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과 연민 사이 어딘가, 이상한 관계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2018.03.28
의존과 연민 사이 어딘가
우리는 관계의 어느 순간엔가, 의존과 연민의 사이 어디에 놓여지게 됩니다. 의존과 연민은 마치 외줄의 양쪽 끝단 같아, 이리로도 저리로도 가지 못한채.. 중간 어디쯤엔가 걸쳐져 있게 만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말은 하지만, 뒤집어 까 보면 그것은 어떤 때는 의존이라 불리고, 또 어느 때에는 연민의 감정을 부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사랑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정의를 한들, 자기만의 정의일 뿐.. 우리는 이 혼란하고 모호한 개념을.. 여기다 저기다 막 가져다 씁니다. 이 감정, 저 감정에 사랑이란 라벨을 붙이고, 이 관계, 저 관계에 들이대보고 저울질합니다.
결속이 깊어진 관계에서 의존과 연민은, 양가감정의 양극단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괴롭힙니다. 의존된 마음은 상대가 나를 단단히 붙들어 주기를 요구하고.. 연민의 마음은 자책감의 부담을 안지 않으려 과도한 희생을 요구받습니다.
모두 상대의 어떠함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갖는 감정들입니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상대의 어떠함에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의존과 연민의 감정을 떠나, 상대의 객관적 현재 상황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우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란 게 서로 뒤엉키고, 여러 삶의 국면들이 혼란스럽게 교차함으로, 우리는 매번의 모든 사안을 무 자르듯 탁! 정리할 수 없습니다. 관계란.. 사랑이란.. 그래서 혼돈 속에 피어나는 의지입니다.
기대어진 관계는 상대의 변화하는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의존되어진 내 상태에 영향을 줄 테니 말이죠. 그러나 변화하려는 상대는 무언가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적어도 변화하는 과정에 내가 짐이 되지 말아야 할 테니.. 의존된 상대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러나 연민의 마음이 그것을 헤아리게 되면.. 도울 수 없는 한계로 치닫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동시에 들게 됩니다. 하나의 마음은 의존 상태가 무너질까 불안하고, 다른 하나의 마음은 이해하고 도와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듭니다.
감당할 수 있는 시간이 흐르고..
그 외줄타기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우리는 돌파구를 찾게 됩니다. 어디론가 빠져나갈 구실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런 때에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은 시비의 거리가 됩니다. 어쨌든 나는 빠져 나가야겠으니.. 압도하는 불안정 상태를 더는 견딜 수 없으니.. 관계를 해소해야겠는 겁니다.
바람직한 방법이라면.. 대화를 하는 거겠죠. 대화 끝에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면.. 관계를 완화하거나 정리해야 하겠죠. 그러면 아프지만.. 힘들고 아쉽지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변화하는 상황이 운명적으로, 자의가 아닌 외력에 의해서 벌어졌다 해도.. 당사자 이외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을 테니까요.
그럴 때는 일단 관계를 중단하거나 완화하고 상태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은 권력에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고난도, 고통도, 환란도, 시험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폭풍이 오고 가뭄이 든다는 건.. 사막이 아니라는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몰아칠 때 움직임을 멈추면, 움직이는 폭풍은 언젠가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피한다고 하면서, 폭풍을 쫓아다니지 않는 이상 말이죠.
빌미를 찾아
그러면 좋으련만..
우리는 안타깝게도 위기를 감지합니다. 예감하고 예단합니다. 또한 감내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언제나 평화는 포기 뒤에 오는 법. 한계까지 몰아 붙여진 뒤에야 원하던 국면이 전개됩니다.
물극필반[物極必反].. 이라 그렇습니다. (주역에 나오는 말로, ‘사물의 전개가 극에 달하면 반드시 반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성질 급한 우리는 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 환경, 이 대치국면, 이 불편한 상황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고 싶습니다.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습니다. 그러니 이 국면을 전환할 모멘텀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빌미입니다.
평소에는 별거 아닌 것들, 심지어 좋아 보이기까지 하던 것들이 눈에 가시처럼 여겨지고, 이쑤시개가 전봇대 같아 보입니다. 이 상황에서, 이 국면에서, 빠져나갈 명분이 되어줄 그 무엇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보통은.. 약자가 강자에게.. 그 빌미를 붙들리게 마련입니다. 빌미를 붙든 강자는 ‘이거다’ 하고 상대를 떨어냅니다. 그 빌미.. 그것으로, 나는 연민의 부담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상대가 분명 잘.못. 했으니.. 나는 자책감도, 죄책감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빠져나갈 구멍입니다.
나는 당당하게 이 관계를 청산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를 무산시킬 수 있습니다. 관계 상실의 책임을 면할 수 있습니다. 아니 심지어 손해배상의 권리를 획득할 수도 있습니다. 금전적 배상은 아닐지언정.. 감정적.. 정서적 피해자 코스프레를 할 수 있고, 나는 당당하게 부도난 관계의 책임을 상대에게 물릴 수 있습니다.
이게 상대과실 100% 라면 상대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무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복수의 칼날을 갈며, 훗날을 기약하지 않는다면 말이죠.
관계의 집행유예
그러나 100% 과실의 교통사고가 없듯, 관계의 파탄에도 100% 일방 과실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9:1, 8:2.. 아주 많이 봐줘야 7:3이 있을 뿐입니다. 6:4는 논쟁의 소지가 많고 5:5라면 굳이 관계를 파탄 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비율만큼 의존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서로 상대에게, 나의 과실이 1이라고 2라고.. 너의 과실이 9라고 8이라고 .. 전가를 해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함께 쌓아올린 수많은 시간과 감정, 추억과 기억의 공든 탑을 마구 무너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너의 과실이 9라고 말하는 건, 내가 너에게 9만큼 의존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너의 과실 1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1만큼 의존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관계를 파탄 낼 이유가 없는 사람입니다.
결국 관계의 파탄은 서로서로 9만큼.. 8만큼.. 의존되어 있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 人을 독립된 사람의 당당한 보폭으로 이해하지 않고.. 기대어진 관계의 두 개의 의존된 나무토막이라고 속삭이며, 착취하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이 고구마 백만 개의 답답하기 짝이 없는 국면을 빠져나가야겠 거든.. 기꺼이 보내줍시다..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 악역을 맡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이었거든.. 지난 모든 감정이 진실이었거든.. 빠져나가려는 그에게 기꺼이 나쁜 놈이 되어 줍시다. 그래봐야 1, 2가 아니었습니까? 그쯤 감당할 수 있는 겁니다.
용기 없어 지르지 못하는 상대라면 먼저 뺨이라도 갈겨 줍시다. 폭행죄로 고소라도 당해야.. 지지부진 감정싸움만 해대는 관계의 악다구니에서 서로를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봐야.. 관계의 집행유예.. 그거 받고 끝입니다.
사랑을 하.자.
사랑하는 자는.. 관계의 지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는. 것이니까요.. 받거나 주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내가 하.는. 동안.. 관계는 멈출지언정, 사랑은 멈추어진 게 아닙니다.
빠져나가려는 자에게 빌미를 제공해 주고
머뭇거리는 자에게 뺨을 날려 줍시다.
그리고 우리는 한 발짝 물러나 기다립시다.
세상은 반드시
물.극.필.반. 하니까요.
꽃은 피고 꽃은 지고,
눈은 오고 눈은 녹고,
여름도 가을이 되고,
겨울도 봄이 되니까요.
언젠가는 지나갈 테니까요.
멈추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자의 운명일 뿐..
그러나 운명이 다하거든..
서쪽에서 해가 뜨고,
빗방울이 하늘로 오르고,
봄이 지나 다시 겨울 되고,
겨울 지나 다시 가을 되어도..
내 사랑의 흔적은 찾을 수 없을 겁니다.
그것은
하.는.자.의 권.리.
이니까요.
의존과 연민 사이 어딘가,
우리의 이상한 관계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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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PH 알레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