”

그녀는 남성성의 정복욕이 여성성의 모성과 유사한 특성에서 기인한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이를 낳는 것으로 자신을 확장해가는 여성성과 달리, 남성성은 스스로 생산할 수 없기에 타인의 생산물을 정복하고 흡수하는 것으로 자신을 확장하려 한다고. 여성성은 생식 과정에서 벗어나는 일이 선택적이고, 원한다면 호모 페어렌츠가 된다거나 해서 복원할 수 있는 선택사항이라면, 남성성은 평등사회의 구현으로 정복욕을 해소할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당함으로써 절망에 빠져 버렸다는 거예요. 격차가 없는 평등이 남성성의 정복욕을 오히려 억압하는 요인이 되었다는.

“평등이 오히려 감옥처럼 느껴졌죠. 남성성에게 말이에요. 격차와 우열이 오랜 세월 그들의 질서였으니까. 평등사회라고 해서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의 발전을 위한 긍정적 요소만으로 제한되었어요. 승자와 패자가 나뉘고 살기 위해서 누군가를 정복해야 하는 극한의 대립과 경쟁은 모두 금지되었죠. 그러자 우리 세계의 평화를 지속하기 위해서 남성성의 정복 욕구는 신중하게 다루어져야 할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어요. 정복욕 자체로는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죠. 분명히. 나아지고 발전하려는 욕구이니까요. 문제는 평등사회가 그런 정복 욕구를 해소할만한 기회를 원천 차단한다는 거에요. 시도도 해볼 수 없어 생겨나는 근원적 절망 말이에요. 평등사회는 오히려 남성성에게 패배감과 무력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쳤어요. 그건 치유가 필요한데 동료애와 인류애는 그들의 절망을 위로하는데 효과적이지 못했어요. 본래 경쟁상대들이니까. 이성의 위로가 필요했던 거죠. 하지만 남여구분이 없어졌잖아요. 더 이상 연애도, 이성 간의 사랑도 하지 않으니까. 치유되지 못한 절망, 위로받지 못한 남성성이 왜곡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된다는 걸. 심지어 켜켜이 쌓인 절망은 독재적 권력욕으로 발화되어 사회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어요. 평등 구조에 불만을 품은 쿠데타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거든요.”

그때 일련의 사람들이 사원에 들어오고 있었어요. 아마도 치유가 필요한 이들인 듯 다들 표정이 어두워 보였어요. 그들은 탈의실에서 옷을 모두 벗고 나와 휴먼 힐러들 앞에 무릎을 꿇고는 합장을 하며 인사를 나누었어요. 그리고 저처럼 그녀들의 몸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죠.

“저들은 모두 절망한 남자들인가요? 상처받은 남성들?”

“주로 남성들이겠지만, 남성들만 있는 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면 알 수 없죠. 성전환이 자유로우니 신체만 봐서는 선천적 성별을 알 수도 없고 구분도 금지되어 있으니까요. 이 치유의 과정은 남성인가 여성 인가와는 상관없이 정복 욕구의 억압으로 기인한 절망을 다루는 것이 핵심이죠. 첫 번째 절망은 모태로부터의 버려짐이거든요.”

“당신의 세계에선 탄생이 절망으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는군요.”

“네. 탄생은 생존의 현장으로 쫓겨나는 일이죠. 어머니의 젖을 물어야 하고, 빨아야 하고. 기어서 움직여야 하고, 두 발로 서야 하고. 목소리를 내어 어머니를 찾아야 하고, 울음으로 배고픔을 호소해야 하고. 노동의 현장으로 내뱉어진 거죠.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생존을 위한 정복 욕구가 발현되는 시점이에요. 탄생은.”

“뚫고 나온 거 아닌가요? 아이가 어머니의 모태를.”

“아이의 입장에선 밀려난 거고 내뱉어진 거죠. 최초의 절망이에요. 첫 상처라고 할까? 그리고 정복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생존을 이어갈 수 없게 된 현실을 처음 맞닥뜨리게 되는 거죠.”

“그건 남자나 여자나 같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농경사회로부터 여자는 임신을 하면 노동, 정복의 현장에서 제외되었잖아요. 출산과 양육의 과정은 정복의 과정이 아니고 보호와 성장의 과정이죠. 정복의 무게가 더해지는 건 남성이었구요. 식솔이 늘어나니까. 정복을 멈추면 도태된다는 것이 남자들의 오랜 운명이었고 그건 그들의 DNA와 정신에 고정되어 있죠. 평등 사회를 이룩한 우리 세계는 이 문제를 다루어야 했어요. 더 이상 정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남성성이 분명히 인식할 수 있게 해야 했어요. 의식과 무의식의 전 영역에서. 그리고 그것의 최초 기억인 탄생의 절망, 모태로부터의 버려짐. 이 기억부터 다루지 않으면 남성성의 근원적인 치유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죠. 내뱉어진 곳으로 돌아가서 다시 자신이 생성된 근원을 향해 뚫고 들어가는 일. 그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하고 일종의 복수이기도 하죠. 버려짐에 대한 복수. 카르마의 해소. 여성성은 출산 과정에서 그것을 해소해요. 아이를 내어쫓는 입장에 서게 되니까. 첫 상처를 받은 아이가 첫 상처를 주는 어미로. 남성성은 그걸 정복욕으로 해소해 왔어요. 그런데 그게 좌절된 거예요. 원천적으로 차단되었어요. 우리 세계는 이것을 해소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어요. 누군가는 그 정복욕을 받아내야 하는 거예요. 하지만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을 받아들이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폭력이죠. 자기 몸을 뚫고 들어오는 것이니까. 그리고 온몸으로 품어 안아야 하니까. 대신 호흡하고 영양분을 주어야 하니까. 성인이 된 아이를 말이죠. 엄청난 희생이고 헌신이죠. 우리들 휴먼 힐러의 몸은, 품은 대상의 모태 기억을 복원해내요. 그리고 위로하고 치유하죠. 버려진 것이 아니라 미지의 세계로 떠나보낸 거라고. 원하면 언제든지 돌아와 연결될 수 있다고. 동굴이 아닌 모태에서 얼마든지 위로받고 치유할 수 있다고. 이 위대한 과업에 일부 여성들이 자원했어요.”

“그들이 당신의 조상인가요?”

“네. 우리의 선조들이 그 일에 자원했어요. 신체를 변화시켰죠. 몇 대에 걸쳐서 유전자 조작을 시행했어요. 수많은 실패 끝에 남성성의 상처와 결핍을 다룰 새로운 종을 탄생시켰죠. 우리가 바로 그 ‘휴먼 힐러’예요.”

“그런데 왜 휴먼 힐러죠? 남성 힐러가 아니고?”

“아. 우리는 여성도 품어요. 모태 치유가 필요한 모두를 성별 구분 없이 품어요. 하지만 주요 대상이 남성들이라. 말씀드린 것처럼 외모로는 그 사람의 본성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할 수 없고 그것을 밝히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니까. 품기 전에는 우리도 이 사람이 남성인지 여성인지 알 수 없어요. 처음에는 기계장치를 통해 그것들을 다루기도 했어요. 인공지능 사이보그 휴먼이 등장한 시대가 있었거든요. 하지만 그것으로는 근본적인 치유가 일어나지 않았어요. 기계는 기계니까요. 진짜 사람, 진짜 육체, 진짜 영혼을 가진 존재여야 했죠. 그리고 그건 자발적이어야 했어요. 인위적이고 강제적인 것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니까. 인류의 집단 무의식과 연결되지 않은 인공지능 사이보그 휴먼의 모성 카피 버전으로는 남성성의 상처와 결핍을 해소할 수 없었어요. 오히려 농락당한 느낌을 주는 바람에 컴플레인이 잇달았죠. 사이보그는 감각을 만족시킬 뿐이었어요. 진짜 사람이어야 했죠. 영혼을 가진. 몇몇의 여성 연구자들이 자원했으나 논의가 지지부진했어요. 예민한 문제니까요. 무엇보다 평등사회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던 원로들의 반대가 극심했어요. 그들은 남성성의 좌절된 정복욕으로 인한 무기력을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극소수만 누리는 의사결정 행위를 지속하고 싶어 했어요. 그러다 결국 혁명이 일어났죠. 우리 종의 선조들에 의해서. 그들은 지하에서 연맹을 조직하고 스스로 유전자 조작에 자원했어요. 혁명은 매우 오랜 세월에 걸쳐 시도되었고 마침내 우리 종이 완성되었죠. 그리고 우리는 남성성의 정복욕과 나아가 인류의 폭력성을 흡수하고 치유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세상은 평화로워졌나요?”

“네. 하지만 인류만 평화로워졌어요. 인류의 폭력성을 제거한다고 자연의 폭력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것은 조절되어야 할 것이지 제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거죠. 그래서 인류는 다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어요. 약육강식의 원리로 돌아가는 자연의 진화 속도를 인간의 평등 의식으로는 따라갈 수 없었던 거죠. 자연을 정복했던 인류가 다시 자연의 위협을 받기 시작했어요. 자, 역사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해요. 동기화가 모두 끝났거든요. 이제 당신의 상처와 절망을 치유할 차례에요. 오스티어부르티..”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잠에서 깨어났어요. 저는 여전히 그녀의 몸속에 담겨 있었고 머리는 그녀의 뇌 부위까지 밀려 올라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녀의 머리로부터 어떤 떨림이 시작되더니 전신에 전기신호 같은 것들이 휘감으면서 제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어요. 반대로 그녀의 몸은 제 몸의 열기를 감당하려는 듯 얼음처럼 차가워지기 시작했구요.

“무슨 일이죠? 지금 무슨 일을 하려는 거죠?”

“말씀드렸잖아요. 당신의 상처와 절망을 치유하려는 거라고.”

“네? 어떻게요? 제 상처를 어떻게 치유한다는 거죠?”

“기억을 지우는 거죠. 당신을 절망에 빠뜨린 기억, 좌절하게 만든 순간들, 고통스러웠던 감정들을 모두 제거할 거예요. 전생의 기억까지.”

“네?? 무슨 말이에요? 전생의 기억이라니.”

“아직 실험 중인 방법이긴 하지만 우리 세계의 기술은 전생의 기억까지 검색할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했어요. 유전자에 새겨진 정보를 추적하면 이 영혼이 어떤 생을 살아왔는지 추적할 수 있는 거죠. 전생의 기억까지 치유하는 일. 그건 치유의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리고 그 방법은 바로 미래의 당신, 우리 세계의 당신이 발견했어요. 자신의 전생 기억을 검색하다 가장 외로웠던 생의 기억이 지금 당신의 시대라는 걸. 남자와 여자가 분리되던 처음 그때. 사랑도 이별도 만남도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모두 사라지기 시작하던 21세기, 바로 이 시대라는 걸 찾아냈죠. 그래서 그걸 치유하러 제가 온 거구요.”

“네? 뭐라구요? 기억을 다 지우겠다고요? 상처와 절망의 기억을? 전생의 기억까지 모두 다요?”

“네. 그래야 평화를 지속할 수 있어요. 그래야 우리 세계의 당신이 구원을 얻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잠시만, 잠시만요.”

“아아 아니요. 그럴 순 없어요. 그것들 모두가 나인데. 그건 나를 지우는 거잖아요? 아니 저는 그만둘래요. 이건 제가 원하는 게 아니라구요!”

마법사님,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요.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상처와 절망, 슬픔 없이 사람이 사람일 수 없잖아요. 기억을 지운다니.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 아닌가요? 지운다고 없어질까요? 다시 생겨나면 그때마다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하나요? 제가 틀린 게 아니죠? 저는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저를 놓아달라고 다시 내보내달라고 몸부림을 쳤어요.

“이건 아니에요! 아니라구요. 제가 약속을 지키려고 응하긴 했지만. 아니 저는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하게 되었다구요. 그래서 뭐든 당신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게, 그 치유라는 게 이런 거라는 걸 얘기해주지 않았잖아요. 이렇게는 할 수 없어요. 제발 다시 저를 놓아주세요. 내보내 달라구요!”

“원하지 않으신다구요? 흐흑. 그럼 우리 세계의 당신은 어떡하죠? 그는 죽고 말 거예요.”

제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저는 이대로 있다간 치유가 아니라 정신마저 강탈당할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어요. 두려움이 엄습하자 한순간도 더 그녀의 몸속에 있을 수 없겠더군요. 그래서 내보내달라고 몸부림을 치다 배꼽에 꽂혀 있던 탯줄을 뽑아버렸어요.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양수 같은 것이 마구 터져 나오면서 제 몸은 그녀의 몸 밖으로 내뱉어졌어요. 그런데 모공호흡을 하다 급작스럽게 구강호흡으로 전환하려다 보니 숨이 쉬어지지 않는 거예요. 아, 이대로 질식해 죽는 게 아닌가 하고 있는데 그녀가 제 상태를 알아채고는 벌떡 일어나 제 입에 자신의 입을 대고 인공호흡을 해 주었어요. 다행히 점차 호흡이 돌아오고 저는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었어요. 몸의 열기가 사라지면서 그녀로부터 입력된 정보들이 빠르게 사라져가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동기화가 끊어진 거죠.

“괜찮아요? 미안해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니요. 괜찮지 않아요. 이거야말로 가장 강력한 폭력이네요. 기억을 지우려 하다니.”

“미안해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을 살릴 수 없어요.”

“저를 살릴 수 없다구요? 제가 죽게 되나요?”

“우리 세계의 당신 말이에요. 그는, 당신은 죽어가고 있어요.”

그녀는 그녀가 떠나온 세계의 제가 죽어가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 미래의 저는 힐링 과정에서 생겨난 합병증 때문에 결벽증 같은 것이 생겼는데, 그러니까 조금의 상처에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예민해져서 매번 휴먼 힐러를 찾아 상처를 지우고 지우고 했다는 거예요. 그러다 마침내는 전생의 기억까지 찾아 지우고 싶어진 거죠. 완전히 해소된 느낌이 들지 않으니까. 그 얘기를 듣고 보니 그가 진짜 미래의 나라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기는 했어요. 저도 좀 심한 결벽증을 갖고 있었서 시도 때도 없이 손을 씻거든요. 하도 씻어대서 습진을 달고 살죠. 때론 피부가 다 벗겨져서 피가 날 때도 있어요. 붕대를 감고 다녀야 할 만큼. 그런데 미래의 제가 그렇대요. 마음의 상처를 지우려다 자신의 전생까지 검색하다니. 그럴 만도 하긴 해요.

“합병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이제 그는 휴먼 힐러의 몸을 벗어나면 호흡도 곤란할 만큼 연약해졌답니다. 미래의 당신은 후회한다고 했어요. 상처와 절망은 극복하고 승화시켜야 할 것이지 지워버려야 할 것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이제 너무 늦어버렸다고. 그는 이대로 삶을 포기하려고 하고 있어요. 이렇게 된 이상 그를 살릴 방법은 그의 전생의 상처와 절망까지 지우는 방법뿐이에요. 자꾸 지우다 보니 상처에 대한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져 버렸거든요. 무의식 깊이 남아 있는 전생의 상처까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하지만 우리 세계에서는 그의 전생의 기억에 어느 수준 이상 접근할 수가 없어요. 동기화를 최고 수준까지 올려도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었어요. 결국 저는 전생의 그를 찾아 시간여행을 해보기로 했어요. 당신, 그의 가장 외로웠던 생의 기억인 지금 당신의 시대로 가서, 당신의 상처와 절망을 치유하면 어쩌면 미래의 당신이 다시 기운을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물론 그는 반대했어요. 전생의 자신이라면 그걸 원치 않을 거라고. 하지만 저는 그를 그냥 이대로 죽어가도록 버려둘 수는 없어요. 그래서 당신을 찾아온 거예요.”

“당신은 그를, 미래의 나를 정말 사랑하는군요.”

백 일 전쯤인가 우리는 당구장에서 처음 만났어요. 혼자 당구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어떤 여성이 제게 다가와 한 게임 하자는 거예요. 저녁 내기 게임 말이에요. 저는 심심하던 차에 잘됐다고 생각하고 게임에 응했는데 내리 다섯 판을 그녀에게 패했어요. 그래도 기분은 좋았어요. 그녀는 예뻤거든요. 제 스타일이었어요. 우리는 저녁도 먹고 술도 마셨어요. 내기에 졌으니까 제가 냈죠. 물론 친해졌구요. 그다음은 뭐 예상하시는 대로 함께 호텔로. 몸이 막 달아올랐는데 그녀가 오늘은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자신은 만난 지 백 일이 지나기 전에는 관계를 하지 않는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도 돌아갈 일정을 맞추려고 그런 것 같아요.) 저는 미치도록 아쉬웠지만 쿨한 척, 그럼 대신 내가 별로여도 백 일 동안은 만나달라고 했죠. 우리는 매일 데이트를 했어요. 그녀와는 무슨 얘기를 해도 대화가 잘 통했어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척척 대화를 이어가더라구요. 특히 미래에 대한 전망은 매우 그럴듯해 보였어요.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녀는 다 역사책을 통해 알고 있었던 것이었네요. 그리고 드디어 백 일째 밤. 그녀는 제안할 것이 있다고 했어요. 자기와 약속을 하나 해달라는 거예요. 오늘 밤은 자기가 이끄는 대로 해달라고. 무슨 요청을 하든. 그리고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믿지는 않아도 좋으니 그냥 받아들여달라고. 저는 물론이라며 승낙했죠. 잠자리에서 리드 하는 여성은 제 타입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그녀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자신이 떠나온 세계에 대해서, 인류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미래의 나에 대해서. 저는 처음에는 이게 무슨 얘긴가? 했어요. 상황극을 하려는 건가? 아님 좀 변태적 취향을 가지고 있나 싶었죠. 그런데 그 눈빛이 너무도 진실돼 보이더라구요. 그리고 결정적으로다가 저는 이미 사랑에 빠져버렸거든요. 그녀의 요청대로, 잘 믿어지진 않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죠. 뭐든 해보기로 한 거예요. 그런데 이런 일이..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녀는 정말 미래의 저를 사랑하고 있더군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시간여행을 한 거였어요. 그 세계에서도 시간여행은 아직 발명되지 않았는데, 비의를 다루는 블랙 닥터들이 그녀의 사연을 듣고 포털을 열어주었대요. 하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는. 그 포털은 그 당구장에 있던 다트머신이었어요. 그 다트머신을 통해 이곳으로 들어왔대요. 그리고 바로 저를 만난 거죠. 안타깝게도 지금 그녀는 아파요. 몸의 수분 상태가 급속도로 불균형해졌어요. 아마도 제가 강제로 탯줄을 뽑는 바람에 그녀 몸의 수분이 양수로 모두 쏟아져 나왔고 전해질 불균형 상태에 빠졌나 봐요. 갈수록 그녀는 여위어 갔어요. 탈수 증세가 심해져서 수시로 실신했어요. 아무리 물을 많이 마셔도 그녀의 몸은 원래의 수분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저는 그녀를 설득했어요. 이대로는 죽을지도 모르니 다시 미래로 돌아가라고. 가서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오라고. 하지만 그녀는 미래의 저에게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계속 귀환을 거부했어요. 돌아가는 도중에 그가 죽으면 어떡하냐면서. 다시 돌아오기 전에 말이에요. 우리는 서로를 설득했어요. 그녀는 미래의 내가 죽지 않기 위해 저의 상처를 지우도록 허락해 달라고, 나는 그녀가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니 집으로 돌아가 달라고. 결국 제가 이겼죠. 어차피 이런 몸으로는 제가 다시 그녀의 몸으로 들어갈 수도 없으니 몸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고 그녀를 설득했어요. 그녀도 결국 수긍을 하고.

그리고 그날, 그녀를 데리고 다시 그 당구장을 찾아갔는데 당구장이 없어진 거예요. 카페로 바뀌었더군요. 감이 오시나요? 마법사님의 20세기 카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당구장 말이에요. 그게 사라졌어요. 아마도 그날 제가 그녀의 힐링을 수용하고 바로 돌아왔더라면 그녀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저 때문에.. 그녀는 이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울음을 터뜨렸어요. 순간 저도 절망감이 몰려와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지더군요. 그녀는 곧 울음을 멈추고 눈물을 닦더니 어차피 돌아갈 수도 없게 되었으니, 이렇게 된 이상 자신은 어떻게든 목적을 이루어야겠다면서, 미래의 저를 위해 정중하게 다시 한번 부탁한다며 결심이 서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제게 말했어요. 그리고는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이 반지를 휴대폰에 가져다 대면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신호가 뜰 거라고. 미래의 제가 떠나는 그녀에게 반드시 다시 돌아오라며 끼워준 반지라고. 그리고 언제까지든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사라졌어요. 저는 그녀를 쫓을 수도 붙잡을 수도 없었어요. 그녀에게 어떤 답도 해줄 수 없었으니까요.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데 그녀는 미래의 나를 사랑하고. 그녀는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는 그녀를 위해 내 기억을 지워야 할까요? 지금도, 미래에도, 누구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데 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그대로 앉은 채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는데, 그런 저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지 카페 맞은편 횟집 사장님이 다가오더니, 무슨 사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카페 주인이 마법사인데 혹 고민을 해결해줄지도 모르니 한번 문의를 해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긴 사연을 보내게 되었어요.

마법사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그녀의 말대로 정말 제 기억을 지우면, 상처를 없애면 미래의 제가 죽지 않게 될까요? 그녀는 이 낯선 세계에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 몸을 하고 다시 힐링을 시도하다 그녀가 죽게 되면 저는 어떡하죠? 없었던 일인 척 제 인생을 다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녀는 저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데. 저는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방법을 알려주셔요.

너무 이상하고 긴 이야기라 말로는 다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DM을 보냅니다. 곤란하시겠지만 정말 마법사가 맞으시다면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기다리겠습니다.

 

P.S.

붕어빵은 어떤 장교님이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청소가 끝나면 카페 사장님께 전해달라고 하셨는데 제가 도저히 더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냥 와버렸네요.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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