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희야, 기대하고 있어
2011.04.04
태희야, 차라리 못생겼으면 좋았을 뻔했다. 사람들의 편견도 선입견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너한테는 예쁜 게 죄가 되어버렸구나. 그런데 꼭 예뻐서 그런 걸까?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주목하고, 거칠게 선입견을 품어 버리는 게 단지 미모 때문만일까? 네가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면 조금 덜 했겠지? 음.. 예쁜 배우들은 너무 많으니까. 도리어 너에 대한 선입견은 예쁜 데다가 명문대 출신이라는 것까지 더해진 것이겠지.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가정형편과 학벌, 미모.. 누가 너를 좋아하겠니, 너를 부러워할 뿐이지. 모름지기 사람이란 부러운 대상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은 거야. 자기 자신이 드러나거든, 초라한 자신이 거울 앞에 선 것처럼 드러나 버리는 거야. 그래서 네가 어려운 거지. 동경하며 따를 수도 있겠지만, 너에 대해 선입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란 네가 부러운 사람들이 아니겠니.
왜 배우의 길을 택했니? 어쩌다 보니 그랬니?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거야? 아무리 그래도 너는 얼마든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왜 배우에 욕심을 내는 거니? 그냥 좋은 추억이었다고 생각하고 부담 없는 CF모델만하며 살아가도 좋으련만.. 그마저 힘들면 다시 네가 걷던 길로 돌아가 공부를 더 해서 교수가 되든 너의 전공을 살리든 아니면 좋은 남자 만나 결혼을 하든 뭐든 네가 흡족한 길을 선택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힘든 배우의 길을 가고 있는 거니?
중학교 3년 내내, 올 ‘수’를 맞았더구나. 학교가 끝나면 다른 학생보다 일분이라도 더 공부하려고 집까지 뛰어갔다며? 너는 뭐든 열심히 하는 아이였구나. 태희는. 그래 우리 사회의 공교육시스템이라면 너와 같은 아이들이 명문대까지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거야. 모두들 그렇게 해야 한다고 교육과정을 그렇게 정해 놓았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앞만 보며 열심히 달리는 아이들한테만 길을 열어주도록 시스템이 설계되어 있지. 그렇다면 네 십 대를 송두리째 투자해서 달려온 노력의 결과인데, 이제 남은 건 탄탄대로뿐일 텐데. 왜 그 결과를 만끽하지 않고 험난한 배우의 길에 들어서 버린 거니? 듣지 않아도 보지 않아도 될 소리들, 기사들을 들어가며 꾸역꾸역 걷고 있는 거야? 가슴 아프게 말이다.
어쩌다 CF모델이 되었을 뿐인데 네 미모와 특별한 학력에 사람들이 무섭게 주목하고 기대하기 시작했지. 어쩌면 그때의 너는 적당히 하다 그만두고 싶었을지도 몰라. 그냥 ‘가는 데까지 가보지 뭐’ 하고 설렁설렁 발을 들여놨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너무 들어와 버렸다. 수렁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니? 처음에는 뭔지도 모르고 발을 들여놓았다,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몸이 빨려 들어가 버리게 되는 것이지. 돌이켜 보니 이미 늦었니? 그런데 그렇더라도 너의 출중한 실력과 배경이라면 언제든 뒤돌아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일 텐데, 너는 왜 고통스러우면서도 돌아 나오지 못하는 거니?
어쩌면 이것은 운명이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너도 어느새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은지, 십여 년이 가까워져 오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운명이 참으로 야속하구나. 배우가 되기 위해 준비해온 너의 십 대였다면 이렇게까지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배우란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표현해야 하는 직업이지. 아픈 사람, 슬픈 사람, 좌절한 사람, 고통스러운 사람, 저주받은 사람.. 내가 아닌 다른 이의 삶을 대신 표현하려면 배역과 공감할 수 있어야 해. 그 인물이 무엇을 느끼는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떻게 눈물을 흘리는지, 적어도 조금은 비슷한 감정과 정서를 자신의 삶에 담고 있지 않으면 국어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거야.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지. 배우는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인지도 몰라. 학창시절, 너는 글쎄 이해가 잘 안 간다고 생각했을, 아니 어쩌면 한 번도 공감하려고 시도도 하지 않았을, 뒷좌석 불량 청소년들의 정서와 머리가 텅 비어서 밥 먹고 학교 갔다 학원 가는 일을 로봇처럼 수행하던, 그러나 노력한 만큼의 성적이 나오지 않아 비관하다 고만고만한 인생을 벗어나지 못했을 범생들의 정서를 느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최고와 최상의 것들로 십 대를 가득 채워 온 너로서는 공감하기 어려운 것들이었을 거야. 어쩌면 배우란 것은 그런 인생들이 가질 수 있는 마지막 희망, 얼마 남지 않은 직업일지도 모르니 말이야.
껌 좀 씹어 보고, 뒷골목에서 담배 좀 피워보고, 침 좀 뱉어보고 하던 아이들이 꾸어볼 수 있는 마지막 꿈. 조회시간에 잠들었다 종례시간에 깨어나는, 학원 간다고 돈 받아다가 오락실에서 밤 새버린, 공부한다고 끊어놓은 독서실 옥상에서 교회 오빠랑 나쁜 짓하다 경비 아저씨한테 들켜버린 아이들의 찬란한 돌파구 같은 직업에 곱게만 자란 듯한 네가 도전하고 나섰으니 모두들 어안이 벙벙했을 거야. 처음에는, ‘저러다 말겠지’, ‘하던 공부나 하지’ 하고 반신반의했겠지.
그런데 너는 결국 그 길에 들어서 버린 거야. 그리고는 근 십 년이 다 되어가도록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깨달았니? 세상에 열심히 해도 안되는 일이 있다는 걸 말이야. 너는 연기도 공부처럼 정말 열심히 하더구나. 같이 하던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참 열심히 한다고 말하더구나. 솔직히 쪽팔린 일이다. 결국 열심히 해도 그 모양이라는 말이니. 그 말이 칭찬이겠니? 욕이겠니?
태희야, 나는 너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이제는 너를 매우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될 것 같다. 어쩌면 너는 위대한 선택을 하고 있는지 몰라. 모든 것을 가지고도 운명 때문에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면, 너는 가장 위대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거야. 그것은 살길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연기를 해 온 수많은 배우들의 선택을 넘어서게 되는 것일 테니까.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는 사람이 하는 일은 당연한 일 일뿐이야. 그리고 그런 배우일수록 삶의 여유가 생기고 배에 기름이 끼면 어느새 반짝이던 눈빛은 사라지고 적당히 명성에 기대어 남은 삶을 진보 없이 살아가지. 그러다 잊혀지고 벌어 놓은 돈으로 예전 명성을 추억하며 그저 그런 삶을 살아가는 거야. 그것이 두려운 배우들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고 도전하고 또 도전해서 더 높은 곳을 나아가기도 하지만 그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란다. 그냥 삶에 기대어도 되고 적당히 명성에 안주해도 뭐라 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야. 그런데 네 시작이 그렇다. 꼭 배우가 아니어도 이미 가진 것, 이룬 것만으로도 남부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너인데 너는 이 길을 떠나지 못하고 있어. 그리고 수도 없이 욕을 먹고 모멸을 당하고 음해를 당하면서도, 그만두지 못하고 또 도전하고 있어. 돈 때문이니? 아닐 거야. 돈 때문이라면 그간의 이미지를 적당히 유지하면서도 얼마든지 벌 수 있지 않니? 배우 타이틀만 가지고 CF만 찍어대는 누구누구처럼 말이야. 또 아니면 얼마든지 좋은 혼처를 잡아 시집을 갈 수도 있을 거야. 널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니? 그런데 못 도망가고 이렇게 붙잡혀 있는 건 네 운명이 네게 너무 가혹하기 때문이란다. 왜 그렇게 가혹할까? 평생 울어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한 설움과 슬픔을, 남들은 평생을 살아도 들어보지도 못할 소리 들을 들어가면서도 꾸역꾸역 걷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니?
태희야, 이제야 네가 배우가 되어가는가보다. 이제야 이것이 진짜 네 길임을 깨달아 가나 보다. 이제 너는 아이 잃은 엄마의 슬픔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야 너는 공든 탑이 무너진 좌절한 영혼들의 고통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야 너는 연기에 빼어내 쓸 수 있는 정서와 감정들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인물과 대화할 수 있겠지. 대본에 쓰여있는 ‘슬프게 흐느끼며’ 가 대사인지 지문인지 몰라 답답해하던 네가, 이제는 카메라만 돌아가도 눈물을 주르륵 흘릴 수 있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네가 자랑스러워지려고 하는 것 같아. 어떤 배우들처럼 어쩔 수 없어, 가진 게 고통이고 슬픔이어서, 그것을 팔아 배우의 길을 걷는 게 아니라. 네가 가진 모든 것, 네가 수고하고 노력해 얻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새로운, 전혀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여 너의 것으로 녹여내고 있는 너를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 같다.
아직도 네게는 여전히 기회가 남아 있어. 언제든 배우의 길을 포기하고 돌아가도 너의 십 대가 이루어 놓은 업적만으로 충분히 풍족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야. 그저 청춘의 추억이라 여기며 남은 생을 여전히 명문대생 엘리트 출신으로 살아갈 수 있어. 그럼에도, 이 길을 계속 가겠다면 모두들 ‘언제 그만두나 보자’ 하고 있는데도 굴하지 않고 계속 이 길을 걸어간다면 나는 너를 응원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너는 누구도 경험해 보지 않은 삶의 정수를 갖게 되는 거야. 어느 배우도 모든 것을 가졌으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바닥부터 다시 정상까지 올라가는 경험을 소유해 보지 못했을 테니 말이야. 그런 거라면 그게 너의 운명이라면 새로운 삶에 도전한 너의 이십 대는 가장 값진 시절이 되는 거야. 훗날 가장 아름답게 기억될 소중한 시절이 되는 거야.
너의 이야기를 다루게 될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아마도 너를 아는 누구도 지금의 너를 예상치 못했을 거야. 얼굴 예쁘니 CF모델 좀 하다가 배우한답시고 왔다갔다 하다 말겠지. 그러다 재벌이나 명문가에 시집이나 가겠지. 그렇게 생각들 했을 거야. 그런데 지금까지의 너는 예상을 깨고 있다. 너의 십 대 시절처럼 죽어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래 열심히 해서 안될 일이 너에게는 정말 없는가 보다. 열심히 너의 삶을 인생의 희로애락으로 가득 채우렴. 기쁨과 우월감만 가득했을 너의 삶에 지난 십 년처럼 좌절과 슬픔, 곤혹으로 새롭게 덧칠을 하면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매우 매력적인 표정과 눈빛을 너는 갖게 될 거야. 이렇게까지 했는데 여기서 그만두는 건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니니? 이제 표정이 생기기 시작하고 깊이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멈추는 건 힘들게 감당해 온 너의 청춘을 배신하는 일이 아니겠니?
태희야 네 연기에 절망한 자의 몸짓이 배어나기를 기대할게, 네 표정에 모든 것을 가졌으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미소가 담겨지기를 기대할게, 기계처럼 주어진 임무를 척척 수행해대는 유능함에 더해 고장 난 기계를 끌어안고 밤이 새도록 고치고 또 고쳐서 덜컹하고 기계가 돌아가는 순간을 경험한 사람의 환희가 너의 연기하는 손끝에서 묻어나기를 기대할게. 그런 너를 스크린에서, 브라운관에서, 그리고 칸의 레드 카펫 위에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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